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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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는 매화향 가득한 봄이 오는 무렵 살며시 독자에게 다가왔다. 이 산문집은 시인 문태준의 계절별 제주의 매력을 노래하고 제주 삶의 진실에 한 발씩 다가가는 마음으로 쓴 에세이다. 시인은 매 시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 접한 부드러운 자연과 고유한 사물, 생명과의 교감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사유를 책으로 엮었다. 시인의 이번 산문은 이야기의 정서에 꼭 맞는 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에게 산문의 따스한 감각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한껏 선물한다. 독자에게는 봄이 오늘 길목에서 맞은 산문집이어서 더욱 기대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시인이 써 내려간 진실한 깨달음은 시와 어우러지며 여태 몰랐던 색깔로 아름답게 빛난다. 독자들은 그냥 시인이 이끄는 대로 시인의 삶과 제주 속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하며 그의 심상(心像)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글과 문장, 문학의 향기에 흠뻑 젖을 수 있다.

 

문장이 올 때 이 세상에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장은 개개의 사물과 사람과 생명이 고유하게 간직한, 꺼지지 않는 빛을 발견하는 일인 까닭이다.(p.5, 「저자의 말」 중에서)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고 외롭고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시인은 「저자의 말」을 통해 "문장을 얻는다는 것은 새로운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다"고 말한다.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도 25년이 지났지만, 시의 첫 말을 내기는 여전히 어렵다는 이야기다. 시인은 시를 짓는 이유가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전한다. 시인이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난 시의 첫 문장이 찾아올 수 있도록 마음을 쓰는 시인의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시인은 문장을 얻으려는 때에는 좋은 예감이 있고, 흥이 있다고 고백한다. 건반이나 현을 통해 음악이 세상으로 나오려는 순간처럼. 은유를 통해 시를 짓는 일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임을 감추지 않는다. 때문에 문장을 얻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고 한다. 비록 혼자의 밤과 고립은 힘에 겹지만.

 

한 편의 좋은 시는 세상에 나오는 순간 움직인다. 자족하는 시는 움직이지 않는다. 관계를 경험하고 관계를 사유하는 좋은 시는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세계를 움직이게 한다.(p.28, 「부드러운 자연」 중에서)

 


 

독자로서는 오래 전에 그의 시를 통해 만난 지 꽤 오랜만에 이 산문집을 통해 다시 만났다. 그의 산문집이 처음이니만큼 그가 제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오늘에서야 알았다. 시인은 자신이 제주에 살면서 서너 번 찾은 제주도의 오름이 자신에게 평화의 시간을 안겨주었다고 토로한다. 문태준 시인은 이성복 시인이 제주 오름을 마주한 때의 감회를 쓴 글을 소개하며, '도도록하게 나온', '소복하게 솟은' 하나의 오름처럼 우리 내면의 평화는 일렁거리고 찰랑거릴 뿐 깨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읖조린다. 소박한 행복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글에서 특별하지 않는 보통의 시간 속에서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독자도 자신을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시인은 자신의 시는 생명 세계의 살림에서 태어난 노래에 가깝다고 밝힌다. 부드러운 자연과 공유의 생명 세계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시인은 한 편의 좋은 시는 세상에 나오는 순간 움직인다고 강조한다. 관계를 경험하고 관계를 사유하는 좋은 시는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세계를 움직이게 한다는 시인의 글이 유독 봄이 오는 길목에서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 시인은 사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인생에 비유하며 다채로운 시와 소설, 영화 등의 예술 작품들을 소개한다. 이 책에서 시인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도시 오랑을 휩쓴 전염병 공포에 직면한 다양한 인간 군상과 동시에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그러면서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연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시인은 소설 <페스트>에서 페스트균의 함의에는 우리를 공포와 불행의 수렁에 몰아넣는 여러 가지 것들, 즉 전쟁과 폭력과 부조리 등을 모두 포함한다고 이야기한다. 시인은 우리는 소설 <페스트>를 통해서도 한 개인이 사회적인 몸이라는 것, 그리고 언제든지 고통에 빠질 수 있는 이 공동체가 우리가 직접 가꾸어야 할 하나의 정원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고 말한다.

 


 

시인은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태어난 듯하다. 익숙함에 속아 잊어버리기 쉬운 일상과 계절의 이야기가 시인의 섬세한 문장을 만나 쉬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그들의 직업병, 아니 천부적인 재능일지도 모른다. 계절의 한가운데 오롯이 서서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시인은 ‘요즘 가장 오래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질문에 ‘솔방울’이라고 답한다. 작은 솔방울에서 바람과 별과 낮, 빗방울, 새의 지저귐을 읽어낸다. 어떤 현상에 불과했던 움직임이 울림이 되고 마음이 되는 순간이다. 바깥 세계에서 만난 고유의 사물, 인연, 자연, 세계의 일면까지 끌어와 자신의 내면에 담으며 그 신선함으로 육체와 마음을 가꾸고 기른다. 햇빛과 물을 받으며 씨에서 돋아나는 하나의 풀잎처럼, 세계를 향한 시인의 여린 진심은 그렇게 싹을 틔운다.

먹이를 깨물어 먹는 토끼의 입 같은,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 같은 순수함은 저릿한 감동을 준다. 부드러운 자연과 공유의 생명 세계에 마음을 맡긴 시인의 문장이야말로 과장 없이 순수하다. 이 순도 높은 글을 접하는 순간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의 움직임에서 저마다의 깨끗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나아가 마주하는 모든 인연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된다. 한 편의 시, 한 줄의 문장이 우리의 마음을 길들이는 과정이다.

 


 

윤동주, 정지용, 김용택, 최하림··· 시를 잘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 본 시인의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문단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시인의 시 역시 때로는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아름다움을 위해 씌었다는 시조차 그 아름다움을 짐작하기 쉽지 않다. 도움을 받기 위해 시 해설을 들여다보아도 그 해석이 제각각이라 혼란스러워 포기하고 만다. 시인은 평소 삶의 근경에서 시적 순간을 길어 올려 시를 쓰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산문집은 삶이 녹아들어 짙은 농도를 띄는 그의 시 구절의 출생기록이기도 하다. 저자의 오랜 추억과 미래의 시공간, 현재의 상념이 뒤섞여 깊은 통찰을 지닌 문장이 태어난다. 암소를 몰고 지게를 지며 집에 돌아오던 건강한 아버지와 잠이 늘어 돌아누워만 계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풀을 뽑고 돌멩이를 캐고 텃밭을 가꾸는 일상에서 시를 끄집어왔으니 그의 시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화자가 독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 시가 아닌, 친숙하게 손을 내미는 시를 소개하며 독자가 ‘시의 정수’를 맛볼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윤동주 시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동시를 소개하며 덧붙인 “(우리가) 마주할 새로운 시간이 작은 종이 구멍을 통해 만나게 되는 반짝이는 아침의 햇살”이라는 주석은 그 자체로 새 아침을 맞은 듯 눈부시고 희망차다. 독자들은 그의 이번 산문을 접하며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것은 물론, 삶의 지표가 될 ‘첫 문장’을 품을 수도 있겠다.

 


 

이 책에는 이런 일화가 소개된다. 가르침을 청하러 간 어떤 이가 “그런 덕담쯤은 누구나 할 줄 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한 어른은 답한다. 별것 아닌 깨달음조차 얻기 위해 평생을 돌아가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고. 자신의 내면을 기르는 일을 꼭 독서에 일임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다. 시인은 한적한 시골길을 걸을 때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들려오는 발소리, 벌레 울음소리, 흔들리는 마른풀의 소리에서 ‘나 아닌 존재’들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다정히 일러준다. 작은 솔방울과 눈송이를 뚫고 피어나는 매화를 쥐어보며, 항아리에 고인 물을 쪼아 먹는 이름 모를 새와 매일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바다를 바라보며 뭇 생명의 존재 방식을 배우면 된다고. 봄에서 겨울까지 순환하는 계절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마음자리를 돌아보는 일을, 자연과 생명 그리고 존재와 존재 사이의 눈부신 관계를 구석구석 헤아리면 된다고.

 

저자 :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 국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시 해설집으로 『포옹』,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 『우리 가슴에 꽃핀 세계의 명시 1』, 산문집으로 『느림보 마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가 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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