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유서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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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밤의 유서』는 『소피의 세계』라는 소설같은 철학서적으로 유명한 요슈타인 가아더의 신작 소설이다. '알버트'라는 남자 주인공이 호수가 보이는 오두막에서 이틀에 걸쳐 쓴 유서를 소설 형식으로 실어 놓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반쪽인 에이린을 만났던 시절부터 회상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일들, 숨겨왔던 비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심정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알버트는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옛 애인인 마리안네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안네와 옛 관계를 이어간다면 아들 크리스티안과 아내 에이린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알버트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이 그리 길지 않다는 생각을 한 그는 유서를 남기기로 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 앞에서 알버트는 분노를 느낀다. 고작 왼손가락 몇 개를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로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어떤 이야기를 남기려는 것일까?



죽음 앞에 어쩔 수 없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남겨질 가족들과 그들과의 추억이 이 책 속에 담담하게 담겨 있다. 사실 죽음은 담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알버트처럼 갑작스럽게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그 충격은 더 클 것이다. 알버트가 간 오두막은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던 곳이다. 알버트는 그곳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자 했다. 가족에게 남기는 유서를 통해 그는 삶과 사랑을 생각할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죽음은 참 무섭고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그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여전히 어둡고 무섭다. 그럼에도 공포로만 남겨둘 수 없는 것이 죽음인 것이다. 책을 통해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내 신체 기능이 하나둘 사라져 결국은 식물인간의 상태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사실과,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슬프고 괴로울 뿐이다. 매 시간마다 아니 매분 매초마다 내 삶을 타인의 정성과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비참하기 짝이 없다.”(p.124)



삶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알버트는 동화 속의 오두막으로 향한다.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자 마음을 먹은 알버트는 오두막에 있는 방명록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바로 아내 에이린을 처음 만났던 19살 때다. 당신 1살 연상의 애인 마리안네가 있었던 알버트는 대학 교정에서 우연히 에이린과 마주친다. 사실 둘은 아무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서로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은 하지 않았어도 교정에서 서로를 찾느라 분주했다. 물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다시 만날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린은 알버트에게 드라이브를 제안한다. 아주 긴 시간 동안의 드라이브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화 속의 오두막을 마주한다. 주인 몰래 들어간 오두막에서 그들은 또 다른 추억을 쌓게 된다.



시간이 지나 둘은 결혼을 했고 둘 사이에서는 크리스티안이라는 아들이 태어난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사랑도 권태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듯이 그들의 결혼 생활은 뻐걱대기 시작한다. 바쁜 개인의 일정과 조금씩 식어가는 감정은 그들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신문에서 그 오두막 매매에 관한 광고를 보게 된다. 알버트와 에이린 그리고 크리스티안은 오두막으로 향한다. 아들에게는 그동안 비밀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그곳에서 그들은 옛 추억에 잠긴다. 나룻배를 타고, 빨간 스웨터을 입고 있던 에이린의 모습, 몰래 들어간 오두막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침대에 누워 피로를 풀었던 기억까지... 오두막 구입을 통해 그들은 예전의 모습을 다시 찾아간다.

몸을 잃은 자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으리라는 상상이 종종 우리를 두렵게 한다.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짐작해 봤을 감정이다. 육체 안에 갇힌 채 정신으로만 세상을 유영할 때, 그것은 지옥의 다른 이름일 수 있겠다고 저자는 알버트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이토록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이십사 시간 내에 고뇌를 끝내야만 하는 그는 끝내 ‘살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죽지 않기’를 선택할 뿐이다. 그의 용기는 가족들로부터, 우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나온다. 고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그의 선택이 느리게 납득된다. 삶과 질병에 대해, 더 나아가 사랑, 우주의 문제로까지 번지는 노 철학가의 사유를 좇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에 대해서도 통렬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소설의 형식을 빌었지만 사건보다는 사색, 심리보다는 사유의 나열에 가깝다. 앞뒤의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만 사건 위주로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의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책의 뒷부분 철학자 강신주의 「작품 해설」을 통해 『밤의 유서』는 '두 번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고 말한다. 소설이지만 약 170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다. 두 번 읽어야 할 소설이므로 340페이지 정도의 장편소설인 셈이라는 재미있는 해설을 붙여놓았다.

"한 번은 알버트가 되어 죽음의 문제에 몰입하고, 한 번은 알버트가 아닌 자신으로 돌아가 알버트의 극적인 변화를 이해하려고 할 테니 말이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보다 독자들이 죽음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기를 원했던 듯하다. 가히 철학자답다."(p.181~182)



사실 20세기까지만 해도 철학이 실체 없고, 무용한 것이며 심지어 난해하기까지 하다는 이유로 대중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십여 년 전,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철학의 대중화를 이룬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 요슈타인 가아더다. 그는 전작 『소피의 세계』에서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쉽게 표현하면 철학적 내용을 소설로 쓰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조언하는 대신 짧은 이야기를 통해 아름다운 삶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철학적 사색을 나열하지 않고, 독자들이 스스로 체화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이 바로 『소피의~』의 핵심이다.방대한 서양 철학을 독특한 소설 구조 속에 녹여내어 철학 이해의 장벽을 낮추고 철학을 우리의 삶에 보다 가까이 끌어와 철학 대중화의 성공적인 예로 평가받아온 작품이 『소피의 세계』다. 부제 「소설로 읽는 철학」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철학에 관한 소설이지만 단순히 철학 소개를 위한 흥미 위주의 소설은 아니다.



저자 : 요슈타인 가아더

1952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오슬로 대학에서 사상사와 신학, 북유럽 문학을 공부했고,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철학, 신학, 문학을 가르쳤다. 1986년 첫 번째 단편소설집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어 여러 편의 소설과 단편을 비롯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작품들을 썼다. 1990년 가아더는 『수상한 빵집과 52장의 카드Kabalmysteriet』에서 열두 살 소년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존재에 대한 성찰에 가 닿는 이야기를

선보이며 그해 노르웨이 문학비평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아동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가아더는 젊은 독자들에게 철학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이듬해 『소피의 세계 : 소설로 읽는 철학』을 펴냈다. 철학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꼽히는 이 책은 전 세계 64개 언어로 번역되어 45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후 그는 전업 작가로 전향하여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대표작 『소피의 세계』를 통해 청소년 소설 작가로 주로 알려지긴 하였지만, 그의 소설 다수는 어린이부터 성인 독자층에게까지 폭넓게 사랑받았고, 능수능란한 메타픽션 요소 활용으로 문학성과 철학적 사유를 동시에 담아냈다고 평가받았다. 1993년 『거울 속, 수수께끼 속에서I et speil, i en gåte』로 노르웨이서점협회 올해의 작품상 수상, 그 밖에 독일 아동청소년문학상 (1994), 이탈리아 반카렐라상(1995) 등을 받은 그는, 2005년 그간의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노르웨이 성 올라브 훈장 기사 및 더블린 트리니티대학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 가아더는 1997년에 아내와 함께 국제 환경상인 ‘소피상’을 제정하여 2013년까지 운영한 바 있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등 인권 향상과 지속 가능한 개발 지원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는 현재 아내와 성인이 된 두 아들과 함께 오슬로에서 살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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