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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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냉정과 열정사이』 이후 꽤 읽었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편이라 에쿠니 가오리의 섬세한 문체와 잔잔한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에쿠니 가오리는 소설가다. 그러나 많은 소설가가 그렇듯이 에세이도 가끔 내기 때문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 찾아서 읽었다. 이 책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는 등장하는 인물들로 비춰볼 때 저자의 학창 시절의 감성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이 소설집은 지난 2005년 출간되었다. 번역은 그때 맡았던 김난주 번역가가 그간 감정의 변화를 조금 손을 보아 뒷부분에 「역자 후기」에 적어 역자로서의 감회를 실었다. 독자로서는 역자의 소감이 소설의 깊이를 더해 준다.

저자는 이 소설집에서 열일곱 살 여고생들의 감정을 섬세하고 독특한 시선으로 그려 냈다. 여섯 가지 단편에는 학생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담겼다. 길이는 단편소설의 보통 길이만큼의 작품도 있고, 콩트보다 짧은 것도 있다. 각 작품 모두 섬세한 저자의 감성이 묻어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의미를 규정할 수 없는 순간들과 소소한 경험들 속에서 자라나는 열일곱 살의 성장통을, 특유의 일상적이면서도 세련된 화법으로 들려준다. 여고 시절 마치 삶의 전부인 것처럼 덜 자란 육체와 정신을 짓누르던 것들, 지금 돌아보면 치기 어린 열정 같은 감정들이다. 일상적이면서도 개인에게는 특별한 사연들을 가진 열일곱 살 학생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때로는 무덤덤하게 그려 낸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기억에서 사라질 현재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다. 저마다의 특색을 지닌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매장에서 간식을 사 먹고, 수업 시간에는 쪽지를 돌리기도 하는 학교생활.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있으면 똑같아 보이고, 즐거워 보이지만 각각 자기만의 아프고 특별한 사연을 갖고 있다. 10대의 터널을 지나 20대를 통과하고 30대, 40대가 되면서 쌓이는 더 큰 경험들에 파묻힌 10대의 추억. 기억에서 점점 희미해져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그러한 경험. 풋풋하면서도 아팠던 기억들에 관한 이야기가 독자들의 성장기를 떠올려 줄 것이다. 성장기를 지나 한 뼘 자란 어른의 시선에서는 낯설고 멋쩍기만 하다.

그 낯선 기억 속에서 독자들은 비로소 차가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저자 자신이, 또는 독자들이 지나왔던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십대들이 성장기란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기억에서 사라져 갈 현재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현재도 언젠가는 기억에서 희미해져 사라져 갈 것이라는 진실은 현재의 삶의 버거운 무게를 조금 가볍게도 하고, 명멸하는 불빛처럼 사라져 갈 것들에 대한 회한으로 조금 쓸쓸하게도 한다. 이 단편집은 여자 치한을 만나지만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해 불감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손가락」, 정신에 금이 간 단짝 친구 때문에 슬퍼하는 기억을 담은 「초록 고양이」, 비만인 몸에 대해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몰래 일기에 독약을 처방하는 「사탕일기」 등이 있다.

각 단편들이 독립된 이야기에 등장인물이 중간중간 겹쳐나오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이다. 이 6편의 단편은 여고생 시절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저자는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시절을 소중한 시절이었다는 점을 넌지시 알려준다. 독자 역시 육체적으로는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정신은 다 성숙하지 못한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고등학생 시절을 지금 돌이켜보면 현재의 나와는 다른 행동을 하고 마음을 가졌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은 당시 친구의 회상을 통해 재발견하곤 한다.

 


 

저자가 전하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 다른, 독특한 기억을 갖고 있다. 한번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자신이 불감증이라 생각하는 기코쿠,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고 엉뚱한 곳에서 멈춰버려 세상으로부터 단절을 고하는 에미, 그리고 그런 에미를 절대적인 친구로 여기는 모에코. 엄마와는 친구처럼 가까운 관계지만 남자친구에게서 새로운 감정을 발견하고 비밀이 생기기 시작하는 유즈. 비만 때문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고, 날마다 '사탕 일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독약 처방을 내리는 카나. 결혼하지 않은 이모와의 관계에서 성숙함과 어리숙함이 공존함을 배워가는 유코. 섹시한 피부와 앳된 얼굴로 남자를 혼란케 하는 미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기억은 독특하면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과 경험이다.

「초록고양이」에 등장하는 에미는 신경이 예민하다. 같은 반의 여자아이들도 눈치채고 에미와 주인공 모에 주위에 선을 그었다. 에미는 반에서 외톨이였다. 모두들 에미를 피했고, 에미가 손을 댄 것은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에미의 책상과 교과서에 저질스런 낙서를 갈겨 놓기도 했다. ‘노이로제’니 ‘비정상’이니, ‘세균’이라고. 사실 이런 일은 학교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에미는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고 마침내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사탕일기」에 등장하는 카나는 날씬한 남동생과 체형이 다르다. 의자에 앉을 때도 엉덩이가 끼어 불편할 때가 더러 있다. 아르바이트 가게의 아줌마는 카나가 성격도 명랑하고 일도 잘하니까, 결혼하면 잘 살 거라는 칭찬을 건넨다. 단골손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아줌마와 단골손님에게 검정 사탕을 잔뜩 선사한다.

사탕은 독약. 지금은 그저 수첩에다 달아 놓은 뿐이지만.

파란 사탕은 가벼운 독, 가벼운 벌을 주기 위한 것이니까 아마도 미미한 두통과 구역질 정도. 검정 사탕은 독한 독, 죽음에 이르는 독이다. 지금까지 사탕일기를 쓰면서 몇 명이나 독살했는지 모른다. 한 명을 몇 번이나 죽인 적도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p.159)

 


 

저자 :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

1964년 도쿄에서 태어난 에쿠니 가오리는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는 작가이다. 1989년 『409 래드클리프』로 페미나상을 수상했고, 동화부터 소설, 에세이까지 폭넓은 집필 활동을 해 나가면서 참신한 감각과 세련미를 겸비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으로 무라사키시키부 문학상(1992), 『나의 작은 새』로 로보노이시 문학상(1999), 『울 준비는 되어 있다』로 나오키상(2003), 『잡동사니』로 시마세 연애문학상(2007), 『한낮인데 어두운 방』으로 중앙공론문예상(2010)을 받았다. 일본 문학 최고의 감성 작가로 불리는 그녀는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도쿄 타워』,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좌안 1·2』, 『달콤한 작은 거짓말』, 『소란한 보통날』, 『부드러운 양상추』, 『수박 향기』, 『하느님의 보트』, 『우는 어른』, 『울지 않는 아이』, 『등 뒤의 기억』,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벌거숭이들』, 『저물 듯 저물지 않는』, 『개와 하모니카』, 『별사탕 내리는 밤』 등으로 한국의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역자 : 김난주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7년 쇼와 여자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오오쓰마 여자대학과 도쿄 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했다. 현재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반짝반짝 빛나는』, 『낙하하는 저녁』, 『홀리 가든』, 『좌안 1·2』, 『제비꽃 설탕 절임』, 『소란한 보통날』, 『부드러운 양상추』, 『수박 향기』, 『하느님의 보트』, 『우는 어른』, 『울지 않는 아이』, 『등 뒤의 기억』,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저물 듯 저물지 않는』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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