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남기는 사람
유희란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사진을 남기는 사람』은 작가 유희란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저자는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유품」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 책에는 모두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밤하늘이 강처럼 흘렀다」에는 장루주머니를 차고 살아야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장루주머니 지원 확대를 요구하는 일인시위를 펼치기도 하는 등 현실의 제약들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그의 조카가 장애를 가진 사람과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조카의 연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 채 그 만남을 반대한다. 숨겨져 있던, 혹은 외면했던 진실이 드러나는 때는 죽음의 순간과도 맞붙어 있다. 이 작품은 이모와 '나'의 관계, 둘 사이에 드리워진 비밀이 천천히 밝혀지는 쪽으로 나아간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에피소드가 덧붙여진다. '나'와 "직각으로 굳어버린 팔"을 가진 그와의 연애-이별담이다. 작품은 이와 같은 세 개의 서사 층위가 얽히면서 작동한다. 이것은 유희란 단편의 인장이라 할 만하다. 위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보통 세 가지(표층 중간층 심층)을 설정하고 동시에 구동하여 하나의 전언으로 수렴시킨다. 이 소설의 경우는 다음 문장이다. "유기체들은 자기들에게 쳐들어오는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함으로써 손상이나 파멸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장루 주머니, 복지 혜택이 부족하다.’ ‘요양병원 입소 거부 부당하다.’ ‘장루 관리가 가능한 의료기관이나

시설이 너무 없다.’ 매주 목요일 보건소 앞에서 가끔은 구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어떤 날은 이렇게도 썼다. ‘화장실에 세척시설 설치 요구합니다.’ 대부분은 관심이 없었고 오다가다 그녀를 보게 된 사람들은 문구를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누군가의 생명입니다. 살려주세요.’ ‘배변 주머니는 수치일 수 없습니다.’ 이따금 피켓에는 그처럼 노골적인 문구가 쓰였다 지워졌다.

어떤 이들은 장루 주머니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외면했고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그래서 피켓을 들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짐작이라도 해보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 「밤하늘이 강처럼 흘렀다」 중에서



「유품」은 저자의 등단작이다. 당시 심사위원(현길언, 권영민)으로부터 "인간의 존재론적인 고독의 문제를 세상을 떠난 독거자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섬세하면서 깊이 있게 처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김새별, 청림출판, 2015)이라는 유품정리사의 에세이가 화제가 된 적도 있지만, 이보다 앞서 저자는 유품정리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발표한 것이다. 죽음과 삶을 명징하게 연결 짓는 것이 저자가 쓴 작품의 특징이다. 이는 죽은 이가 남긴 물건을 치우는 일을 하는 '내'가 임신부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나'는 또 다른 생명을 품은 채, '시취'가 풍기는 망자의 집을 드나든다. 죽음과 삶이 분리돼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 소설이 "산다는 게 뭔지 아나?"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유품」에서 '기다리는 일'이라고 답한다. 사람이나 때를 기다리는 삶의 형태는 「사진을 남기는 사람」에서 구체화되는데, 그것이 사진 예술이다. 이 작품에는 프레데릭 보머, 윌리 로니스, 로버트 카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론이 거론된다. 그중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대목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거북이를 찍기 위해 거북이 자세로 온종일 기다려야 했거든요. 멀리서 기다리는 일이 그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기다릴 수 있게 되었을 땐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을 테지요." 점점 기다리는 일과 연동하는 삶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뭔가를 다퉈 얻어내려 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체로 우리는 그 싸움에서 패배하고 마니까.


「천장지비」는 기다리는 일로서의 삶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박 씨는 다락방을 "하늘과 땅속에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염원"을 이룰 수 있는 "천장지비의 터"라고 여긴다. 그녀가 바라는 바는 죽은 남자의 부활이다. 공이의 아버지이자 박 씨의 남편인 그는 사고사했다. "흙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사망했으니 사고사는 맞는 표현 같지만, 실은 틀린 표현이다. 성냥공장을 운영하던 남자는 법적으로 승소할 가망이 없는 철거 명령에 저항하다 죽었다. 귀신을 보고 미래를 점치는 무당 박 씨도 철거계고장을 내세워 집을 밀고 들어오는 굴착기 앞에 무력하다. 샤머니즘은 의식을 치르면서 기다리다보면 사자(死者)를 산 자로 되돌릴 수 있다고는 약속해도, 무작정 기다리다보면 산 자의 삶이 차츰 나아질 거라는 약속은 감히 하지 못한다.

공이는 이곳에서 남자의 시신을 처음 보았다. 다른 자리에 비해 낮은 이 층이었으나 키 작은 공이에게는 계단에 발을 디딜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높은 곳이었다. 누군가는 지붕과 반자 사이의 공간에 들인 다락방이라고 불렀으나 박씨는 천장지비(天藏地秘)의 터라 여겼다. 하늘과 땅속에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염원과도 같아 환생을 이루기에 모자람이 없고 산천의 이로운 기가 머물러 유골을 묻으면 노랗게 황골(黃骨)이 되어 수천 년까지도 형태가 변하지 않을 곳이라고 믿었다.

- 「천장지비」 중에서



의류 디자이너를 제재로 한 소설 두 편이 나란히 배치돼 있다는 점은 유희란 소설집에서 특기할 만하다. 문학평론가 허희는 두 가지 연유가 있는 듯하다고 이 소설집 뒷 부분에 있는 「발문」을 통해 살펴본다. 책에 따르면 첫 번째 까닭을 「이제」에서 찾을 수 있다. 패션에 감춰진 함의를 여자가 짚어내는 대목이다. "변장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나를 표현하지만, 의도적으로 내 이미지를 완전히 바꿀 수 있어요. 변신이기도 한 거죠. 예를 들어 레이어링 기법에 뛰어난 사람이 있어요. 옷을 겹쳐 입듯이 자신을 보이지 않도록 위장하는 거예요. (...) 나도 변장하는 걸까요. 메타모르포제. 인위적으로 이미지를 바꾸는 거예요. 당신 앞에선 내가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 달라요. 당신과 유사한 사람이 되거나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성격마저 송두리째 바꾸고 싶은 상태가 된 거 같아요." 여자는 옷을 입는다는 것을 진짜 나를 숨기려는 변장과 변신이라고 역설한다. 실제로 패션에는 이런 꾸밈의 속성이 강력하다. 여자는 남자와 있을 때 자신도 이처럼 바뀌는지 모르겠다고 부연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기 위해." 하지만 옷은 상처를 가릴 순 있어도 치유하진 못한다. 위장으로 잇는 삶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저자가 의류 디자이너를 제제로 한 소설을 쓰는 두 번째 까닭은 「셔츠」에서 찾을 수 있다. 텔레비전 다큐에 출연한 수의 제작자가 하는 말을 통해서다. "죽음을 슬프다고 생각하면 저는 슬픈 옷을 만드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수의를 지을 때는 가시는 길에 막힘이 없으라고 실의 매듭을 짓지 않으며, 빈손으로 간다는 뜻에서 주머니를 만들지 않아요." '나' 역시 수의 제작자와 비슷한 마음으로 셔츠를 만든다. '나'에게 옷은 한 사람에게 정확히 맞춰진, 그리하여 그의 이니셜을 새기고, 그 옷을 입고 지낼 그의 안녕을 비는 유일무이한 핸드메이드다. 정작 의뢰인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의 신체 사이즈를 '나'는 꼼꼼하게 파악한다. 그러면서 의뢰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감지해내기도 한다. 옷이 그의 위장술이라는 「이제」의 여자와 달리, '나'에게 옷은 그를 향한 포용술이다. 안 그랬다면 '나'는 가슴에 가시박이 자라는, 고통을 제 몸 안에 품고 사는 정기훈과도 인연을 맺지 않았으리라. 그가 주문한 셔츠의 완성은 거듭 수정되고 유예됐으나, 대신해 '나'는 그의 고통을 감싸 안았다. 포용으로 잇는 삼을 파국을 비껴난다.



2013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저자는 당선 소감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을 살아가며 진실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일까. 시간의 흐름을 겪은 후 어느 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일. 아마도 그럴 것이다. (...) 가족은 내게 말한다. 아픈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슬프지 않은 이야기를 쓰기를 바란다고. 때리고 후벼 파고 매달렸던 그 무엇. 나는 유독 그러한 것에 관해 쓰고자 했는지 모른다." 저자의 당선 소감을 짧게나마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이것이 그로부터 8년 뒤 출간하는 첫 소설집 『사진을 남기는 사람』에 다가갈 유용한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따뜻하고 행복한 이야기들이 나의 인상에 남기를 원한다."라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지만, 이후 저자가 쓴 소설들은 보다시피 '아픈 사람이 등장하는 슬픈 이야기'로 채워졌다. "때리고 후벼 파고 매달렸던 그 무엇"이 다른 것으로 그리 쉽게 대치될 수 없음을 다시 확인한다. 다소 변화가 있더라도 작가의 문학적 스타일은 작가의 얼굴만큼 고유하다.

저자 : 유희란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유품」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았다. 소설집 『사진을 남기는 사람』을 써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