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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도시 - 공간의 쓸모와 그 아름다움에 관하여
이규빈 지음 / 샘터사 / 2021년 6월
평점 :
건축가란 한정된 공간을 예술과 실용을 모두 구현해내는 사람이다. 그들은 예술가이기에 영감을 중요시하고 실용적인 공간 창출자이기에 기술의 중요성도 도외시할 수 없다.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하고, 예술을 기술에 적용시켜 아름다운 실용적 건축물을 설계하기도 한다. 이 책 『건축가의 도시』의 저자 이규빈은 건축가이다. 아직은 자신의 이름을 앞세울 만한 건축물을 설계할 기회를 갖지 못한 젊은 건축가이지만 그의 건축에 대한 이해는 어느 유명 건축가에 비해 좁거나 낮지 않다.
그는 건축가로서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공간을 완성하려면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건축 계획안을 그려낼 수 있었던 원동력을 건축적인 영감이나 부지런한 손이 아닌, 중국 현지 조사를 할 때 음식 한 접시로 주민들과 교감했던 진심이라고 말한다. 세계 곳곳의 삶의 현장을 치열하게 돌아보며 공간과 건축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나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도 여행은 건축 설계에 영감을 준 최고의 수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세계의 도시들을 출장과 여행으로 오가며 기록한 글과 사진에서 우리는 낯선 도시와 공간을 바라보는 건축가의 시선을 살펴볼 수 있다. 최고의 여행 메이트는 건축가라는 말이 있다. 여행이란 새로운 도시를 거닐고 건축을 돌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세계의 낯선 도시들을 건축가와 함께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의 난징 대학살 기념관은 건축물의 재료나 입면, 설계 구성 등에 날카롭고 불편한 형태를 차용함으로써 공간이 지닌 진실과 슬픔의 무게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9·11 추모공원 및 기념관은 겉으로 드러나는 건축도 기념비도 없지만 ‘빈자리’와 ‘부재의 풍경’으로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인간의 슬픔이 창의적인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시간들을 상기시켜준다.
라 투레트, 생폴 드 모졸, 세낭크 수도원은 프랑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장소이다. 수도원이 간직해야 할 영성은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지운 수도원을 오르내리며 인간은 경건을 준비하고 경건을 내려놓는다. 어디까지가 지형이고 어디까지가 건축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고흐드의 절경은 그 존재만으로 영성이다. 저자는 프랑스 수도원 기행을 통해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자연을 통해 조화와 비례와 균형을 얻는다고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혹은 우리가 여행한 공간을 만나고 이해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렇다면 건축물과 도시를 설계하고 만드는 건축가는 이 공간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이 책은 우리가 서 있거나 여행했거나 가고픈 그곳, 그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 중국, 미국, 브라질, 프랑스 등 다섯 개 나라의 건축과 도시에 대한 글은 고유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저자는 단순히 건축물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그 공간이 지닌 역사적 배경과 의미, 그리고 그곳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다른 건축 기법과 설계 방향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는 다양한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저자가 그린 사십여 장의 설계 도면과 건축물의 세밀한 미학을 포착해낸 사진도 주목할 만하다. 건축과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탄생한 공간은 어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지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진과 설계 도면은 독립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일련의 상호성 속에서 우리의 지평을 확장해준다.
건축은 단단하고 도시는 거대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건축과 도시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 쉽게 착각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일생이 건축과 도시의 시간보다 터무니없이 짧기 때문이다. 사람이 변하면 시대가 변하듯 건축과 도시 또한 늘 변화한다. 1985년 민주화를 맞이한 브라질. 고국으로 돌아온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기고 2012년 104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건축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며 좌절했던 그의 건축물에는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진이 걸려 있다.
건축가는 여느 사람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여느 사람에게 유리는 그냥 유리이지만 건축가에게 유리는 투명성과 반사성을 지닌 마법과도 같은 건축 재료인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건축물의 내밀한 이야기를 건축가의 시선으로 들려준다.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건축물에는 미학적 완성도를 넘어 인간이 깃들어 있고, 자연이 깃들어 있고, 끝끝내 기억되어야 할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 책 속에 나오는 건축물과 건축들의 다양한 도면들을 보면서, 건축이란 학문 자체가 참으로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건축은 의식주(衣食住) 3요소 가운데서 주거에 해당된다. 옷이 있고, 음식이 있어도 추위와 더위를 막아 줄 공간이 없다면,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건축은 건축학개론 첫 번째 과제에서 보듯이 집을 그리고 짓는 것을 의미한다. 줄자를 가지고 이곳저곳 치수를 재면서 모눈종이 위에 선을 이리저리 긋고 이어서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건축물의 도면이 뚝딱하고 완성된다. 그 도면을 토대로, 땅 위에 설계대로 시공하면 종이 속 그림이 실제 땅 위에 건축물로 탄생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건축이고 건축학이다.
건축과 전시는 모두 공간을 다루는 것이기에 닮은 점이 참 많다. 공간, 빛, 동선, 재료 따위를 세밀하게 다루고 조정하는 일이며 도면이라는 도구를 통해 설계되고 누군가에 의해 시공되어야만 비로소 세상 앞에 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는데 바로 ‘호흡’이다.(p. 82)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도 감동을 주지만 멋진 건축물은 경이롭다는 느낌까지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외국이나 낯선 도시를 가면 건축물은 제 1 관심의 대상이다. 정복자들은 찬란한 업적과 문명의 힘을 건축물로 대신하는 것이 인간의 건축에 대한 인식이다. 이런 건물은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점이 강조되는 건축물도 많다. 어떤 점을 강조할지는 건축가의 손에 달려 있다. 그들의 의식 속의 영감이나 예술 감성을 건축물로 구현해내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건축가들은 이 때문에 우리의 주거문화를 편리하게 해주는 실용적인 면보다 예술가라는 미적 감각이 더 우수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 책은 젊은 건축가 이규빈이 일본, 중국, 브라질, 프랑스, 미국을 오가면서 건축가의 눈으로 본 건축물들의 이야기, 건축물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 생각, 건축가로 살면서 경험한 것들을 벽돌 한 장 한 장 쌓듯이 글로 담았다. 건축가 입장에서 건축물의 아쉬운 점, 훌륭한 부분 등을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면서 담담하게 써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와 모니터 앞으로 다시 출근했다. 도면에 미처 옮겨지지 못한 나의 미련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보고, 듣고, 지은 건축과 도시에 대한 증언을 써 내려갔다. 생각은 한 장 벽돌에 담기면 건축이 되고 한 줄 문장에 담기면 글이 된다. 그래서 이 책은 나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건축’이다.(p. 10)
책 속의 수많은 도면은 건축물의 보이지 않는 공간을 다양한 측면, 시각에서 보여주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공간에 대해서도 그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질지 미리 예측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도면을 통해 닝고 역사박물관이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고, 세계무역센터의 내부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또 그레이스 팜스의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일본, 중국, 미국, 브라질, 프랑스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의 건축물 중에서도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건축물들에 대해 많은 정보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큰 수확이다. 이 책에 나온 건축물의 작은 일부는 여행을 가서 직접 본 적이 있지만 대부분은 처음 본 것인데도 저자의 설명을 읽으면서 함께 보니 낯설지 않고 직접 가서 본 것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게 돼 건축물의 예술성과 실용성, 역사성과 문화성 등이 모두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저자의 친절한 배려도 느낄 수 있다.
세낭크와 고흐드는 모두 거기에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축이었다. 어쩌면 인간은 그저 자연 앞에서 주어진 소명대로 건축을 완수하는 역할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가끔 건축하며 자연과 대립해야 할 순간마다 세낭크에서 혹은 고흐드에서 마주했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자연 앞에서 겸손할 때 비로소 좋은 건축이 만들어지리라 믿는다.(p. 295)
저자 : 이규빈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건축가 승효상의 사무실 ‘이로재’에서 건축과 검도를 수련 중이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스페인 마드리드건축학교에서 수학했고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및 한국건축가협회로부터 ‘젊은 건축가 펠로십’을 받았다. ‘새들의 수도원’, ‘부산 롯데타워’,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 ‘성뒤마을’ 등 다수의 설계를 담당했다. 2021년부터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 출강하여 건축설계를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30여 개국을 일과 여행으로 오고 가며 낯선 도시에서의 생각과 경험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