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세 번쯤 하는 게 좋아
고요한 지음 / &(앤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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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다보니 문득 고(故) 최인호 작가의 「깊고 푸른 밤」이 생각난다. 당시 인기가 좋아 영화로도 제작돼 '장사진'을 이룬 매표소와 '암표'가 등장하는 등 이상 열기로 뉴스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작품도 이 소설 『결혼은 세 번쯤 하는 게 좋아』처럼 미국 불법 체류자로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당시 최인호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1980년대 초 나는 어느 날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었다. 미국에서 반 년 가까이 낭인생활을 하던 나는 그 곳에서 절망 속에 신음하며 망명객처럼 은둔하고 있었다. … 그렇게 낭인생활을 보내고 돌아온 후에도 나는 역시 거의 반 년 동안 글을 멀리하고 있었다. 한밤중에도 알 수 없는 불안에 빠져 형광등을 수술실처럼 환히 밝히고 잠자는 두려움 속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 열정이 빚어낸 첫 작품이 바로 「깊고 푸른 밤」이다."고 밝힌 바 있다.

스토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당시 조국(한국)에 대한 불만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가 두 인물의 이야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뻗어 있는 해안 도로를 달리는 여행을 통해, 비극적인 망명 생활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소설 『결혼은 세 번쯤 하는 게 좋아』 역시 미국 사회에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한 남성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장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자는 흑인 여자를 밀어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여자가 눈을 떴다. 여자가 허리를 끌어당겼지만 장은 침대 밖으로 나가 벗어둔 청바지를 입었다. 여자는 상체를 반쯤 일으켜 침대에 기댄 후 말보로를 꺼내 라이터불을 붙였다. 사방으로 담배 연기가 퍼졌다. 장은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침대에 있는 베개를 집어 짝퉁 버버리 잠옷 가방에 넣은 뒤 여자를 쳐다보았다. 이불 위로 여자의 검은 가슴이 드러났다. 여자는 담배를 입에 문 채 턱으로 방 한쪽에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탁자에는 구겨진 100달러 지폐 두 장이 놓여 있었다."

이 소설 남자의 직업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스너글러'(snuggler, 편안한 숙면을 위해 껴안아 주는 이색 직업, 독자 주)이다. 이런 직업이 있는 줄 처음 알았으나 어떤 직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숙면을 위해 안아준다는 말에서 풍기는 세속적 인식에서 부끄러운 직업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책의 저자 고요한 역시 이 소설의 집필 계기는 스너글러란 직업 때문이었음을 「작가의 말」을 통해 밝힌다.

"뉴욕을 배경으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4년 전이었다. 뉴욕이란 도시에 '스너글러'란 직업이 있다는 기사를 본 날이었다. 세상에 뉴욕은 어떤 도시이기에 사람을 안아주는 직업이 있을까. 대체 얼마나 쓸쓸한 곳이기에. 뉴욕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동시에 호기심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뉴욕의 밤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사람을 안아주는 한국인 불법체류자가 떠올랐다. (...) 외로움만큼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게 어디 있을까, 외로움만큼 사람을 고독하게 하는 게 어디 있을까.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도시에서 스너글러가 탄생하는 건 당연했다. 그곳에 나는 한국인 불법체류자인 장이란 인물을 거닐게 했다.

이국의 거리를 걸으며 장이 본 것은 낯선 백인과 낯선 거리와 낯선 풍경일 것이다. 그 순간 장이 그리워한 것은 그가 떠나온 한국일 것이다. 낯선 곳에 가면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은 불법체류자가 아니었던가."

 


 

삶에서 가장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은 무엇일까? 노년일까, 가난일까. 이 두 가지의 절망은 모두 악마의 상점 명품관에서 오랫동안 각광받던 상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못했던 보너스 찬스가 생겼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방향으로부터 돌풍이 불어온 것이다. 임지훈 문학평론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가 쓴 이 책의 뒷 부분에 있는 「작품 해설」을 통해서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이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사랑에 빠진다. 사랑으로 도망치고, 사랑에서 도망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번에는 정말로, 진실한 사랑의 대상을 만났다고. 혹은 이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다고. 끊임없이 긍정하고 부정하는 쳇바퀴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이 없어도 우리의 삶은 돌고 돌 테지만, 그건 단지 우리 삶의 과잉된, 돌출된, 여분의 어떤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사랑에 빠지고, 자신이 모르는 사이 사랑을 지나쳐온 자신을, 과거가 되어버린 사랑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두 손으로부터, 아무것도 남지 않은 두 손에 이르는 그의 순간들을,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면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 이름으로는 '장인수', 하지만 '데이비드'로 불리는 그의 직업은 '스너글러'이다. 몸을 팔지는 않는, 섹스 없이 하룻밤 동안 여자를 안아주는 스너글러. 그래서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죠. 하지만 난 그들과 달라요. 따뜻한 체온을 나눠주며 외로운 사람을 위로해 줘요. 사람의 체온만큼 따뜻한 건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잠옷 가방을 메고 여자의 집을 찾아가 겨울밤을 같이 보내주는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죠."

"산타클로스요?"

"네. 나는 늘 뉴욕의 밤을 따듯하게 만드니까요."(p. 38)

장은 불법체류자 신분이지만 여자 친구도 있다. 그래서 장의 목적은 '마거릿'(73세의 흑인 여자)과의 결혼을 통해 취득될 영주권이다. 뉴욕의 거리를 당당하게 걸어다니기 위해서는, 다친 연인의 다리를 치료해주기 위해서는 영주권을 얻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프러포즈의 대상이 '마거릿'인 것도 딱히 그녀이기 때문도 아니다. 스너글러인 장이 불법체류자 생활을 멈추려면 미국 여자와 결혼하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젊은 여자들은 한낱 동양인에 불과한 장에게 관심이 없었고 "관심을 보이다가도 불법체류자인 걸 알면 더는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여자들을 안아주러 다닐 때 젊은 여자보다 나이 든 여자에게 잘 해줬"던 가운데, 마거릿이라면 자신과 결혼해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장에 대한 인물 설명이 소설 전개 부분에 일부 언급된다. 엄마와 이혼한 아버지가 뉴욕에 온 것은 30년 간 운영하던 공구 공장이 파산한 후다. 친구들에게 손을 벌렸지만 도움을 받지 못해 세탁소를 하는 친구가 있는 뉴욕으로 온 아버지. 아버지가 떠난 후 장은 학자금 대출도 갚고 생활비도 마련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뉴욕 맨해튼에서 한국어 교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발견해 전화를 걸어 일단 선수금을 입금하고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뒤늦게 취업사기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자다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면 어둠 속으로 검은 물결 같은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얼마나 검은지 아버지는 어둠을 끌어안고 자는 것 같았다. 순간 장은 서울에서 뉴욕까지 떠내려와 태평양을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았다.(p. 73)

불행은 왜 한 번에 오는지... 어느 일요일 새벽 아버지는 빌딩 청소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교통사고를 당했고 집주인은 집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나가달라고 한다. 도움의 손길을 얻고자 아버지 친구 세탁소를 찾아갔으나 그런 곳은 없었다. 그 와중에 비자가 만료됐고 불법체류자가 된 장. 이때부터 힘겨운 생활이 시작된다.

 


 

이 소설은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로 독자에게도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어쩌면 인생이란 수프 맛 같은 건지 몰라. 어느 땐 싱겁고 어느 땐 짜고, 게리가 죽고 나서 내 인생은 싱거웠지만 이젠 간이 맞아. 수프는 짭조름해야 맛이 나. 그래서 말인데 나도 여생은 나를 위해 살고 싶어. 그러니까 내 결혼은 걱정 마. 너도 앞으론 네가 좋아하는 사랑을 찾아서 살아. 이젠 일년에 한두 번 오는 너를 기다리며 살진 않을 거야."(p. 141)

 

마거릿의 독백 같은 말은 '사랑과 결혼'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에 데이비드는 내게 철새 같은 방문객이었어. 그런데 어느 때부터 데이비드를 부를 때면 마음이 설렜어. 데이비드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하던지. 데이비드가 오는 날은 목욕을 하고 가장 아름다운 잠옷을 입었지. 늙은이 냄새가 날까 봐 이도 두 번씩 닦았어. 가끔은 질투도 했지. 다른 여자를 안아주러 간 게 아닐까 하고. 폴로 산책을 한 번씩 더 시킨 것도 이 때문이야. 그리고 어느 때부터 난 폴로에게 데이비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 그때부터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을 잡고 싶었어."

장은 마거릿 이야기를 듣다 어떤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떠올라 휴대폰으로 검색했다. 시를 쓴 사람은 정현종이라는 시인이었다. 장은 「방문객」을 영어로 번역해 읽어줬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마거릿이 미국 시냐고 물어 한국 시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거라는 말에 공감해. 데이비드를 기다리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거든. 더 이상 데이비드는 내게 방문객이 아냐. 이제 나의 미래야."(p. 134~135)

 


 

소설의 결말 부분으로 가면 왜 이 소설의 제목이 '결혼은 세 번쯤 하는 게 좋아'이고 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이고, 왜 삶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는지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뉴욕의 '2500 스퀘어 피트짜리 집'에서, 그는 거리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가지 못한 손으로로부터 그는 이제 집과 영주권을 얻었다. 자신의 욕망이 완전하게 실현된 자리에서, '장'은 정말 모든 걸 얻은 것만 같다. 단지 그 자신, 불법체류자이자 스너글러이며 '데이지'의 연인이었던 '데이비드 장'을 대가로 치르고서 말이다. 이제 그는 완전한 '게리'가 되었다. 다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게리'가 되었다. 사랑도, 연인도, 그 모든 순간을 과거에 두고 와버린 '게리'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거래'의 대가라고도, '사랑'의 대가라고도 쉽사리 말할 수 없는 '그'를 앞에 두고 있다. '장'이라고도 '게리'라고도 부를 수 없는 '그', '장'의 모든 것과 '게리'의 모든 것을 지불해 버린 '그'를 말이다.

 

저자 : 고요한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2016년 ≪문학사상≫과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번역문학 전문저널 ≪애심토트≫(ASYMPTOTE)에 단편소설 〈종이비행기〉가 번역 소개됐다. 2020년 첫 소설집인 ≪사랑이 스테이크라니≫가 출간되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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