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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평점 :
이 책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는 아르헨티나의 여류 소설가 마리아나 엔리케스가 쓴 단편소설집이다. 모두 12편의 단편이 실렸다. 독자는 마리아나 엔리케스란 작가를 잘 모르고 있었다. 공포 소설을 실은 단편집이라고 해서 에드거 엘런 포를 상상하며 관심을 갖고 선택한 책이다. 저자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2021년 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21세기 에드거 엘런 포, 셜리 잭슨ㆍ보르헤스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국내에 알려졌다. 이미 우리 독자들에게는 지난해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번역 출간되며 선보였다고 한다. 악몽보다 섬뜩한 현실의 초상, 남미 전통 미신과 주술 의식, 부조리한 세계가 공존하는 호러 소설집으로 엔리케스의 이름을 세계 문학계에 각인시킨 대표작이다.
대체불가능한 독보적 스타일의 소유자인 엔리케스는 『침대에서~』를 통해 정치적, 역사적, 실존적 차원이 뒤섞인 공포와 두려움을 독특한 메타포로 구성하고 평온해 보이는 우리의 삶을 불확실성이라는 극단으로 끌고 가는 작품을 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서는 현대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고통과 두려움, 교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불러와 '고딕' 스릴러 특유의 차갑고 끈적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국적이면서도 섬뜩한 거리 묘사와 그곳을 배회하는 유령들을 덤덤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활자 위에 살려내 부조리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공포’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 엔리케스는 책 뒷부분 「한국어판 저자 후기」를 통해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내가 처음 쓴 공포 소설"이라며 "그 전에도 두 편의 장편소설을 출판했는데, 그 작품들 또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만, 예전부터 가장 쓰고 싶었던 것은 공포 소설이었다"고 이 단편집에 특별한 애정을 표하고 있다. 공포 소설에 대해 저자는 넓은 범주라서 호러와 환상, 다크 픽션과 네오고딕 등 많은 명칭을 갖고 있지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감수성과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 같았다고 출판 소감을 밝혔다.
이 소설들에 대해 2017년 셜리잭슨상을 수상한 소설가 편혜영은 “타는 냄새도 없고 불에 덴 자국과 잿더미도 남지 않는 아름다운 불길, 세계를 그은 자리에 출몰하는 기이한 존재들, 그들이 저지른 방화는 실로 고독하고 환상적”이라고 평했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이소호는 “이 책은 독자를 ‘읽는’ 자가 아닌 ‘몰래 듣는’ 자로 만든다”며 “이보다 더 생활과 판타지 사이에 불행을 밀착시켜 놓은 글은 본 적이 없음”을 강조했다.
책에 따르면 엔리케스의 작품 세계는 주로 공포와 두려움, 집착과 광기, 폭력과 죽음, 그리고 주술과 저주 등 어둠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과거 고딕소설의 전통을 계승한 것처럼 을씨년스럽고 기괴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텍스트의 속살을 파고들다 보면 그와는 다른, 조금 더 깊은 세계가 열린다. 「슬픔에 젖은 람블라 거리」는 유명 관광 도시를 배경으로 국가 권력에 짓눌려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이민자, 육체노동자, 성노동자, 소매치기의 영혼들이 등장하고 「죽은 자와 이야기하던 때」에서는 10대 소녀들이 위저보드를 통해 과거 활동가, 정치가들의 행적을 좇는다. 우리의 4.19, 광주의 실종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이야기는 작가 본인이 어린 시절 직접 겪은 독재정권 시절의 불안감, 철저하게 가려져 있던 공포를 직접 끌어내 녹였다고 한다. 공포 소설을 통해 독재 정치와 국민에 대한 탄업, 부정부패로 몰락해가는 조국 아르헨티나의 모습을 비판적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건 마치……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일종의 망상이라는 거야. 아무튼 가끔 그 미치광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도시의 광기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것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도시의 안전판과 같은 존재인 셈이지.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서로 물어뜯어 죽이거나 스트레스로 죽었을 거야."
- 「슬픔에 젖은 람블라 거리」 중에서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쓴 단편은 「우물」이라고 밝힌 저자는 저주를 받아 심각한 정신 질환에 걸린 어느 젊은 여성의 이야기이며 전통적인 고딕 소설의 두 가지 주제(저주와 정신병)를 모두 다루고 있지만, 이 작품의 무대는 아르헨티나 북부 지방인데다 그곳 특유의 전설과 민간 신앙 성인들, 그리고 "여자 주술사들"-꼭 마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보인다-도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을 괴롭히는 병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황 발작 증세, 즉 광장 공포증이다. 저자가 쓰고 싶은 다크 픽션은 이 작품에 드러나 있듯이 지역 특유의 분위기와 삶의 요소들, 그리고 전통적인 무대와 지형 등을 작품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맨 앞에 나오는 「땅에서 파낸 앙헬리아」도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아직도 내륙 지방의 마을에서 간간이 찾아볼 수 있는 전통적인 풍습, 특히 아기가 죽으면 천국의 일원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수의' 대신 등에 날개를 붙여서 장례를 치르는 관습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이 작품은 블랙 유머가 약간(혹은 아주 많이) 가미된 유령 이야기다. 반면 「쇼핑 카트」에서는 스티븐 킹에게서 빌린 아이디어를 기초로 다시 저주의 모티프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 사람들에게 닥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가난이다. 라틴아메리카처럼 불평등한 사회에서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를 괴룰로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이들(타자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사람들에게 가장 끔찍한 악몽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사회-정치적인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공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저자가 쓰고자 하는 다크 픽션의 주요한 구성 요소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말이 이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 두가 요소는 서로 공존할 수 있고, 또 공존해야 한다."
다른 작품들은 젊은 여성들과 그들의 트라우마-그리고 그들의 적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호숫가의 성모상」은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까운데, 성에 대한 관심과 억제할 수 없는 욕망으로 인해 상처받기 쉬울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10대 여자아이들을 다룬 작품이다. 「전망대」는 자해를 하면서 여자 유령과 함께 지내는 어느 여성의 고통을 그리기 위해 실제 장소, 즉 대서양에 면해 있는 아르헨티나 해안의 낡은 호텔을 무대로 삼았다. (여기서 인물들의 역할은 수시로 바뀐다.이 단편은 20세기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인 홀리오 코르타샤르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슬픔에 젖은 람블라 거리」의 이야기는 바르셀로나에서 전개된다. 위기에 빠진 여성들과 도시 건설에 1990년대 아르헨티나의 경제 위기로 인해 바르셀로나로 이민을 떠난 이들의 서글픈 이야기가 더해지고 있다. 「생일, 영세식 사절」은 악마나 유령에 홀린 현상과 정신병 사이를 오가고 있지만,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음험하고 도착적인 것에 이끌리는 퇴폐적인 성향과 관음증을 다룬 작품이다. 「카르네」는 10대의 팬덤 현상과 카니발리즘에 관한 이야기이고 「심장이여, 그대는 어디 있는가」는 페티시즘과 인터넷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두 작품에서는 다크 픽션에서 흔히 '바디 호러'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잘 드러나 있지만 지역 특유의 풍습과 분위기는 세부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저자의 삶과 아르헨티나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가 죽은 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때」에서 다시 등장한다. 10대 여자아이들ㄷ이 이 작품의 주인공이지만, 그들은 위저 보드게임을 하면서 1976~1983년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정치 운동가/활동가(와 무고한 민간인들)의 영혼을 불러내 이야기글 ㄹ나누려고 한다. 당시 유년기였던 저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이 사건은 저자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된다. 사회 전반에 걸쳐 비밀리에 자행되던 폭력 때문이라기보다, 저자의 어린 시절을 공포와 불안감으로 몰아놓은 주요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라 전체를 뒤덮고 있던 공포, 집 안 구석구석에 감돌던 불안감, 하지만 철저하게 가려져 있던 공포, 군사 독재 체제가 무너지면서 정권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행위들이 만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에 출간된 모든 서적과 간행물, 그리고 앞다투어 모든 범죄를 상세하게 밝혀낸 대중 매체 모두 저자가 작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지금도 그때 읽은 책들이야말로 태어나서 처음 접한 공포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저자는 어떠한 제약도, 연민도 없는 권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저자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깊숙이 박힌다. "공포 소설은 저주받은 집과 같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 이상, 발길을 되돌릴 수는 없다. 우리 모두 과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문턱을 넘어가야 한다."
저자 : 마리아나 엔리케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1973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라플라타국립대학에서 언론학과 사회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한 그는 현재 아르헨티나 일간지 [파히나/12]의 문화 및 예술 섹션 부편집장으로 일하며, 미국 [뉴요커] 등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고 있다. 어릴 적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라누스에서 할머니에게 전설과 주술, 그리고 북부 지방의 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유년시절을 보낸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가족과 함께 라플라타시로 이주한 이후 문학과 펑크 문화를 접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었다. 고전문학과 대중문화라는 대립적인 두 요소는 후일 엔리케스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하는 밑거름이 된다. 엔리케스는 스물한 살 나이에 첫 장편소설 『내려가는 것이 최악이다』(1995)를 발표하며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젊은 작가’로 문단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완벽하게 사라지는 방법』(2004)에서 그동안 아르헨티나 문학이 외면해온 가정 내 성폭력, 아동 및 여성 학대 등의 문제를 다루었고, 『우리 몫의 밤』(2019)으로 그해 에랄데상을 수상했다.
세계 문단에서 엔리케스에게 주목한 것은 첫 소설집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면 위험한 것들』(2009)이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이 책은 고전 공포소설의 규범을 충실히 따르되 현대적인 목소리로 재창조된 이야기로 꼽히는데, 이어 소개된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2016)은 여기서 더 나아가 현대 아르헨티나 사회 이면에 도사린 어둠이자, 세계인이 공감하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공포로 풍자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 밖의 논픽션으로 독특한 무덤 여행기 『누군가 네 무덤 위를 걷고 있다』(2013), 실비나 오캄포 전기 『여동생』(2014) 등이 있다. 엔리케스는 공포와 환상이야말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일상의 미스터리를 반영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메타포라고 말하면서, 이 장르를 자신의 언어로 삼아 불가사의한 세계를 이야기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