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별 - 슈니츨러 명작 단편선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이관우 옮김 / 작가와비평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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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예술가들이 많다. 때문에 지독한 가난과 싸우다 병마에 시달리기도 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천재적' 예술가들에 속하며, 시대에 저항적이거나 혹은 반정부적, 사회 부조리에 비판적인 인물들이 많다. 주류로부터 배척 당하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다가 예술혼을 불태우며 생애를 끝마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후에 빛을 본 예술가들 중에 사회 부조리만큼 자신도 타락한 삶을 살다가 비극적 생을 마감한 인물도 있다. 천재적이라기보다 '동일화'했다고 말해야 할까?

이 소설집의 저자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태인 의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친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다. 1886년부터 병원에서 일했고 1893년에는 자신의 병원을 개업했으나, 생의 대부분을 작가로 활동했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주로 희곡을 집필했으며, 후고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과 친구였고,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도플갱어’라고 칭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도나우 왕정의 퇴폐를 묘사하는 작가로 낙인 찍혔으며, 모든 작품에서 당시 빈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어서 풍속 묘사가로, 그의 문학은 '오락 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작가에 대한 지식 없이 작품의 성격만 듣고 읽기를 희망했던 슈니츨러가 손에 들어온 독자의 기분은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당시 슈니츨러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절하는 무대를 사회비판의 장으로 바꾸어놓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1960년이 지나서야 슈니츨러는 사회전통의 압박, 소외, 고독, 자유와 헌신, 거짓과 실제에 대한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작가로 평가되었으며 체호프처럼 위대한 인간묘사가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914년까지 슈니츨러의 희곡은 오토 브람(Otto Brahm)의 연출로 빈 부르크테아터뿐만 아니라 베를린극장에서도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에 속한다. 슈니츨러는 1931년 사망할 때까지 멸망한 사회의 연대기 작가로 평가받았는데 이는 그가 뒤늦게 단편소설 쪽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1960년경에야 비로소 연극 감독인 아들 하인리히 슈니츨러의 활약으로 슈니츨러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해외저자사전)

작가로 성공하여 부와 명성을 얻기도 하지만 도박과 낭비로 수차례 어려움을 자초했고, 젊은 시절의 여성 편력은 카사노바의 환락과 모험을 옮겨놓은 듯했다. 실존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낯선 또는 병적인 그의 삶은 14세 때부터 죽는 날까지, 처음 3년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에 담겨 있다.



1895년 단편 「죽음 Sterben」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같은 해 빈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된 「사랑의 유희 Liebelei」를 통해 드라마 작가로서도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수련의 시절부터 히스테리와 최면 등 인간의 무의식과 심리를 다루는 정신의학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관심은 그의 문학에서도 드러난다. 작가 슈니츨러는 ‘내적 독백’과 같은 혁신적인 서사기법을 통해 인간의 은밀한 내면과 무의식을 여과 없이 표면으로 끌어낸다. 장교, 예술가, 의사 등 당시 빈의 부유한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의 은밀한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비판에 부딪치기도 했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장교의 1인칭 독백을 담은 소설 『구스틀 대위 Lieutnant Gustl』(1901)로 명예재판에 회부되어 제국의 장교신분을 박탈당한다. 성적 타부를 건드리는 연작 드라마 「윤무 Der Reigen」는 외설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카사노바의 귀향 Casanovas Heimfahrt』(1918), 『엘제 양 Fraulein Else』(1926), 『꿈의 노벨레 Traumnovelle』(1926)를 통해 세기말 빈 시민사회의 위선과 이중적인 윤리의식을, 『트인 데로 가는 길 Der Weg ins Freie』(1908)에서 반유대주의, 세기 전환기의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 사회, 민족주의와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무기력한 빈 부르주아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희곡으로 『아나톨(Anatol)』, 『사랑의 유희(Liebelei)』, 『윤무(Reigen)』, 『광활한 땅(Das weite Land)』, 『베른하르디 교수(Professor Bernhardi)』 등을 들 수 있다. 만년에는 희곡보다 소설을 썼으며, 대표적인 단편소설로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 『엘제 양(Fraulein Else)』, 『야외로 가는 길(Der Weg ins Freie)』 등이 있다.



이 소설집 『어떤 이별 : 슈니츨러 명작 단편선』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오스트리아를 대표한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단편들을 모은 고전 명작 단편선이다.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구스틀 소위」, 「눈먼 제로니모와 형」을 비롯하여 아직 국내에 번역 소개되지 않은 「홀아비」, 「친숙한 여인」, 「안드레아스 타마이어의 마지막 편지」, 「새로운 노래」, 「총각의 죽음」 등 모두 15편의 단편이 발표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발간 의미가 크다.

이관우 역자에 따르면 슈니츨러는 죽음과 성(性)의 문제를 문학에 녹여 내며, 특히 같은 시대를 산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의 기법을 통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이 책 속의 대다수 작품 또한 남녀 사이의 사랑과 증오를 그리면서 나아가 그것과 연관된 죽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양한 양태로 등장하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타산적인 성향과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심리를 세밀하게 다룬다. 이처럼 죽음과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인간의 속성 묘사는 문학을 넘어 심리분석학적 경지에 이를 정도로 치밀하다. 슈니츨러가 문학에서의 프로이트라고 불리는 이유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바탕을 둔 듯 인물의 내면세계로 깊이 파고들어 인간의 위선과 약점을 예리하게 들춰내는 심리묘사에 있다.




무엇보다도 슈니츨러는 인간의 의식이 단순히 눈앞에 드러나는 표면적인 것에 머물 뿐, 그 배후나 밑바닥에 감춰져 존재하는 또 다른 힘을 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경우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은 죽음이 닥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특히 단편 중 「상속」, 「3종의 영약」, 「친숙한 여인」, 「라이젠보크 남작의 운명」, 「새로운 노래」, 「삼중의 경고」 등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죽음이 그러하다. 책 속 등장인물들의 여러 죽음과 다양한 사랑,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심리 변전을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깊은 내면을 어느새 마주하게 될 것이다.

「상속」의 경우 일반적으로 상속이라고 하면 뜻하지 않은 거액의 상속만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때로는 영 달갑잖은, 상식을 벗어나는 불쾌한 체험이 '상속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사람이 죽는 것도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며, 이 소설에서는 놀랍게도 오랜 동안 달콤한 불륜의 순간을 공유하던 정부(情婦)가 죽고 그 법적 남편이 찾아와 시비를 가리자며 결투를 청한다. 결투는 당시 슈니츨러의 시대로부터 200년 전에 없어진 서양의 풍습이다. 한창 나이의 젊은 여성이 갑자기 죽듯, 총알 한 방이나 샤브르의 한 획에도 깊은 상처를 입어 생명을 잃기도 하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육신과 욕망은 좋은 대비를 이룬다.



이 책의 표제작인 「어떤 이별」도 불륜 이야기이다. 「상속」과 비슷하게 여기서 알베르트와 안나는 갑작스런 이별을 맞이하는데 그 원인은 안나의 뇌(腦)티푸스로 인한 죽음이다. 다른 점은 알베르트는 끝내 자신이 고인에게 누구였는지 밝힐 수가 없고 그 남편이나 주변 사람들도 다 사정을 모른 채 일단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만 몰입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버젓이 남편이 있었음을, 아니 알베르트를 '오빠'로 착각한다. 알베르트는 지금 애인이 갑자기 죽었다는 사실에 슬퍼 미치기 직전인데 그걸 누구한테 표현을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과정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Die Toten schweigen」) 익숙한 표현이 소설의 제목이다. 슈니츨러의 단편 소설 제목인 줄 몰랐던 한국 독자들도 마치 한국어 격언이라도 되듯 문구 자체가 낯설지 않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는 분량이 28페이지나 되니 꽤 긴 편이다.

"이봐, 오늘 프라터에서 마차를 타고 산책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 없어.)"

"나도 그렇게 믿고 있었어. 하지만 누군가가 우연히 우리를 들여다볼 수도 있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지."

"부탁인데 우리 다른 곳으로 가."

"자기 좋을 대로 하자."(p.80~81)

마차를 타고 공원의 돌며 밀회를 즐기는 불륜 관계의 남녀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 19세기 비엔나의 유한 귀족들의 타락을 엿볼 수 있는 대화가 오간다. 주위엔 별로 관심 갖지 않고 버젓이 자신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담았다. 요즘도 밀회라면 남들 눈을 피해야 할 텐데 19세기 유럽 귀족들은 시내 공원을 밀회 장소로 택할 정도였다는 점을 드러내는 작가의 의도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불륜, 사회 부조리, 귀족의 성적 타락 등만 슈니츨러의 관심을 끈 것은 아니다. 「눈먼 제로니모와 형」은 형제애를 다룬다. 이 작품에서 카를로가 어렸을 때 장난을 치다 동생 제로니모의 시력을 잃게 만든다. 그 후로 성인이 된 카를로는 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구걸을 해 동생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러나 어느 날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제로니모에게 다가와 "형한테 내가 금화 한닢을 주었는데 혹시 형이 다 차지하지 않게 조심할 것"을 귀띔한다. 물론 특별한 이유없는 거짓말이다. 지금껏 동생을 성심껏 돌봐온 그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고 그런 큰돈을 적선 받은 적도 없다. 그러나 동생은 이제 형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형은 의심을 그칠 줄 모르는 동생 제로니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생각으로 진짜 금화 한 닢을 훔친다. 그러나 동생은 의심을 거두기는커녕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형이 자신을 속였을지를 생각하며 본노한다. 이때

경찰이 찾아와 절도 혐의로 두 형제를 체포하려 든다. 동생 제레니모는 형이 큰돈을 적선 받은 적이 없었으며 어떻게 해서 금화를 손에 지녔는지 모든 진상을 파악하게 된다. 제레니모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고, 형은 다시 안식을 찾은 동생을 보고 "더 바랄 게 없다'며 마음을 놓는다. 미국 역사의 위대한 인디안 추장 제로니모와의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나게 해 슬며시 혼자 미소지어본다.

장편 전성시대에 오랜 만에 읽어보는 단편소설의 간결하고 사회 풍자가 강렬한 작품을 읽으니 맑은 하늘처럼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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