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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법과 정의 이야기 - 조선시대 살인사건 수사일지
정약용 지음, 오세진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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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다. 그는 개혁군주 정조 때 실학을 바탕으로 조선 부흥을 최일선에서 이끌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의 일생은 학자로서는 그의 학문이 꽃 피웠지만 정치가로선 오랜 유배 생활 등 파란만장했다. 더욱이 천주교 집안으로 낙인 찍힌 후 가문이 몰락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등 그야말로 불운의 정치인이다. 오랜 유배 생할 동안 집필한 수많은 책은 당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망라한 총 5백여 권에 이른다고 하니 그의 학문의 깊이와 넓이에 감탄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가운데 그의 3대 저서로 일컬어지는 『목민심서(행정)』, 『경제유표』(경제), 『흠흠신서』(사회)는 독보적이고 신선한 저서로 알려져 후세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 중 『흠흠신서』(欽欽新書)는 18세기 조선의 과학수사 지식을 집대성한 한국 법제사상 최초의 판례 연구서다. 정약용은 당시 조선 사회에 강력사건의 수사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불공정하게 처리되는 현실을 개탄하며, 지방관들이 사건의 진상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수사의 기술과 지식을 담은 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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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신서』는 한마디로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저술한 형법서(刑法書)이다. 30권 10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508권의 정약용 저서 가운데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와 함께 1표(表) 2서(書)라고 일컬어지는 대표적 저서이다. 정약용은 살인 사건의 조사·심리·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건을 다루는 관료 사대부들이 율문(律文)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에 다산은 생명존중 사상이 무디어져가는 것을 개탄하였다. 이를 바로잡고 계몽할 필요성을 느껴 집필에 착수한 것이고, 1819년(순조 19)에 완성 1822년에 편찬되었다.
내용은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詳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詳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사요의」에는 당시 범죄인에게 적용하던 『대명률』과 『경국대전』 형벌 규정의 기본 원리와 지도 이념이 되는 유교 경전 가운데 중요 부분을 요약, 논술하였다. 그리고 중국과 조선의 사서 중에서 참고될만한 선례를 뽑아서 요약하였다. 또, 중국 79건, 조선 36건 등 도합 115건의 판례가 분류, 소개되어 있다. 「비상전초」에는 살인 사건의 문서를 작성하는 수령과 관찰사에게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발생한 비슷한 사건에 대한 표본을 선별해 해설과 함께 비평했다. 독자로 하여금 살인사건 문서의 이상적인 형식과 문장 기법·사실인정 기술, 그리고 관계 법례를 참고할 수 있도록 종합적으로 논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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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율차례」에는 당시 살인 사건의 유형과 그에 적용되는 법규 및 형량이 세분되지 않아 죄의 경중이 무시되고 있는 사실에 착안하여 중국의 모범적인 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 제시하여 참고하도록 하였다. 「상형추의」에는 정조가 심리하였던 살인 사건 중 142건을 골라 살인의 원인·동기 등에 따라 22종으로 분류한 것이다. 각 판례마다 사건의 내용, 수령의 검안(檢案), 관찰사의 제사(題辭), 형조의 회계(回啓), 국왕의 판부(判付)를 요약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자신의 의견과 비평을 덧붙였다. 「전발무사」에는 정약용이 곡산부사·형조참의로 재직 중 다루었던 사건과 직접·간접으로 관여하였던 사건, 유배지에서 문견(聞見)한 16건의 사례에 대한 소개와 비평·해석 및 매장한 시체의 굴검법(掘檢法)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한국법제사상 최초의 율학 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사건을 심리하는데 필요한 실무 지침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법의학·사실인정학(事實認定學)·법해석학을 포괄하는 일종의 종합재판학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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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다산의 법과 정의 이야기』는 『흠흠신서』에 나오는 위 내용을 요약 발췌해 읽고 이해하기 쉽게 한자어를 우리말로 옮기고 것이다. 특히 36건의 살인사건을 선별하여 흥미진진한 해설과 함께 평역(評譯)했다. 정조가 직접 심리했던 사건의 구체적인 이야기와 진상을 밝히는 과정, 판결의 법률적 논리,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의견이 서로 얽히고설켜 한 권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정약용은 이 책에서 수사의 방법, 올바른 법률 적용, 나아가 판결의 원칙 등을 세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모든 사건에는 때로는 일치하지만 때로는 대립되는 정조와 정약용의 관점 차이를 볼 수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흠흠신서』에 등장하는 사건과 판례들을 보면 학연과 혈연을 방패로 은폐하고 왜곡하는 수사, 위정자들에 의해 무너지는 법질서 등 오늘날과 똑같은 부분들이 매우 많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지혜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사건들과 정약용과 정조의 생각을 읽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공감하는 가운데, 전혀 달라지지 않은 오늘의 상황을 바라보며 우리는 다산이 던진 질문을 곱씹어 보게 된다. “법은 누구의 편인가,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
이 책은 당시 그랬듯이 한자로 쓰인 책이다. '흠'자가 한글세대인 요즘 세대는 물론 한자 병기 시대를 살았던 사람도 자주 대하는 글자는 아니다. '欽'자는 '공경할 흠'자로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겹쳐 쓴 것으로 보인다. 수사나 법 적용 등에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5개의 장은 역자가 간추리고 비슷한 조항을 묶어 한 개의 장으로 만들어 모두 5개 장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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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 체계는 지금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책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간통이나 가족의 살인에 대한 복수로 인한 살인은 어느 정도 정당성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심지어 형을 아주 가볍게 받거나 주범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을 경우 형을 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살인과 폭력은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허용이 안된다.
또 정조가 '서얼 철폐'나 '관노비 해방'이 시행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서얼제도를 철폐하여 서자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실제로 규장각의 검서관에 4명의 서얼을 등용하였다. 이처럼 그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정책을 펼쳤는데 살인 사건의 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도 백성들에게 관대한 형벌을 내린 것 같다. 살인 사건을 수사하다가 누가 주범인지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형을 면해 주거나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억울한 옥살이를 피하게 해야 한다는 정조의 법 신념인 듯 하다. 옮긴이는 이에 대해 정조는 강력한 법으로 처벌을 하기보다는 죄를 지은 백성에게도 베풂(정치적 배려)으로써 자신의 리더십을 공고히 했을 거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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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죄는 심각한 형벌이 가해진다. 간통한 배우자나 간통 상대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흠흠신서에 자주 등장한다. 그때는 간통이 빈번한 사회 문제였던 듯하다. 유교가 국가의 근본 이념이던 시절에 간통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역시 사회가 안정이 안 되고 형벌제도가 엄격하지 않았던 것도 원인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살인 사건에 대해 형벌을 주는 데 있어서 지금과 다른 잣대, 기준이 있었다. 간통 때문에 일어난 살인이나 가족의 살인의 경우 복수로 인한 살인이 어느 정도 허용이 되었던 것도 지금과는 다르다. 책에서 '윤덕규의 살인 사건'의 경우 본처의 아들이 첩의 아들을 죽인 후 내장을 꺼내어 목에 걸고 다녔다고 했다. 현재도 살인 후 시체를 훼손하면 가중처벌을 받는다. 사체 훼손 및 유기에 대한 형벌이 추가된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다.
15세 미만(지금 만 14세 미만은 형사처벌 면제)의 살인사건 범죄자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다. 15세로 연령을 정한 것은 성인식을 해서 성인으로 인정 받는 나이가 15세였기 때문이란다.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친족의 살인사건 복수에 대한 살인에 대해서는 감형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현대는 사적 복수를 절대 허용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는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것이 놀랍다. 신분과 관습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마치 이슬람 사회에서 간통한 여인에 대한 '가족에 의한 살인' 뉴스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슬람 국가들은 대부분 가족에 의한 형벌이 인정되는 것 같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한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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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약용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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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