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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 장석남의 적막 예찬
장석남 지음 / 마음의숲 / 2021년 7월
평점 :
독자의 서평 경력이 짧기 때문에 문학작품(시, 소설, 에세이 등)이든 논저든 자기계발 책이든 서평이 쉽지 않다. 특히 문학 작품 서평은 어렵다. 시나 소설, 에세이는 글쓰기라면 '도사'들인데 그들이 써놓은 작품을 평가한다 해도 동어반복이나 함량 미달의 서평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설픈 속에서도 나름의 성실한 평가를 하면 고맙다는 답례도 받은 적이 있다. 서평의 매력인 것 같다. 졸렬하기 짝이 없는 서평에 '잘 봤다, 좋은 평을 써 주어서 감사하다'는 댓글이나 메시지를 보내온 경우 반어법처럼 들리는 것은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저자가 직접 보내온 경우엔 적잖이 당혹스럽다. 굳이 아무 말 없이 지나가도 될 터인데 애써 서평자에게 댓글을 단다는 것 자체가 독자들의 관심에 유의하기 때문이리라.
저자의 글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부러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이 책의 서평을 선택한 이유는 이 책 『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의 부제가 「적막 예찬」이어서다. '적막'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를 독자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쓸쓸한 듯 고요하고, 외로운 듯 유유한 상태의 매력 때문이다.
이 책 저자이자 시인인 장석남은 유년 시절부터 시와 자연에 조숙(?)했다고 한다. 등단 35년 차를 맞은 지금도 그는 세상의 구부러진 지점에 주목하고 노래하는 시인의 의무에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13년 만에 새 옷을 입은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을 들춰본다. 에세이나 시는 주장을 펴는 글이 아님은 누구나 잘 아는 바다.
그러나 주장이 없다고는 하지만 논저나 사회 비평서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고 할 뿐 어떤 글이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겠는가. 이 산문집은 부제에서 암시하듯 '적막함'을 노래하는 것이다. 산문집이라고 해서 내키는 대로 적어 내린 비체계적인 글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산문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 오히려 뼈대가 있고, 건질 만한 단어나 귀절이 많다. 이 산문집은 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시론(詩論), 인생론을 풍부하게 풀어냈다. 사유라고 할 만한 치밀한 생각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건성으로 읽다가는 중요 지점을 발견하지 못할 우려가 크다.
저자에게 사랑은 어린 시절 자연학습 시간, 말굽자석에 뿌려진 추상적인 문양의 쇳가루들처럼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 문양을 탄생시킨 근본적인 이유가 여전히 생생하게 궁금한 것이다. 향수, 추억, 자연들이 생각나게 한다. 저자는 이런 정지 작업 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이어붙인다.
"이해라는 것이 사랑마저도 해결하려고 할 때 모든 것은 헝클어진다." 웬만큼 흡족하지만 그래도 익숙한 사랑 타령이다. 나이라는 돌덩이를 하나둘 쌓아오며 시인의 시선은 어떻게 무르익어 왔을까.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의 시선을 닮을까, 한겨울의 찬바람에도 꼿꼿하게 서는 대의 청정을 닮을까. 산책하듯 흘러가는 문장 속에서 자연을 닮아가는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랑하는 것들과 거리를 두며 적막을 예찬하는 시인은 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외로움을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애인의 발자국을 따라 밟는 마음으로 찬찬히 응시해본다. 시인의 마음에 공감이 가고 동화되기도 한다. 유유자적 도인인 척 눈에 팍 띄는 대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그만 집 짓기' '비유, 카메라' 같은 글은 놓치기 아까운 글이다. 삶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가 어렴풋이 구분되는 순간이다.
같은 피사체를 촬영하는 여러 가지의 구도와 초점이 있고 이에 따라 사진의 결과물이 천차만별 달라지듯이, 어떤 분야에서건 뭇사람과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이 개인에게는 필요하다.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함이다. 흔히 접하지 못하는 색다른 시각은 개인의 중심을 지키며 사소한 사건을 바꿔놓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밈(Meme, 비유전적 문화 요소)이 되기도 한다.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존재는 다양한 사람이라기보다 다양한 관점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런 차원에서 시인의 산문집을 읽는다는 것은 자아를, 혹은 대상을 해석하는 최첨단의 시각을 접한다는 것 아닐까. 가장 새롭다는 의미보다 가장 날카롭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예리한 칼 같은 시선으로 단단하게 굳어 있는 대상의 내면을 해체하고 틈을 파헤치는 시인의 시도는, 감정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낯선 대상과 감정을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다.
돌 파는 것을 좋아한다. 거기에 꽃도 파봤고 산도 내 나이에 맞게 봉우리를 만들어 파봤다. 새는 돌 속으로 날아갔고 물은 돌 밖으로 흘렀다. 달은 돌 뒤로 졌으며 눈보라는 세찼다. 돌의 까칠한 표면에 드러난 형상들은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모던한 것이었다, (중략) 미켈란젤로가 ‘단지 바위 속의 무엇을 풀어주었을 뿐’이라 했던가? 그 안에 무엇이 있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하고 싶다. 아마도 종국엔 나를 닮은 무엇이 되려나? 그건 내 가슴을 새기는 심정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꿈일지도.
- pp. 22~23 「돌과 사귀기」 중에서
독일의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문학의 사용가치를 주창하며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했지만, 오늘날 그가 강조한 문학적 요소는 대개 축소되거나, 남아 있다고 할 만한 일부의 목소리들은 산문으로 옮겨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 대중들에게 있어 문학, 특히 시는 지적 계몽과 유희라는 두 기능 사이에서 설 곳을 잃은 ‘무용한 것’에 불과하다. 수 세기간 이어져 온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그 어느 때보다 자조적으로 들리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굳건해 보였던 문학의 가치는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그러나 여전히 문학의 쓸모를 믿는 존재가 있다. 설령 그 쓸모가 없더라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시인이다. ‘내 글품은 구투를 벗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게 녹은 더디 앉을 것’이라고 믿는 시인은 자신은 물론,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과 닮은 문학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한다. 여전히 문학은 삶의 지혜를 담은 보물창고였다. 시인은 단지 지금까지 지켜온 특유의 예리한 시선으로 변치 않는 가치를 알아보는 것뿐이다.
역시 글이라는 것은 맨땅에서 파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요즘에 와서 더더욱 절감한다. 묻은 게 없으면 나오는 게 없다는 것은 만고진리지만 그 토양마저도 굳고 거칠면 도통 좋은 씨앗도 배겨나질 못한다. 아무리 깊이 파서 땅을 뒤집어놓아도 비 한 번 오고 나면 굳어져서 호미조차 들어가질 않는다. 돌덩이처럼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중략) 그나마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것은 옛 책들일 수밖에 없다.
- pp. 30~31 「밤에 물소리를 듣고 초서가 아름다워졌다」 중에서
옛 책에 담긴 문학적 향취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전 묶었던 원고에 새 옷을 입히는 시인의 의도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문학은 상처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던가. 세상의 천태만상과 우여곡절을 보고 겪으며 다져진, 무수한 상흔이 비치는 시인의 문장을 곱씹는 일도 하나의 공부일 것이다.
모과라는 열매는 아주 매혹적이다. 저 빛깔을 보라. 저 빛깔이야말로 늦은 가을 저녁을 닮은 빛이 아닐 수 없다. 한쪽에 상처가 나 있다. 상처는 짙은 자주색이다. 길가에 뒹굴던 것을 주워왔던 것이다. 상처 때문에 버림받은 놈일 게 뻔하다.
그런데 온 방을 물들이는 이 향기는 상처에서부터 쏟아져 나온 것이리라. 상처가 향기를 짙게 만들어낸다.
- p. 111 「모과 향기 속」 중에서
스스로 음악 마니아의 지경은 아니지만 ‘어지간히 음악을 좋아한다’고 여기는 시인은 음악을 듣는 가운데 적막을 붙들어 맨다. 맞닿지 않을 것만 같은 두 쌍곡선, 음악과 적막이 시인의 세계 안에서는 교차점을 지닌다. 오랜 적막이 곧 음악이 되고, 흐르는 선율에서 적막을 발견하는 그의 사유는 유쾌하면서 동시에 침착하다.
인간은 그래도 그러한 자연의 순환을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어서 삶과 죽음의 원리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신이 준 기회다. 우리는 늦은 가을 저녁나절이면 숲길을 걸으면서 ‘자연이 저러하거늘…….’ 하고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걷다가 다시 오래 침묵한다. 침묵이 바로 깊은 생각의 대지이고 지혜의 대지이다. 음악도 침묵을 대지로 삼지 아니한가.
- pp. 218~219 「풍죽의 브람스」 중에서
슬픔, 고요 같은 낱말들은 그렇게 자연스레 시인과 어울린다. 그가 보여주는 슬픔과 고요는 어딘지 다른 구석이 있을 것만 같다. 산문 속에서 빛나는 이 남다른 시선은 감각의 새로운 경지를 제시한다. 쉬지 않고 수런거리는 듯한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고요와 인간의 감정에 국한되었던 슬픔은 시인이 응시하는 대상 곳곳에 스며든다.
물 긷는 소리부터 날아가는 새의 깃털까지, 서정에 닿아 있는 객관적 상관물을 기꺼이 삶에 품은 시인이 써 내려간 문장들은 소낙비처럼 느닷없이 쏟아지며 독자의 ‘왼쪽 가슴 아래께’를 적시고 만다.
시인은 자신의 일부를 이루는 음악 속에 들어앉아 고요를 오래도록 추상한다. ‘몇 겹의 자연 속에’ 파고들었을 그 역사 깊은 적막의 본질을 알아본다. 멀리 있지만, 다행히도 감각할 수 있다. 마침내 독자는 우연히 접한 음악이 귀에 맞는 기쁨을, 한 편의 연주 같은 산문 속에서 발견한다. 그 발견은 적막을 닮았다. 어쩌면 인생일지도.
저자 : 장석남
아름답고 섬세한 감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신서정파 시인. 1965년 인천 덕적에서 출생하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방송대,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91년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9년 「마당에 배를 매다」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등의 시집과『물의 정거장』, 『물 긷는 소리』등의 산문집이 있다. 장석남 시인의 시에는 그리움이 있다. 시간과 내력을 꿰뚫는 그의 시선 앞에서 사물들은 그 내면에 숨긴 고독을 드러내고 돌아갈 고향을 반추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