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
이기진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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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페디엠(,라틴어, carpe diem)은 라틴어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호라티우스의 시 「오데즈(Odes)」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현재를 잡아라’로 번역되는 ‘카르페디엠’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자주 이 말을 외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해진 용어다. 영어의 'Seize the day(현재를 잡아라)'와 같은 의미다. 이 용어는 이미 우리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다.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이고, 국어사전에도 등재돼 있다.

이 말이 가장 자주 인용되는 책은 거의 여행서거나 에세이다. '현재를 즐겨라'로도 번역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본 적이 없는 곳에 가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점이 많다는 것이 여행의 이유이다. 그러니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껴라, 그리고 변화가 필요한 자신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라. 여행 중 '현재에 집중해 즐겨라'는 의미로 쓰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현이다. 사실 유흥 목적의 말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종교에서 쓰여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명언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불교에서 라틴어를 쓰기에는 좀 어색할지 모르지만 그 뜻을 사용하기에는 불교에도 적합한 말이다. 불교의 수행은 '현재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풀이하는 스님들이 많다. 수행이란 참선처럼 앉아서 묵언수행을 하는 것으로 알지만 수행의 뜻은 훨씬 더 넓다.




카르페디엠을 실천하고 즐기는 물리학자가 책을 펴냈다. 이 책 『파리로 간 물리학자』는 물리학자가 파리로 왜 갔는지에 대해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사항을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씩 보여준다. 저자는 마이크로파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물리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과연 물리학을 제대로 연구하고 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는 것. 이상한 물리학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취미는 그림 그리기, 요리하기, 이상하고 귀중한 옛날 물건 컬렉션하기. 과학자, 물리학자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취미이기는 하다. 또 본업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 가지 부캐를 가지고 있다.

취미나 본업보다 다른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니 당연히 부캐가 더 부각될 수도 있겠다싶다. 저자가 최근 내놓은 이 책이 서울과 파리를 오가는 삶을 엮여 다양하고 재밌는 부캐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은 공간좌표의 축을 한 순간에 이동하는 수학 법칙처럼 비행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아르메니아, 일본, 이탈리아, 파리를 여행하며 행복했던 시간의 뭉텅이를 모아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친구 제랄과 수영장에서 늦은 시간까지 와인을 마시며 놀았던 기억, 사랑하는 딸과 비를 맞으며 파리의 골목길을 함께 걸었던 순간, 바닷가 파라솔 아래에서 평화로운 사람들의 풍경을 보며 맥주를 기울였던 시간들. 추억이라고 보기보다 직업 없이 한가롭게 여행 다니는 상류층의 일탈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물론 가족과의 시간과 서민적인 움직임을 뺀다면 말이다.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그의 시간 속에서는 물리학자라는 정체성보다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고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로서의 충만감이 가득하다. 그의 기억 속을 함께 걷다 보면 어느새 함께 충만감에 물들어 미소 짓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이 미소를 더 오래토록 짓게 한다. 삶의 낭만과 로맨스가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에 따르면 저자는 20대 후반 아르메니아에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파리에 들러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때 만난 파리 다락방에서의 바람 한 줄기가 지금의 시간으로 이끌었다는 저자는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추억하며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신의 서사를 풀어놓는다. 서사 사이사이에 있는 개성 강한 키치한(?) 그림은 그때의 시절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글과 그림에서 자유롭고 자신에게 충실하게 삶을 즐기는 모습이 가감 없이 읽힌다. 부러운 마음이 앞선다.




저자에 따르면 30대에는 파리에서, 일본을 포함해 10년을 외국에서 밤낮없이 연구하며 보냈고 40대에는 서울에서 학생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중년의 시절이 지난 지금 저자는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파리 다락방에서의 한숨이 지금은 심호흡으로 바뀌었다”라고 회상하는 저자의 삶에서 독자는 어떤 시간이든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을, 나이를 먹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이치라는 것을 발견한다. 딸이 가수 씨엘이란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세상살이는 엄격한 물리학의 세계와는 다르다. 그래서 재밌다. 어디든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사람과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각기 다른 정답이 존재한다. 사는 것은 이렇게 헷갈리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계속 좋은 방향을 선택하는 과정이다.”(p.7)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면 건방져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삶은 본인의 선택이다. 뭐, 희생도 따르겠지만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만 해도 결국 ‘끝’에는 아쉬움이 남는 게 삶이다.”(「틀리건 맞건」 중에서)



‘그 나이가 가진 시절’만이 가능한 일을 충실히 경험해온 저자의 글과 그림에서는 ‘성장’ ‘선택’ ‘자유’ 같은 키워드들이 보인다. 그 키워들 속에서 우리는 지금 내 인생에 닥쳐 있는 시간들을 좀 더 충실히 살아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을 읽는 보람이다. 때로는 힘들더라도 그 시간 또한 머물지 않고 지나가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 사이 순간순간 즐거운 일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카르페디엠의 실천자다. 저자의 말처럼 결국 끝에는 아쉬움이 남는 게 삶이니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삶은 완성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는 어디에 삶의 의미를 두고 살까? 직업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 짓는 게 좋은 방법일까? ‘일과 휴식에는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열심히 공부한 물리학 이야기보다는 먹고 놀고 즐기며 보낸 에피소드를 털어놓는 걸 좋아한다. 비파괴물리학회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 제랄. 그의 초대로 시작된 공동연구로 일년에 한 번씩 서로의 연구실을 오가며 우정을 쌓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 그와 함께 동네 카페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일이 끝나면 그의 부인 나딘의 집에 있는 정원 수영장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먹으며 즐겁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 우리와는 달라도 많이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삶의 모습은 달라도 행복을 느끼는 감정은 같을 것이다. 삶은 이렇듯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도,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짓기보다도, 그 순간을 충만하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게 목적이 아닐까.



저자 : 이기진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물리학 세계를 탐험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있다. 낮에는 연구실에서 ‘보이지 않는 마이크로파를 통해 세상을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고민하며 시간을 보낸다. 밤에는 집 근처 이태원 거리를 남몰래 쏘다니다가 맥주 한 잔을 기울이고 주말에는 딸 채린의 집으로 가 고양이 밥을 주는 집사가 된다.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 그대로를 만족한다. 20대 후반에 잠깐 들른 파리에 반해 젊은 시절을 줄곧 파리에서 보냈다. 파리 14구의 다락방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래를 꿈꿨고 아침엔 카페로 출근해서 논문을 썼다. 파리 다락방 이후, 일본에서의 7년을 포함해 물리학을 연구하며 외국에서 10년을 보냈다. 물리학자라는 직업과 다르게 세심하고 여린 감성을 지니고 있다. MBTI는 ISFP. 외향적일 것 같지만 내향적이고 직관적일 것 같지만 감각적이고 그때그때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다.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그림을 끄적거리다가 이 일이 취미가 되었고, 두 딸 채린과 하린을 위해 처음으로 그린 동화 『박치기 깍까』를 내면서 동화 작가가 되었다. 자신의 책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론, 여러 곳에서 전시를 요청받는 화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는 그가 사랑하는 파리의 일상을 그린 『꼴라쥬 파리』, 동화 『박치기 깍까』, 교양 물리학에 관한 『보통날의 물리학』 『제대로 노는 물리 법칙』, 앤티크 이야기 『나는 자꾸만 딴짓하고 싶다』, 청춘 일러스트 에세이 『20 UP 투애니업』 등 10여 권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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