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한국현대사 인권기행 2
박래군 지음 / 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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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경제 대국'의 자리에 있다. 불과 110여년 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들어간 나라였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근대화와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낸 세계 여러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의 성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빠른 성과가 나쁠 일은 없지만 적잖은 내부 문제도 그대로 안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과 항일로 갈라지고, 실제 수많은 항일투사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1945년 일제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해방을 맞았으나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참전 승전국의 이념에 따라 허리가 잘린 채 각각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의 산물로 한국전쟁의 참담한 내전도 겪었다. 남한만의 정부 수립과 북한 역시 반쪽짜리 그들의 정부를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해방된 지 5년도 안 돼 이념 갈등으로 인한 남북간 한국전쟁도 치렀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또 둘로 갈려 무려 70년이 넘게 통일은커녕 점점 이념의 골이 깊어져 이젠 영토 통일뿐만 아니라 민족 통일도 새로운 문제로 부각된 상태다. 이 험난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그래도 우리 민족의 근면성과 인재 기술을 바탕으로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망치'를 든 채 산업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근현대사 중에서 독립과 통일, 민주화 등 과제에 혼신의 힘을 다한 끝에 성공적 결과를 얻어냈으나 거기에 따른 희생 또한 못지않게 컸다.

 


 

이 책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110년간 이 땅 곳곳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들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 결코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고귀한 희생, 차마 말 못할 수치스러운 전쟁과 산업화 과정에서 숨죽인 민주주의, 인권 투쟁까지 굵직한 사건들의 상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다만 안 보이고 세월에 가려져 잊혀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수풀이 무성하지만 어쩐지 음험해 보이는 깊은 산골짜기. 이 책의 표지 모습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한국전쟁 중 일어난 거창 박산골 민간인 학살 현장의 현재 모습이다. 1950년, 517명의 남녀노소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총살당했다.

이 책은 역사적 상처가 된 장소들을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직접 찾아가 인권의 시각으로 정리해낸 답사기이다. 2년 전 출간된 인권기행 1권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는 한 번쯤 가보았거나 알고 있는 장소들을 방문해 그곳의 의미를 뒤집어보거나 이면에 숨겨진 사연을 찾아내는 여행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주로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곳, 아예 길이 없는 곳에 남겨진 인권의 현장들을 탐사했다.

 


 

이번 기행은 대한민국의 근대와 시민을 탄생시킨 민중의 항거 동학농민혁명의 호남과 충청 지역 현장부터 시작한다. 천주교 순교성지에서 죽음으로 지켜낸 종교와 신념의 자유를 짚어보고 나서, 백정 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선 한국 최초의 인권운동단체인 진주 형평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흔적을 따라간다. 이어서, 전국에 퍼져 있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터 중 대표적인 몇 곳을 찾아 그 참혹한 실상을 파헤치고 ‘골로 간다’라는 말의 기원을 곱씹는다.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터에서는 사회복지시설의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고, 동두천 미군 기지촌에서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리고 현지 주민들을 내쫓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재개발 사업의 전형을 성남 광주대단지 사건과 용산참사 현장에서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전태일 열사의 모친으로 유명하지만 스스로 노동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던 이소선이 청계천, 구로, 창신동을 배경으로 한평생 보여준 연대 정신을 되새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 땅 곳곳의 상처들은 아무리 가려져 있어도 언젠가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픔을 딛고 용기를 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직접 말을 할 수 있도록 연대하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자는 것이 이 책 전반에 진하게 배어 있는 저자 박래군의 절실한 메시지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는 아프기만 하다. 3.1절, 제주 4.3사건, 세월호,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피와 슬픔 위에 놓인 역사를 우리는 가슴에 새기고 있다. 이런 역사의 현장은 대부분 인권을 찾기 위한 투쟁의 현장이다. 이 책에 담겨 있는 8개의 사건들은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개인의 인권이 말살된 채 독립, 통일,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 빚어진 참혹한 사건들이다. 동두천과 용산은 전쟁 이후 우리 삶 주변, 생활의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더욱 안타깝다.

동두천은 미군기지가 있었고, '양공주'라 불리며 미군들에게 몸을 팔던 여인들이 있었다. 돈을 위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몸을 팔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일부는 납치되어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고, 이에 저항하다 살해된 여인들도 있었다. 한미우호광장 바로 앞이 윤금이씨가 사라진 장소다. 하필 이름도 한미우호광장이다. 아이러나한 장소다. 그 잔인한 현장에는 어떤 알림판이나 설명도 나와 있지 않다. 역사는 미군의 만행을 외면한 채, 그 흔적이 조용히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 거주지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과 이를 쫓아내려 한 이들. 용산 재개발 현장의 싸움은 치열했다. 철거민들은 망루 속에서 저항했고 이를 제압하려는 대치는 긴 시간 이어졌다. 그러던 중 불이 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특공대원이 죽어서 내려오게 되었다. 탈출하다 떨어진 부상자들은 몇 차례의 수술을 받고 이들 중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려 생을 마감한 이가 있었다. 용산 참사 당시 구호가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했다.

 


 

세월호 사건 때도 비슷한 구호가 이어졌다. 우리는 언제쯤 사람과 인권을 욕망 앞에 세울 수 있을까.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인권이다.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찾아간 현장은 순교와 박해, 분신과 자결이 벌어지는 참극의 현장이다. 이 슬프면서도 참담한 현장을 저자는 직접 찾아가본다. 잊혀진 장소들은 길도 명확지 않아 찾기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현지인도 잘 모르는 곳, 아예 길이 없는 곳도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있었기에 인권운동은 명맥을 이었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 땅에 자리할 수 있었다. 소수자의 인권과 계급 차별에 대한 저항이 있었기에 지금의 민주 사회가 있을 수 있었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그 장소들을 기억하는 것이 후손들의 의무가 아닐까. 저자가 흐려져 가는 기억의 현장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책 제목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처럼 이 땅 곳곳의 상처들은 아무리 가려져 있어도 입을 열고 말을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역사의 상처는 누군가 돌아볼 때 비로소 입을 연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시민들에 비해 정치적 의식이 높다고 말한다. 우리가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기억으로 인해, 나쁜 것에 저항하는 시민이 되었다. 불의의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갈 줄 아는 시민들이 되었다.

 


 

저자는 「후기」를 통해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전혀 줄지 않는 게 호기심"이다고 썼다. 자신의 역사적 사건 현장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증언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자료를 뒤지고, 많은 시간을 들여 과거 아픈 기억들을 끄집어 내 책으로 엮은 이유를 '호기심' 때문이라고 겸허한 표현을 쓴다. 독자가 보기에는 저자는 그들 피해자들에게 우리들이 '빚졌다'는 생각에서인 것 같다. 후손으로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발전된 조국이라는 자긍심을 홀로 차지하고 누리게 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일일 터다. 그것은 저자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더듬어보면 누구나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쉽게 넘겨지지 않은 책장은 저자가 흘린 눈물 때문이리라.

 

저자 : 박래군

 

인권운동가. 4 ·16재단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1988년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분신하고 세상을 떠난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을 하면서 인권운동을 하게 되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다양한 활동을 경험했으며, 주요 현안들이 발생할 때 연대기구들을 구성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활동도 많이 했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과 상임활동가, 재단법인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와 소장, 서울시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4 ·16연대) 공동대표,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현재 인권재단 사람 이사, 4·9통일평화재단 이사,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대표,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잡고(손잡고) 운영위원,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 등을 함께 맡고 있다. 들불상, NCCK 인권상, 임창순상 등을 수상했고, 저서로는 한국현대사 인권기행 첫번째 책인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를 비롯해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아! 대추리―대추리 주민들의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기록』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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