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 예술과 철학의 질문들
백민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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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소설가 백민석의 '미학'적 관점으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많은 문제들에 대한 비평 차원에서 쓴 에세이를 묶었다. 한마디로 지금 세상에서 일어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사회 · 문화적 현상에 대한 비평서이다. 이 책은 저자 백민석이 세상에 던지는 예술과 철학의 질문들로 세계 곳곳의 사회, 문화적 현상에 주목해, 이와 연관된 철학 이론, 미술 작품, 도서, 영화 등을 자유롭게 연결 지어 예술에서 언어로, 언어에서 내면으로, 자유롭게 인문학적 사유의 폭을 확장해 나간다.

한 명의 소설가이자 동시대인으로서 저자가 세상을 읽는 독특한 시선을 엿볼 수 있으며, 동시에 완성된 작품을 미완의 사회상을 읽어내는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어렵게만 느껴졌던 미학을 한층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예전의 미학은 여러 학문의 상위에 있는 미(美) 그 자체의 학문을 제창한 플라톤을 대표로 하는 서양의 전통적 미학을 근간으로 한다. 이때의 미학은 초월적 가치로서의 미를 고찰한다. 미학이라는 말을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라이프니츠볼프학파(Leibniz Wolffische Schule)의 A. G. 바움가르텐이다. 그는 그때까지 이성적 인식에 비해 한 단계 낮게 평가되고 있던 감성적 인식에 독자적인 의의를 부여하여 이성적 인식의 학문인 논리학과 함께 감성적 인식의 학문도 철학의 한 부문으로 수립하고, 그것에 에스테티카(Aesthetica)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리고 미(美)란 곧 감성적 인식의 완전한 것을 의미하므로 감성적 인식의 학문은 동시에 미의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근대 미학의 방향이 개척된 것이다. 고전 미학은 어디까지나 미의 본질을 묻는 형이상학이어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초감각적 존재로서의 미의 이념을 추구했다. 이에 반해 근대 미학에서는 감성적 인식에 의하여 포착된 현상으로서의 미, 즉 ‘미적인 것(das Ästhetische)’을 대상으로 한다. 이 ‘미적인 것’은 이념으로서 추구되는 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의식에 비쳐지는 미이다. 그러므로 미적인 것을 추구하는 근대미학은 자연히 미의식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칸트는 감성적 현상으로서의 미의식의 기초를 선험적(先驗的)인 데 두었지만, 의식에 비쳐지는 단순한 현상으로서의 미적인 것을 탐구하는 방향은 당연히 경험주의와 결부된다.(두산백과)



저자 백민석은 「작가의 말」을 통해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아주 빨리 변했고 세상이 변한 만큼 예술도 변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더는 아름다운 것만을 좇지 않는다. 아름답고 추한 것의 기준도 빠르게 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추한 것의 구분을 더는 하려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저자의 미학과 미에 관점을 밝힌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각종 현상에 대한 비평을 할 때 저자 백민석의 미에 관한 관점과 책들은 텍스트로 사용할 수 있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바뀐 미학의 개념을 모두 수용하고 발전시킨 '미'에 대한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학은 필연적으로 반대 개념인 추(醜)에 대해 주목한다. 시각 문화와 예술 작품 속의 '추'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탐색한 움베르트 에코는 그의 저서 『추의 역사』를 통해 악마, 마녀, 죽음, 괴물 등을 '추'의 한 현상으로 아우르고 일종의 문화, 역사 비평을 '추'의 기호학으로 구축한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수많은 추의 이미지와 시대별로 특징적인 추의 현상들과 사회적 배경, 추에 대한 문화적 수용의 양상들까지 설명하는 텍스트들이 에코의 글과 탁월한 감식안으로 한 페이지 안에 나란히 실려있어 보다 쉽게 에코의 미학에 다가갈 수 있다. 백민석의 저서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에코의 미학과 플라톤, 바움가르텐, 아도르노의 미학을 모두 수용한 관점이라는 데 독자의 흥미를 끌어당긴다.



1995년 등단 이후 가장 낯설고 또렷한 시선과 문체로 1990년대 한국문학계의 독보적인 흐름 그 자체였던 저자는 10년의 침묵을 깨트리고 다시 돌아와 다양한 장르의 풍성한 저작을 펴내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여전히 날 선 시선으로 혼란한 현대 사회의 면면들을 짚고, 문학, 영화, 철학, 미술을 넘나들며 작가적 시선으로 난해한 현대인들의 내면을 진단한다.

"인간증발 현상의 결정적인,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사태를 단순하게 보자. 그리고 점점 일본과 닮아가는 우리를 보자. 한국의 자살률은 이미 일본을 추월했다. 사는 게, 증발하거나 죽는 것보다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해석하기 위해 호명된 여러 예술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인문학적 독서의 만족감을 선사할 것이다. 저자의 글은 우리 삶 도처에 자리한 미학을 포착하고 예술과 현실 간의 소통을 위해 기존 관련 도서들의 권위의식을 대폭 낮춘 것이 특징이다. 완성된 작품을 미완의 사회상을 읽어내는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어렵게만 느껴졌던 미학을 한층 가깝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영화 〈소공녀〉에 대한 저자의 미학적 단상(斷想)을 살펴본다. 미소(여주인공)는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월세방을 전전한다. 일은 하지만 월세가 부담돼서 기본적인 식비도 마련할 수가 없다. 친구한테 쌀을 빌리기도 하고, 자취방은 너무 냉골이라 남자친구와 잠을 자지도 못한다. 그녀의 부모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영화 안에서 드러날 만큼의 존재감이 없는 부모일 것이다. 그녀는 또 어떤 병을 앓고 있는데, 매일 약을 먹지 않으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다.

영화는 미소의 가난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가난은 배를 곯게 하고 입을 옷이 없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남녀의 성생활까지 방해하고, 종국엔 그녀와 남자친구를 헤어지게 만든다. 그녀는 성실하게 일하지만 버는 돈보다 물가가 더 빠르게 오른다. (중략) 섹스와 술은 사실상, 가난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값싼 사치이자 가장 비용을 적게 들여 얻을 수 있는 행복이다. 하지만 가난 탓에 미소는 섹스도 잃어버렸다. 이제 미소에게 남은 것은 술뿐. 그녀는 필사적으로 위스키라는 자신의 취향을 지킨다. 그녀도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편안히 바에 자리잡고 앉아 맛을 보는 위스키 한 잔이 그녀의 행복이자, 꼭 지켜야만 할 존엄이자, 그녀의 실존을 증거하는 알리바이 같은 생각이 문득 든다. 가난은 추상이 아니다. 가난은 〈소공녀〉가 보여주듯 삶의 가장 디테일한 부분까지 옭아맨다.(pp. 35~40)




저자의 시선이 '재즈'로 옮겨간다. 11장 「많은 재즈 거장들이 요절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에서 저자는 어느 학부모와의 만남에서 말문을 연다. 그분은 외국에서 성공한 어느 디자이너의 예로 들며, 그 디자이너가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우리나라의 입시 경쟁 문화를 들었다고 했다. 아마 저자의 전작 『헤밍웨이(아르테, 2018)』에서 저자가 입시 경쟁 풍토를 비판한 대목을 읽고 온 것 같다고 판단한다. 저자는 그 책에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통과 의례는 입시 경쟁과 닮아 있고 예술에까지 등수를 매기려 든다."고 썼다고 한다. 저자는 이어 "남의 인생을 두고 성공과 실패를 밈주알고주알 따지는 일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한국병'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아무리 아닌 척해도 나 역시 한국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한국병 환자로서 어느새 홀리데이의 삶을 평가질하고 있는 것이다."고 고백한다.

또 F. 스콧 제럴드(1896~1940)는 소설가지만 재즈 음악 하면 꼭 떠오르는 인물이다. 그는 1922년 『재즈 시대의 이야기』란 단편집을 내 곧 이어질 '재즈 시대'를 이끌기도 했다. 그가 유행시킨 '재즈 시대'란 말은, 재즈 음악이 크게 융성한 1920년에서 1930년 사이를 일컫는다. 재즈 시대를 그는 마치 자신을 위한 시대인 양 마음껏 누렸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사랑하는 연인 젤다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젊고 건강했던 그에겐 돈과 창작욕이 흘러넘쳤다. 자전적 에세이 『재즈 시대의 메아리』에서 피츠제럴드는 재즈를 이렇게 정의한다. "재즈라는 단어는 (···) 원래는 섹스를 의미하는 단어였고 그다음에는 춤, 이어서 음악을 가리키게 되었다. 말하자면 불안하거나 흥분된 자극의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로······."



저자는 차분하게 결론으로 이끈다. "베이커나 홀리데이의 전기, 피츠제럴드의 자전 에세이를 읽어보면, 어디에도 독자의 판단으로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재단선, 삶의 기준선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한평생이란, 그저 그 사람이 걸어온 짧고 긴 시간의 궤적일 뿐이다. 거기엔 성공도 실패도 없다. 술과 마약에 빠져 살았다고 마냥 비난만 할 일도 아니다. 술과 마약이 있어서 그나마 노래를 하고 트럼펫을 불고 소설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인생에 그마저도 없었다면 베이커나 홀리데이, 피츠제럴드의 인생은 더 비참하고 더 짧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하루를 백일처럼 산 사람들이라고,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려 애썼다는 말을 전하며 결론에 대한 독자들의 여지를 남긴다.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이면서. "비할 바는 아니지만 부끄러운 소설가로 살면서 나도 그렇게 소설을 써왔는지 모른다. 작가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되어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에 어느 정도 감정 이입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약자의 언어를 억압하려는 시도는 차별적 관계가 끝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라도 약자의 언어는 강자의 행위를 고발하는 언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가 그렇다. 일본이 ‘위안부’라는 단어를 부정하고 역사에서 지워버린다면 피해 사실도 사라져버린다. 인권을 유린당한 식민지 여성이라는 정체성,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반인륜 범죄 피해자라는 입장도 함께 부정되고 지워져버린다. 이것이 일본이 그토록 ‘위안부’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이유이고, 언어가 가진 영향력이자 위력이라고 할 수 있다.(p. 70)

저자 : 백민석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문학과 사회』여름호에 「내가 사랑한 캔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가장 낯설고 또렷한 시선과 문체로 1990년대 한국문학계의 독보적인 흐름이었던 그는 10년간의 침묵을 깨트리고 다시 왕성한 활동을 선보이며 오래도록 그를 기다려온 독자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대표작으로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수림』, 『혀끝의 남자』,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 『러셔』, 『죽은 올빼미 농장』, 『공포의 세기』, 『해피 아포칼립스!』, 『교양과 광기의 일기』, 『버스킹』, 『플라스틱맨』 등이 있다. 에세이 『리플릿』, 『아바나의 시민들』, 『러시아의 시민들』, 『헤밍웨이: 20세기 최초의 코즈모폴리턴 작가』를 썼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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