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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와이프
JP 덜레이니 지음, 강경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8월
평점 :
이 책 『퍼펙트 와이프』를 보면서 작가의 상상력의 한계를 생각한다는 게 아무 쓸모 없는 일이라는 확인했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작가는 슬퍼만 하지 않고 다시 살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날로그식 상상력뿐만 아니라 디지털식 상상력도 맛본 느낌이다. 또 그만큼 대단한 저자의 능력도 재확인한 셈이다. 소설은 있음직한 일에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작품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알고 있는 독자에겐 상상력의 세계가 감히 신(神)의 영역에도 도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임을 깨닫게 했다.
상상력은 지식과 다른 영역의 일로만 알았던 독자에게 또 상상력은 지식을 바탕한다는 점도 알게 해주었다. 상상력이 지식을 바탕하지 않는다면 기껏 가상이나 허구의 세계에 머물러 그 힘의 한계가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 소설은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 세상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데도 한몫을 한다. 이 책의 저자인 JP 덜레이니의 디지털 지식도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도 의심치 않는다. 적어도 독자에게는 그렇게 믿긴다. 물론 독자의 디지털 사고가 아주 얄팍한 데서 생겨난 것이지만 디지털, 특히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의 능력이 실감난다. 이밖에도 한 편의 잘 쓰인 소설을 읽는 만족감은 독자의 디지털 무식과 저자의 엄청난 디지털 지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디지털 지식을 바탕으로 아날로그 소설식으로 썼어도 이해하기 어려워 앞으로 SF 소설이나 디지털 문화를 다루는 소설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까 우려도 된다. 정신 없이 드러나는 반전의 거듭된 이야기도 독자로서는 따라가기 벅차다. 한 번만 읽어서는 이해조차 못할 정도로 이 소설은 깊은 생각과 해묵은 아날로그식 변명을 압도한다.
몽롱한 상태에서 주인공 애비게일이 깨어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이런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의 옆에는 남편이라 주장하는 남자가 있다. 테크 산업계의 거물, 실리콘 밸리의 가장 혁신적인 스타트업의 창립자 팀 스콧이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애비에게 팀은 차근차근 지금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녀는 재능 있는 예술가이자 열정적인 서퍼였다고. 그리고 어린 아들에게는 사랑이 넘치는 엄마이자 자신에게 완벽한 아내였다는 설명한다. 5년 전 끔찍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현대 과학의 힘을 빌려 이렇게 기계의 몸으로 되살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애비게일의 존재야말로 과학이 이룬 기적이라고도 한다.
충격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고 결혼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을 끼워 맞추던 애비게일은 자신을 되살린 남편의 동기에 의문을 품는다.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하길 소망한다고 말하는 남편을 믿어야 할까? 어쩌면 자신의 존재 목적은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심을 품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닐까? 5년 전 사라진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애비게일의 봉인된 기억이 깨어나면서 진실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책 『퍼펙트 와이프』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모티프로, 사랑하는 아내를 기계 몸으로 되살린 남편을 등장시킨다. 죽은 아내의 기억과 성격을 고스란히 지닌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서 현실에 적응해간다. 빠르게 애비게일의 삶을 대신하는 로봇 애비의 존재는 죽음으로 인해 깨진 가족의 삶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이들을 둘러싼 세상의 시선은 차갑다. 애비게일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력한 살해용의자로 지목받는 것은 남편 팀이었고, 그녀의 가족은 허락도 없이 기억을 기계에 업로드한 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팀이 좋은 의도로 자신을 되살린 것이 아닐 거라는 의심이 애비의 마음에 싹튼다. 애비게일이 사라진 것을 용납하지 않는 팀의 모습은 사랑이 아닌 광적인 집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파격적인 설정과 트릭을 선보이며 심리 서스펜스의 새 영역을 개척하는 작가 JP 덜레이니는 이번 작품 『퍼펙트 와이프』에서 SF적 요소를 채용하고 이중, 삼중의 반전을 준비해놓았다. 죽은 아내를 사랑한 나머지 기계로 되살린 남편 팀이지만 그의 의도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기계인 자신은 결코 팀의 진짜 아내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애비는 절망 속에서 서서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나간다. 과거 인간이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 애비에 대한 감정은 곧 질투로 변하고 만다.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시작한 현대판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닌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충격적 결말은 예측할 수 없는 압도적인 즐거움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이 소설이 첫머리부터 2인칭(당신)의 시점으로 시작하는 것에 주목해본다.
“슬퍼하지 마.” 당신이 말한다. “내가 살았잖아. 중요한 건 그거야. 안 그래? 우리 세 사람 다 살았잖아.”
“슬프지 않아.”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웃어 보인다. “행복해서 그래. 사람들은 행복할 때도 울잖아.”
물론,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통증과 약 기운 속에서도 당신은 그의 눈물이 ‘이제 모두 잘될 거야’라는 의미의 눈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리를 잃은 것일까?
다리를 움직여본다. 담요 아래에서 다리가 천천히, 뻣뻣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다행이다.(p.12)
코봇 애비를 '당신'이라 호명하는 이 기이한 이인칭 시점의 화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전지적 시점의 제 3자(내레이션)가 따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폐쇄회로 TV로 애비를 감시하듯 애비의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 중계하는 이 익명의 화자는 누구인가? 그러나 반복되는 '당신' 소리에 익숙해지고, 이야기의 리듬을 따라가느라 익명의 화자에 대한 찜찜함마저 완전히 잊을 무렵 때이른 반전이 일어난다. 반전을 예상했을 독자들이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애비들의 유토피아 같은 것을 그리며 코봇 애비를 따라온 독자에게는 당혹감을 넘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쩔쩔 상황에 처하게 한다. 유토피아를 그리며 따라왔더니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에 (결국은 팀이 계획한 그의 유토피아에) 들어서고만 느낌이다. 그 후로도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이어지는 반전에 얼떨떨해진 상태에서 책을 마치고 나면 소설 뒤에 인용된 미국 '특허 8996429호'가 눈에 들어온다. 2015년 구글이 사별한 가족이나 특정 인물의 개성을 로봇에 입힐 수 있는 '로봇 개성 개발에 대한 방법과 시스템'에 대한 아이디어로 특허를 받았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저자가 특정인의 기억을 업로드한 인공지능 로봇의 이야기를 동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전개하게 된 계기이리라는 짐작은 디지털 세상의 능력자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낼 것이다. 독자는 제외된다.
이 소설은 시작 전에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인용한 문장으로 문을 연다. "피그말리온은 이 여자들의 행동을 보고 자연이 여성에 불어 넣은 많은 결함에 혐오를 느꼈고 잠자리를 함께할 아내 없이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우리에게 친숙한 피그말리온의 한 문장이다. 현실의 여성을 혐오하여 사랑할 수 없었던 피그말리온. 그는 자신이 만든 상아 조각상에 반해 말을 걸고 입을 맞추고 어루만지며 아름다운 꽃과 보석으로 치장해준다. 어느 날 그는 사랑의 여신 베투스에게 제물을 바치며 '내 상아 소녀를 닮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기도한 끝에 생명을 얻은 상아 소녀와 결혼식을 올린다.
『변신 이야기』에서 이 상아 여인은 이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훗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우유처럼 흰 여자'라는 의미의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가 그 후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비디우스는 두 사람이 아홉 달 뒤 파포스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은 맺는다.(p 507, 옮긴이의 말)
다시 게속하던 미국 특허 얘기로 돌아간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연명의료 의향서뿐 아니라 '의식 업로드 의향서'까지 작성해야 하는 시대로 다가가는 것인가? 아날로그 방식의 독자에겐 감히 상상조차 힘들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 기억이 업로드되고 나의 정체성을 가진 로봇은 나일까, 로봇일까? 이 질문을 다시 소설 속 애비에게 돌리자면 이 소설은 어느 날 깨어났더니 자신이 인공지능 로봇이 됐음을 알게 된 여자가 누락된 기억을 되찾아가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인공지능 로봇이 자기 의식의 출처인 여자의 흔적을 따라가며 기억의 빈틈을 메우는 이야기일까? 『퍼펙트 와이프』는 읽고 나니 시원함이나 안도감보다는 씁쓸함과 질문이 여운처럼 이어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의 기술적 복잡성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시도를 크게 하지 않았다는 점도 밝혀두겠다. 나는 테크노스릴러가 아니라 심리 서스펜스 소설을 쓰고 있음을 늘 분명히 한다. 아무리 독특한 SF적 요소가 있는 소설이라 해도 말이다." 저자의 「감사의 글」에 방점을 찍고 싶다.
저자 : JP 덜레이니(JP DELANEY)
과거 다른 이름으로 베스트셀러 소설들을 발표한 영국 작가의 필명으로, 2017년 심리스릴러 『더 걸 비포』를 통해 엄청난 성공을 이룬다. 『더 걸 비포』는 출간 즉시 영국과 미국 아마존 베스트셀러가 되고, 〈뉴욕 타임스〉와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으며, 전 세계 41개 이상 나라에 번역·출간되었다. 이듬해 발표한 장편소설 『빌리브 미』와 2019년에 출간한 『완벽한 아내』 역시 영미권 독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역자 : 강경이
영어교육과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덧없는 꽃의 삶』, 『걸스쿼드』, 『과식의 심리학』, 『철학이 필요한 순간』, 『프랑스식 사랑의 역사』, 『아테네의 변명』, 『운명의 날』,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