이 순간을 놓치지 마 - 꿈과 삶을 그린 우리 그림 보물 상자
이종수 지음 / 학고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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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비대면 시대의 최고의 힐링 소재이다. 말없이 눈으로만 그림을 그린 화가의 정신과 예술혼, 그리고 피사체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야말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소통의 최고 아이콘이 됐다. 거기에 우리 출판문화와 인쇄 기술 등의 발달도 한몫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리라. 코로나 이후 국내에서 유독 많이 나온 출판물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그림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로 서양미술과 세계의 거장들의 작품이지만 이렇게 출판물으로라도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는 사실에 독자는 감사하고 있다.

독자는 그림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관심이 많다. 그림을 직접 그리거나 미술계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취미로서의 미술을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코로나 이후 그림에 관한 책이 많이 쏟아져나와 '눈요기'도 많이 했고, 몇 권 사기도 했고, 운 좋게 선물 받은 것도 있어 갑자기 책장에 그림 관련 책이 늘었다. 그림에 관한 책은 대부분 미적으로도 가치가 크고 보관성도 좋은 재질로 제작돼 집에 보관용으로 두고 수시로 볼 수 있다는 점도 만족감을 크게 해준다. 다만 2년 여 나온 책들이 서양미술에 집중돼 있다는 점은 아쉬움이 크다. 그림에 관한 에피소드가 적어서이거나 그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부족해서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그림에 대한 책이 많지 않았다는 점은 안타깝기도 하다.

 


 

그때 이 책 『이 순간을 놓치지 마』은 왜 우리 그림들이 많지 않았을까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조금은 달래준다. 책의 제작이야 유명한 출판사이고 종이질이 좋아서가 아니다. 우리의 그림이 전해오는 좋은 작품이 많지 않은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저자 이종수가 우리나라 국보, 보물로 지정된 그림 중 임의로 선정, 감상법이나 그림의 의미, 조선미술사 등을 곁들여가며 소개한다. 우선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부터 살피고 있다. 우리의 그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면 망설이지 말고 먼저 다른 이의 보물 상자를 구경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고 말문을 연다. 믿을 만한 누군가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나라의 보물라면 어떨까. 이유 없이 보물로 대접받지는 않을 터, 수많은 옛 그림 가운데서 감상의 큰 줄기를 잡아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이드다.

저자에 따르면 삼국시대 석탑과 불상부터 고려시대 건축과 도자기, 그리고 조선시대의 실록과 회화에 이르기까지 문화재는 종류가 다양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회화는 그리 많지 않다. 2,643점이나 되는 국보ㆍ보물 가운데 그림은 303점이 전부다. 그림 한 폭에서 파란만장한 역사 이야기, 드라마틱한 인물 이야기를 쉴새없이 끌러내는 저자는 나라의 보물로 지정된 그림 가운데서 ‘나만의 보물’ 22점을 추려냈다. 그리고 여기에 보물로 지정되지는 못했지만 결코 빠지지 않는 작품, 가치도 아름다움도 덜할 리 없는 사연 많은 작품 4점을 더했다. 모두가 ‘이만큼은 꼭 알았으면!’ 싶어 함께 나누고픈 그림들이다. 옛 그림이 낯선 이에게는 그 만남을 편히 이끌어줄 길잡이로 삼기에 충분하고, 이미 옛 그림과 친숙한 사이라면 혹 모르고 지나친 이름은 없는지 되짚어볼 좋은 기회다.

 


 

나라에는 나라의 보물이 있다. ‘보물’이라는 이름으로 구별된 문화재들이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ㆍ예술적ㆍ학술적ㆍ경관적 가치가 큰 것’을 문화재로 정의한다. 이에 근거해 처음 보물을 지정한 것이 1962년. 법규에서 말한 대로 문화재 가운데 중요한 것, 가치가 크고 유래가 드문 것이 선별 기준이다. 물론 그 ‘가치’를 수치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작품들을 보고 즐기는 우리에게는 또 저마다의 기준이, 감수성이, 애정이 있다. 모두가 같은 눈으로 예술을 대할 리 없지 않은가.

“어떤 그림 좋아하세요?” 그림 이야기를 쓰는 저자에게 이 질문은 일상이라고 한다. 그럴 때면 그만의 보물 상자를 열어 어렵지 않게 골라낸다. 질문이 이어진다. “그 그림이 좋은 그림인가요?” 여기에는 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일까. 이 많은 그림 가운데 무엇을 좋은 것이라 말할 것이며 어떻게 좋은 것을 꼽을 수 있을까. 여기서 『이 순간을 놓치지 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이 책은 귀하고 값지고 소중한, 그래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우리 그림 이야기다. 앞서 저자가 말한 대로 이 책의 그림들은 유래한 시간이 길고 길어, 그 긴 세월을 지내고도 놀라울 만큼 상태가 온전해서, 혹은 예술적으로 빼어나게 아름다워 나라의 보물이 됐다. 저자의 눈빛이 반짝인다. 좋아하는 이유, 좋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따라가보니 다다르는 지점이 있다. 이야기가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화폭을 마주한 순간 어느 봄날의 비탈길, 줄다리기 한창인 개울가 다리 위, 시대의 끝을 고하는 역사의 현장에 들어선다. 그림은 이 봄을 놓치지 말라고 속삭이는가 하면 작은 개울 건너기도 쉽지 않다며 다독이다가,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이냐 물어오기도 했다. 이렇게 마음에 들어온 그림들을 크게 네 가지로 모았다.

 


 

① 이상 - 꿈꾸다

이상향을 그려낸 산수화나 시정을 담아낸 시의도, 군자의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 등에서 특히 눈길 가는 작품을 꼽았다. 꿈을 그린 그림, 꿈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담아낸 그림들이다. 시인의 숨결을 담아낸 시의도가 있는가 하면, 이상향의 풍광을 산수화로 옮겨온 그림도 있다. 군자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사군자는 한자 문화권에 자리 잡은 독특한 장르다. 「소상팔경도」가 그려낸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추성부도〉에서 불어오는 메마른 가을바람, 〈매화도〉의 화려한 꽃향기에 담긴 의미와 기대를 들려준다.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은 인간이 숨 쉬어온 이래 함께해온 변치 않는 본능이다. 봄날 꾀꼬리 소리에 멈춰 선 나그네의 노래와 함께 여행을 시작해, 소상의 절경을 지나 험난한 촉도를 넘은 곳에서 겨울날 피어오른 매화 향에 잠긴다. 독자는 이 가운데 한 작품 〈추성부도〉를 골라 열심히 읽어본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 끝에 동자가 걸린다. 동자의 손동작을 보면 이미 시인에게 답을 전한 뒤임을 알 수 있는데 원문의 '사건'은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시인의 성찰과 탄식으로 채웠다. 마침 그림도 절반에 이르렀으니, 어땠을까. 원문을 따라 시인의 속마음을 그려넣었을까? 읽기에 따라서는 그렇다. 동자 뒤로 펼쳐진 장면은 산수뿐이다. 시인의 집을 에워싼 산과 바위, 그리고 사이사이 뿌리내린 나무들. 동자가 '그 사이에서 소리가 난다'고 했던 나무들이다. 위로는 달이 떠올랐다. 구름에 가리운 것도 아니건만 보름의 둥긂이 무색하게, 금속성의 시린 질감이다."(p.32)

 


 

② 현실 - 만나다

우리 강산을 새롭게 바라본 진경산수화, 생활 현장을 생생히 살려낸 풍속화, 실사의 정신으로 탐구한 자화상 등을 골랐다. 삶의 현장에서 만난 장면, 현실 속 만남을 담은 그림들이다. 만난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새롭게 트인 눈으로 우리 산수를 만났고, 어디서도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이들이 그림의 복판을 차지했다.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진경산수화와 그때 그 시절 인간 만사를 전해주는 풍속화, 조선 최초의 자화상까지. 이런 ‘만남’은 곧 ‘깨달음’이 된다. 진경산수 시대를 연 〈금강전도〉, 진경 너머의 풍경을 꿈꾼 《병진년화첩》. 조선 최초의 〈자화상〉도 빼놓을 수 없다. 일만 이천 봉 금강산의 푸른 기운이 그립다면, 달밤의 밀회를 즐기는 연인의 마음이 궁금하다면, 실사의 정신으로 자신을 마주했던 선비를 만나고 싶다면 이 그림들을 눈여겨보는 것이 좋겠다. 특히 정선의 〈금강전도〉는 그 이름값만큼이나 독자의 마음을 잡아 끈다.

"실경이라기엔 어쩐지 달콤한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화면의 위아래를 채운 푸른빛 배경. 금강산을 고이 모셔올리듯 둥글게 감싸 안고 있다. 현실 너머의 꿈 같기도 하고 구름 속 신비의 선경 같기도 하다. 중앙에 들어찬 빽빽한 봉우리 바깥은로 공간감을 확대하였으니, 구성으로 볼 때도, 그럴듯한 선택이엇다. 실경에만 충실한 그림과는 차이가 선명하다.(p.116) <중략> 물론 정선이 〈금강전도〉 하나만으로 이 명예를 얻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삶 대부분을 금강산 그림과 함께했다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다. 정선이 금강산을 처음 만난 것은 1711년, 서른 여섯이 되었을 때로 애초에 그림 제작을 위한 여행이었다.(p.117)"

 


 

③ 역사 - 기록하다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남다른 그림들도 있다. 국가 행사를 그린 기록화와 전신사조 정신으로 무장한 초상화, 선현에 대한 추숭을 담아낸 기념화를 아우른다. 그림 속 역사를 한눈에 마주하는 시간이다. 떠르르한 나랏일 가운데 주요 장면을 담은 기록화는 역사 속 그날을 간접 체험하기에 제격이다. 조선 회화의 자랑인 초상화와 기념화에서도 흥미로운 역사를 만날 수 있다. 한강변 독서당에서 시 한 수를 나눠 읊고 국왕의 화성 행행에 함께해볼 기회다. 세계 지도 속에서 조선의 이름을 찾아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조선 건국 시조의 모습과 항일 지사의 뜨거운 삶을 엿볼 수도 있다. 정조의 꿈이 담긴 《화성행행도병풍》, 태조의 위용을 그린 〈태조어진〉은 물론 《고산구곡시화도병풍》의 제작 과정도 당대 정치 상황과 맞물려 흥미롭다.

 

④ 보물 아닌 보물들

보물 같은 그림들이 아직 많다. 나라의 보물로 꼽혀도 충분한 대작들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문화재로 공인받지 못한 안타까운 경우다. 〈몽유도원도〉처럼 해외 소장품이어서 우리 보물로 지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국내 그림 가운데도 왜 아직 보물로 지정되지 못했을까 아쉬운 작품도 있다. 언젠가 보물 지정 소식이 들려올지 모른다는 즐거운 기대를 갖게 해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장엄한 관음의 세상에서 종교와 예술 사이를 떠돌다, 신비로운 도원을 노닐던 왕자의 꿈에 잠겨보면 어떨까. 분분한 향설 속 화가의 사랑 이야기와 조선 마지막 거장의 화려한 필묵도 놓치고 싶지 않은 보물이다. 보물로 뽑히지는 않았지만 모두 더할 나위 없이 뜻깊고 아름다운 그림들이다.

 


 

⑤ 탐나는 그림, 헤아리는 즐거움

유래한 눈으로 보고 뜻을 헤아려 마음으로 그림을 읽는 일, 이왕이면 귀하디귀한 걸작들과 함께 그 즐거움을 누려보면 어떨까. 나라의 보물이 된 우리 그림 26점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또 박물관 작품 앞에 선 이들이 저마다 어떤 그림이 최고의 보물인지를 꼽으며 ‘나만의 보물찾기’를 즐기기를 기대한다. 그 바람이 통한다면 옛 그림을 보는 즐거움은 몇 배나 커질 것이다. 누군가의 보물이 나의 보물이 되는 여정, 이 책과 더불어 떠나는 그 길이 곧 ‘보물처럼 빛나는 여정’이 되기를 꿈꾼다.

"붓끝은 날카롭게 삐쳐나가, 톡톡 짧은 리듬처럼 끊어지길 반복한다. 길고 유려한 선으로 온전히 마무리된 소재라곤 보이지 않는다. 백설로 뒤덮인 산의 형상마저도 소복한 눈이 주는 푹신함이라기보다는 차갑게 반짝이는 쪽에 가깝다. 그리고 그 거친 붓이 절정을 이룬 곳은 매화. 서옥 옆에 뿌리내린 두 그루 노매를 보라."(p.330)

 

저자 : 이종수

 

고려대학교에서 국문학을,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작자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완성했는지 그 맥락과 계보를 찬찬히 짚으면서 이야기로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안목과 인간미에 주목하는 따뜻한 시선이 돋보인다. 『조선회화실록』, 『옛 그림 읽는 법』, 『그림에 기댄 화(畵)요일』, 『그림문답』, 『이야기 그림 이야기』, 『벽화로 꿈꾸다』 등 우리 옛 그림을 섬세하게 읽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여러 권 썼고, 역사 속 인물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조광조 평전』, 『류성룡, 7년의 전쟁』, 『그대, 비해』 등을 펴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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