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시 서사시 - 인류 최초의 신화 현대지성 클래식 40
앤드류 조지 엮음, 공경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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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지금껏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로 알고 있었다. 저자는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시인이라고 알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 그렇게 배웠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때도 그렇게 알고 읽었다. 그런데 최근 영화 〈이터널스〉가 개봉된다고 해서 관련 기사를 읽다가 우연히 이 책의 제목인 길가메시란 영웅담의 주인공을 알게 됐다. 여러 경로를 확인해 인류 최초의 신화이고, 서사시는 '길가메시'임을 확인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폭군에 불과했던 한 인간이 고대에 지혜자요 신(神)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모험과 실패, 성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이자 영웅 신화임을 알게 된 것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서사시 원문의 초기 번역서를 접한 후 환희와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정말 굉장해요!”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4,000 년 동안 잠자고 있었던 고대의 마법이 풀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무척 귀한 책으로 세계 어느 누가 갖고 있는 서사시 텍스트로 삼을 만한 책 한 권 갖고 있다는 자긍심을 갖게 해준다. 두고 두고 읽고 읽으면서 수많은 문학적 영감을 받을 있다는 생각에 꼭 한 권씩 독자들의 보관용 책으로 강력 추천한다. 한편 〈이터널스〉는 2021년 공개된 미국의 슈퍼히어로 영화이다. 클로이 자오가 감독을 맡았으며, 잭 커비의 동명 만화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26번째 개봉 작품이라고 한다.



책에 따르면 인생의 본질과 성장에 관한 인류의 고민은 그때나 지금이나 흡사했다. 이 서사시에는 영생을 향한 인간의 열망, 죽음을 앞둔 자의 고뇌와 분투, 인간의 한계를 경험한 후 들어선 깨달음의 길 등, 인문적인 사유가 박진감 넘치는 모험 이야기와 절묘하게 버무려진다. 인류 역사 초기에 신들이 인류를 멸하려고 일으킨 대홍수 이야기와 망자들의 음울한 세계에 대한 묘사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길가메시는 세상 끝에서 대홍수의 생존자 우타나피쉬티에게서 얻은 지혜 덕분에 나라의 사원들과 홍수 이전의 이상적인 제례들을 복원한다. 그는 고대인들이 기록한 군왕 명부에도 있으므로, 아서 왕처럼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편역자 앤드류 조지는 이 책에서 아카드어 바빌로니아 표준판본 및 수메르어 시들을 집대성하여 거의 모든 연구를 한 권에 담아 가장 완벽한 형태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수메르어와 아카드어 원어를 문자적 번역에 기초해 영어로 한 줄 한 줄 번역하고, 그 번역어 순서까지 신경 썼다. 설형문자 원판의 훼손된 부분을 과도한 해석과 윤색이 담긴 글로 채우기보다는 그대로 두어 독자가 원판을 직접 보는 감동을 전하려고 애썼다. 한글판 옮긴이 역시 운문(韻文)으로 구성된 원글의 취지를 존중하여 되도록 원서의 어순을 따라 번역했다.




우리 독자들은 두 번의 번역을 거쳐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는 셈이다. 그러나 현대지성 클래식에서 출간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연구자 수십 명의 최신 연구 결과와 새로 알려진 점토판 해석 의견을 꼼꼼히 반영했으며, 신화·종교·지혜의 맥락에서 본 서사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학적 배경, 지금도 적용되는 인문학적 의의 등의 내용이 포함된 50여 쪽에 이르는 상세한 해제까지 담아 “독자가 접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번역본”으로 자신 있게 선보였다고 밝혀 뒤늦게 읽지만 제대로 된 책을 읽는 느낌이어서 설레기까지 한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해제」를 통해 한 마디로 망나니요 폭군에 불과했던 길가메시가 여러 과정을 거쳐 지혜자요, 신들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성장한 이야기임을 독자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한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던 길가메시는 난생처음 자신과 필적할 상대 엔키두를 만나 사투를 벌인다. 결국, 길가메시가 승리하지만 엔키두의 존재는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따분하기 그지없었던 인생에 도전할 만한 목표가 생긴 것이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던 괴물 훔바바를 엔키두와 함께 물리치러 먼 길을 떠난다. 그리고 훔바바를 해치운 일로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영혼의 친구 엔키두를 잃게 되고, 이로써 길가메시는 영생의 길에 눈을 뜬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작품 전체를 흐르는 기본 주제이지만, 서사시는 그 이상을 다룬다. 영생을 향한 인간의 열망을 살피면서, 시는 한 인간의 죽음에 맞선 영웅적인 분투, 거대한 실패에 직면한 인간의 절망, 업적을 남겨 영원한 명성을 얻는 깨달음의 길을 웅장한 서사시에 녹여낸다. 영생을 향해 그토록 발버둥쳤지만, 결국 허무하게 빼앗겨버린 과정을 보여주면서 서사시는 인간이 처한 진실을 깨닫게 한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길가메시가 경험했던 파란만장했던 서사는 히브리 성경에 등장하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 평생의 경험을 거친 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한 “전도서”의 주제와 무척 흡사하다는 것이 해제에서의 설명이다. 인생의 목적 없이 헛돌던 길가메시가 영혼의 친구(soul mate)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변화되는 과정, 거기서 맞닥뜨린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 인간 한계 너머 새로운 열망을 품게 된 길가메시, 다른 세상(저승)에서의 모험 등이 박진감 넘치게 이어진다. 다만 독자의 고대 서사시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못해 제대로 마음에 녹여 담지는 못했지만 해제를 통하고, 한 번 쑥 훑어봄으로써 커다란 만족을 느꼈다. 제대로 된 인류 최초의 서사시 번역본을 한 번 읽었다는 만족감이다. 거기에 더해 인류 역사 초기에 신들이 인류를 멸하려고 일으킨 대홍수 이야기와 망자들의 음울한 세계에 대한 묘사도 예술적이어서(이해에 어려움이 있지만) 일이아스나 오디세이아 못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발생 배경에 대한 특별한 지식 없이도 읽고 즐길 수 있는, 흔치 않은 바빌로니아 문학 작품이다. 등장인물 이름이 낯설고 장소가 기묘하지만, 서사시가 다루는 주제 중에는 평범한 인생 경험도 있어 주인공의 포부와 슬픔, 절망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등장인물이나 장소나 시에 등장하는 생소한 단어들을 일일이 책의 뒷부분에 별도로 정리해 놓아 책을 읽다 막힐 때마다 펼쳐보고 확인한 후 읽어가는 바람에 다소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두고 두고 읽을 책이니 정독을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길가메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던 심연은 무엇이었을까? 망나니 왕에 불과했던 그가 신들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경험했던 심경의 변화를 보면서 인류 최초의 서사시에 담긴 지혜의 길을 찾아내는 재미에 가슴까지 설렌다.

책에 따르면 고대 메소포타미아 학자인 소르킬드 야콥슨은 이 서사시를 “현실에 맞서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 성장에 관한 이야기”라고 정리했다. 길가메시는 미숙하고 어리석은 젊은이로 시작하지만, 결국 죽음의 힘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철든 성숙에 이른다. 영웅의 자취를 기록하면서 시인은 젊음과 늙음, 승리와 절망, 인간과 신, 삶과 죽음을 심오하게 반추한다. 길가메시의 영광스러운 행위뿐 아니라 가망 없는 탐구를 지속하게 하는 고통과 고생에도 주목한다. 이 영원불멸의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택스트로 삼아도 될 만큼 충분한 서사가 들어 있고, 스케일과 내용의 완성도에 있어서도 문학의 원형으로 받아들일 만하다는 점을 느낀 독자로서는 문학을 대하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됨을 굉장한 자긍심도 갖게 되었다.



다만 이 책의 원본인 점토판이 글자가 희미하거나 없어지는 바람에 완전 해독과 완성된 서사시를 읽을 수는 없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수많은 해독과 번역을 거치면서 완성도가 가장 높은 책이 이 책 『길가메시 서사시』임을 부인할 수 없다. 가장 최근에 가장 권위 있는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편역자인 앤드류 조지는 바빌로니아 전공 교수로서, 1983년부터 지금까지 런던대학교 산하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칼리지에서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006년 영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2011년에 ‘아메리카 오리엔탈 소사이어티’(AMERICAN ORIENTAL SOCIETY)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길가메시 설형문자 해독 및 조사를 위해 여러 차례 이라크를 방문, 바빌론을 비롯한 고대 지역을 탐사했다. 현재도 바그다드, 유럽, 북아메리카 박물관을 꾸준히 방문해 고대 이라크의 필경사들이 쓴 원(原) 점토판들을 연구하고 있는 길가메시 및 당시의 언어, 문화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라는 점이 이 책의 완전 해독과 번역 가치를 한층 높여준다.

저자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서사시 관련 설형문자 조각은 익명의 바빌로니아 시인이 지금으로부터 3700년 전에 쓴 것으로 주장한다. 바빌로니아 버전은 아카드어로 지어졌지만, 그 문학적 기원은 훨씬 오래전에 쓰인 수메르어 시 다섯 편에서 기인한다고 연구 결과 밝혀냈다(이 책의 2부에서 세계 최초로 소개했다). 수메르어 텍스트들은 기원전 21세기에 통치했던 갈대아 우르의 슐기왕을 위한 궁정 오락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4000년 이상 긴 잠을 자던 『길가메시 서사시』가 전 세계에 그 얼굴을 드러낸 것은 길게 보더라도 150년 남짓이다. 쐐기문자를 해독하는 길이 열리면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현재 이라크 지역 근방)에 광범위하게 흩어진 점토판 하나하나를 수백 명의 학자가 연구하면서 한 줄 한 줄 새로운 사실이 빛을 보고 있다. 고대 언어를 다루는 분야는 한 명의 천재성보다는 수많은 학자의 성실함과 전문성이 상호 보완하고 크로스 체크하며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가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서로 다른 서너 시기에 서너 개 언어로, 점토판의 형태로 현재도 활발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 책은 다양한 원전 텍스트를 구분했고, 총 4부로 서사시의 다양성을 충분히 소개하면서, 학계 최신 연구 성과도 반영했다. 1부 원 텍스트는 기원전 10세기에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표준어였던 아카드어로 되어 있고, 몇 군데의 공백(점토판의 훼손된 부분)은 더 오래된 자료를 참조하여 채워졌다. 이 책은 이 텍스트를 표준본으로 삼는다. 표준 판본은 현존하는 총 73매의 필사본으로 정리된 상황이다. 2부는 수메르어 시 다섯 편으로, 앤드류 조지는 이 책에서 세계 최초로 수메르어로 된 서사시 5편을 모두 영어로 번역해 한곳에 모아 출간했다. 1부와는 달리, 공통된 주제가 없는 개별적인 이야기로 구성된다. 기원전 18세기에 바빌로니아 필경 견습생들이 만든 필사본으로 알려졌다. 3부는 아카드어로 이루어져 있고, 1부보다 더 오래된 자료의 번역본이다. 4부는 3부에 없는 기원전 20세기의 아카드어 파편들이 실렸고, 고대 서쪽 지역(레반트와 아나톨리아)에서 나온 여러 개의 시 조각들이 포함되어 있다.



역자 : 앤드류 조지 (편역)(ANDREW GEORGE, 1955~ )

1955년 영국 서리의 해슬미어에서 태어났다. 버밍엄 대학교에서 아시리아학을 공부한 후, 1983년부터 런던 대학교 산하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칼리지에서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현재 이 대학교의 바빌로니아 전공 교수다. 2006년 영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2011년에 ‘아메리카 오리엔탈 소사이어티’(AMERICAN ORIENTAL SOCIETY)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길가메시 설형문자 해독 및 조사를 위해 여러 차례 이라크를 방문, 바빌론을 비롯한 고대 지역을 탐사했다. 현재도 바그다드, 유럽, 북아메리카 박물관을 꾸준히 방문해 고대 이라크의 필경사들이 쓴 원(原) 점토판들을 연구하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심연을 본 사람〉으로 불리는 판본이 가장 유명한데(이 책의 1부에 있다), 기원전 10세기에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에서 널리 읽혔다. 연구자들은 이 작품이 씬-리크-운니니(기원전 1200?~1000?, S?N-LEQI-UNNINNI)라는 우루크 학자가 수많은 관련 판본을 모아 편집한 결과물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심연을 본 사람〉은 하나 이상의 이전 판본을 개작한 웅대한 편집본이다.

역자 : 공경희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서울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대학원에서 강의했다. 소설, 비소설, 아동서까지 다양한 장르의 좋은 책들을 번역하며 현재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역서로는 『시간의 모래밭』,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파이 이야기』, 『우리는 사랑일까』, 『마시멜로 이야기』, 『타샤의 정원』, 『비밀의 화원』 등이 있으며, 에세이 『아직도 거기, 머물다』를 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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