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살아있다 - 찾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시인의 모든 것
민윤기 지음 / 스타북스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 『윤동주 살아있다』는 2017년 ‘윤동주탄생100주년문화예술제’를 하면서부터 기획돼 4년 여에 걸쳐 발간됐다. 내년 윤동주 순절 77주년을 맞이하여, 이제까지 발표된 국내외 윤동주 관련 자료와 새로 취재해 찾아낸 놀라운 사실들을 이 한 권에 수록했다. 영원한 대한민국 청년시인 ‘윤동주 시정신’을 지키고 기리기 위해 그동안의 기록과 폐간되어 없어진 국내외의 신문 잡지를 찾아 자료를 모아서 정리하고 번역했다. 따라서 윤동주의 탄생부터 서거까지를 망라한 책으로 영원한 청년 시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그의 친구, 스승, 가족과 함께 사후 윤동주를 연구하고 사랑한 사람들의 글을 통해 그의 한글 사랑과 독립에 대한 염원과 시를 쓰는 절절한 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인의 ‘시 정신’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최근 중국에서, 일본에서 생뚱맞은 근거를 내세워 윤동주를 자기들의 시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만큼 윤동주 시인이 탐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 윤동주가 사랑했던 조국과 별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보관돼 있다. 이 별은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서 영원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오늘도 윤동주의 시를 외며 하늘의 별을 센다.



이 책의 책임 편집자인 민윤기는 「엮은이가 독자에게」를 통해 "우리나라는 윤동주 보유국입니다. 일본도 윤동주 시인을 탐하고 중국도 윤동주 시인을 욕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윤동주를 지키고 기려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에게 ‘하늘’이고 ‘바람’이며 ‘별’이고 ‘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청년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었고, 시인들에게는 왜, 어떻게 시를 써야 하는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2017년 ‘윤동주 100년의 해’ 선포식을 가진 후부터 저는 윤동주 시인의 혼적이 남아 있는 많은 현장을 탐사하면서 윤동주 시인의 유혼(幽魂)과 만났습니다. 이를 통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윤동주 관련 유의미한 자료 수집은 물론 아직 규명되지 않은 윤동주 죽음의 미스터리를 취재하여 그 결과물들을 이 책에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윤동주를 ‘발견하고’ ‘지키고’ ‘기리는’ 일의 시작일 뿐이어서, 누군가 더 능력 있는 분들이 더 ‘깊이’ ‘정확하게’ 계속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2022년 윤동주 시인 순절 77주년에 맞춰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펴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라고 썼다.



637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5개 부로 나누어 구성됐다. 윤동주의 생애, 시, 형무소에서의 증언, 판결문 등 관련 자료 및 증언 등을 가급적 최대한의 자료를 발굴 게재했고 가려지거나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평론도 빼놓지 않고 실어 〈윤동주 평전〉으로 제작했다. 특히 이 책에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 10가지를 처음 공개해 윤동주를 한국 시사에 영원히 남아 있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1 윤동주 시신을 화장한 화장터는 후쿠오카 히바루 장제장이다

2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서시」라는 제목이 없다

3 왜, 어떻게 고향에서 윤동주 가족은 재산도 빼앗기고 쫓겨났을까?

4 ’윤동주는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중국 동북공정의 음모

5 이떻게 일본 국어교과서에 윤동주 시가 실리게 되었을까?

6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를 어떻게 참혹하게 죽어갔을까?

7 신사참배 반대운동 앞장서다 숭실중학을 자퇴한 윤동주의 용기

8 윤동주와 교유한 일본시인을 최초로 공개한다

9 윤동주는 창씨개명하지 않았다

10 윤동주에게는 시인 막내동생이 있었다



시인 이근배(대한민국 예술원 회장)는 '동주 별 은하로 뜨다'라는 「머리말」을 통해 "내가 세 번째로 윤동주 묘소를 찾은 것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였다. 시비(詩碑)는 옛모습 그대로인데, 콘크리트로 봉분 둘레를 새로 단장해 놓았고, 옆에 “윤동주(1917-1945)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다”로 시작되는 문구를 새긴 표지석도 세워놓았다.

“애국시인이라니!”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조국 한국을 사랑했고 한글로 시를 썼고 한국을 사랑한 까닭으로 스물여덟에 목숨을 잃었는데, 언제 어떻게 중국을 사랑했다는 것인가. 더욱 가슴을 치게 하는 것은 생가를 복원해놓고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고거(故居)”라고 크게 푯말을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민족시인이자 애국시인인 윤동주가 중국의 애국시인으로 못 박히는 것을 동주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아니 용정에 있는 한인교회 공동묘지의 산소를 옮겨 올 수 없다면 서울에 ‘윤동주 시공원’을 하루라도 빨리 조성해서 가묘(假墓)라도 만들어놓고 높이 시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을 앞세우고 돌아왔다.

내가 태어나기 스물두 해 전 만주국 간도성 용정가 231동 36호에서 태어나,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눈감은 동주의 시를 공부할 때도, 문단에 발을 내딛고서도 이름만 알고 몇 편의 시만 어찌하여 어렵게 찾아갔던 것인지, 그리고 오늘 그 날짜를 당도하여 나는 왜 나도 모르게 동주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인지? 옷깃을 여미고 육필 시고를 다시 읽고 유고시집 책장을 다시 넘긴다. 동주여! 먼 은하의 별들로 두 쪽 난 그대 조국의 하늘과 땅에 눈부신 광채를 뿌려 주는 아이배(童舟)여! 오늘토록 내게 던져준 이 아프고 질긴 닻줄을 거두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돛폭을 올리고 모국어의 더 너른 바다로 저어가라. 여기 『윤동주 살아있다』에 바쳐지는 헌사(獻辭)처럼 영원토록, 영원토록!"이라는 헌사를 바쳤다.



"오똑하게 쪽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윤동주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다고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천성으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태어났다.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태산처럼 요동하지 않는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몹시 단정하고 결백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도 없었고, CCC라는 글자가 새겨진 교복의 단추를 모로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양복바지의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었다."고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시절의 윤동주에 대해 정병욱(연희전문 동창)은 기억했다.

"윤동주는 교실과 서재와는 구별이 없는 친구다. 달변과 교수 기술과 박학으로 명강의를 하는 정인섭 선생님에게는 누구나가 매혹되는데, 학기 말 시험에 엉뚱하게도 작문 제목을 하나 내놓고 그 자리에서 쓰라는 것이다. 밤새워 해 온 문학개론의 광범위한 준비가 다 수포로 돌아갔다. 억지춘향으로 모두 창작 기술을 발휘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 역시 진땀을 빼며 써냈더니 점수가 과히 나쁘지 않아 천만 다행이라고 안심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동주는 바로 그 제목의 그 글을 깨끗이 옮겨서 신문 학생란에 발표하였다. 제목은 「달을 쏘다」라는 것이다."고 연희 전문 시절의 벗 유영은 회고했다.


지난 날(1942년) 나는 ‘말레이 작전’에 종군, 부상을 당하고 구사일생 끝에 살아나 군마현 누마다 육군병원에 있었다. 그런데 8월 말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나타났다. 환자옷 차림의 나를 보더니 그는 연민스런 미소로 나를 껴안아 주었다. 그는 9월부터 교토의 대학에서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단정한 그의 모습은 어딘지 스산해 보였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둔한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전우인 조선 출신 고(高) 중위의 동생이 맡겨놓은, 새로 출간된 일본 시집을 집어 들었다. “동주야, 네가 좋다면 그 시집을 선물할게.” 이윽고 나는 아카기산(赤城山)이 바라보이는 그 병원을 떠났다. 상처가 대충 원상으로 회복되자 되찾은 시력으로, 교토를 방문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나는 조선해협을 건너 만주로 갔다. 나는 그 무렵 윤동주가 암흑의 동굴 속에 있으면서 더욱 더 한 줄기 불빛을 비추고 있는 꿈을 꾸었다.

쇼와 18년(1943년) 수도 신경 초여름의 상쾌한 관사에 있던 나에게 보내온 친구의 전문(電文)은 “동주 체포”였다. 한 순간 눈앞을 검은 장막이 뒤덮고 솟아오르는 분노로, 예전에 전차포를 우리 아군의 사령부를 향해 발사한 사고(思考)의 흐트러짐을 내 정신의 분열과 함께 느꼈다. 윤동주는 나의 뇌리에 아름답고 선명하게 불꽃처럼 사라졌다 나타나곤 했다. ‘치안 유지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윽고 윤동주는 조국의 해방을 눈앞에 두고 옥중사(獄中死)했다. 당시 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우에모토 마사오가 윤동주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편저자 : 민윤기

시인, 문화비평가, 저널리스트. 1966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한 후 55년째 현역시인으로 시를 쓰고 있다. 초기에는 「전봉준」 「김시습」 「만적」 같은 주제의 시를 잇달아 발표해 ‘역사주의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베트남전쟁 종군 연작시 「내가 가담하지 않은 전쟁」과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시집 『유민』(1974)을 출간할 무렵에는 주로 ‘창작과비평’ ‘심상’ ‘상황’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다가 1970년 이후 군사정권 독재정치 시대 상황으로 변하자 ‘시는 쓰되 발표하지 않는’ 절필 상태로 20여 년간 여성지 편집장과 일간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2011년 오세훈 시장 시절 수도권 지하철 시 관리용역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시의 대중화 운동’을 펼치기 위한 시인시민단체 ‘서울시인협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시집 『시는 시다』 『꿈에서 삶으로』 『서서, 울고 싶은 날이 많다』 『사랑하자』 『홍콩』 등이 있고, 엮은 시집에 『박인환 전시집』 『노천명 전시집』 등과 문화비평서 『그래도 20세기는 좋았다』 『일본이 앞에서 뛰고 있다』 『소파 방정환 평전』 등이 있다. 현재 서울시인협회 회장, 시전문지 ‘월간시’ 편집인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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