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건축은 어떻게 전쟁을 기억하는가 - 에펠탑에서 콜로세움까지
이상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7월
평점 :
인간의 가장 최악의 경쟁이자 충돌은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 승전국은 모든 것을 얻고 패전국은 모든 것을 잃는다. 국가 단위의 전쟁은 국가와 국민의 존립을 걸고 전쟁을 벌이기 때문에 패전국의 국민들은 죽음이냐 영광이냐의 갈림길에 선다. 힘이 있고 운이 좋아 승전국이 되면 앞으로 생산물이 나올 땅, 노동력을 가진 노예가 확보될 뿐만 아니라 패전국의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다. 전쟁은 인류가 문명을 세우고 국가를 갖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주로 의식주의 해결을 위해서다. 당시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먹을 것에는 일상의 음식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먹고 마시는 대부분이 포함된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전쟁에 지면 죽거나 노예가 된다. 후일을 위한 위험요소를 없애기 위해서다. 전승국은 패전국의 모든 것을 소유한다.
먹고 마시는 것 외에 앞으로 먹을 것을 만들어낼 땅도 전승국의 소유가 된다. 패전의 노예(주로 여자나 어린이)들은 향후 생산의 노동력을 댓가 없이 제공해야 한다. 말 그대로 종족의 후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한 삶을 이어가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전쟁은 모든 것을 건 인간의 마지막 경쟁이다. 독자의 전쟁관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만 최소한 전쟁의 목적에는 포함될 것으로 본다.
이 책 『건축은 어떻게 전쟁을 기억하는가』는 저자 이상미가 대부분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건축물을 통해 본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는 독특한 전쟁사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서양사에서 굵직한 획을 그은 전쟁을 치른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에 있는 28개 건축물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전쟁의 역사를 살펴본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가장 최근의 냉전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대와 현대의 전쟁사를 아우르면서, 관광 명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 대비용 성이나 요새까지 두루 소개하며 건축물에 얽힌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건축물만큼 인간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대상도 드물다. 그럼에도 우리는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쉽게 찬양하지만 여기에 숨겨진 뒷이야기, 특히 인류의 역사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전쟁의 역사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에 직접적으로 쓰였든 그렇지 않았든, 지은 지 오래된 건축물엔 어느 한 구석에라도 전쟁의 흔적이 새겨지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세계사를 비롯해 전쟁사와 건축사를 각각 다룬 책은 적지 않지만, 전쟁과 건축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살펴보는 책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침묵하지만 ‘전쟁의 생존자’나 다름없는 건축은 마치 한 생명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전쟁은 잊히는 반면, 건축물은 부서지고 깨어져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에게 지난한 전쟁의 역사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힘의 균형이 깨질 때 주로 일어나며 자신들의 힘이 작은데도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는 없다. 국가의 존립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명, 살아남은 자들의 신분들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힘이 있을 때만 전쟁을 일으킨다. 만일 당장 힘이 없다면 겉으로는 평화를 주장하지만 전쟁에 필요한 국력을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강대국이 자리를 바꿔가며 대륙의 주인이 바뀐 유럽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명한 건축물과도 꽤 깊은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건축을 통한 전쟁사를 쓰는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전쟁은 국가나 힘 있는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가장 거대하고 극단적인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시대마다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곤 했으며, 승자와 패자의 운명이 극명히 갈리거나 때로 뒤집히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성의 민낯과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이 건축물에 자연스레 투영되었다. 승전을 기념하는 전승 기념탑과 개선문, 전쟁의 참상과 아픔을 기억하자는 뜻에서 지은 추모관 등이 대표적인 예다. ‘프랑스 파리’하면 떠오르는 에투알개선문은 나폴레옹이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리한 모든 영광을 기리기 위해 또 다른 개선문인 로마의 티투스개선문을 본떠 지었다. 하지만 이 개선문조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독일군이 그 아래로 행진하는 수모를 당한 바 있다. 에투알개선문의 모델이 된 티투스개선문엔 2,000년에 달하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 개선문은 로마인에게는 승전의 기쁨이지만, 유대인에게는 세계를 떠도는 기나긴 역사가 시작된 아프기 이를 데 없는 건축물이다.
그런가 하면 이 책에서는 전쟁사의 어두운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 제국주의의 그림자도 읽어낸다. 사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은 나폴레옹의 야욕과 집착의 산물이었으며, 영국의 대영박물관은 이집트나 그리스 등의 약탈 문화재로 채워져 자국보다 다른 나라의 유물을 더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우리는 역사책을 통해 전쟁을 단편적으로만 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은 건축물에 숨겨진 역사를 들여다보면, 승전과 패전이라는 결과로 판가름 나는 듯한 전쟁사도 그리 단순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건축물엔 생명이 없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증축과 개축, 전쟁을 만나 무너지기도 하는 과정을 살펴보다 보면 건축물이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축소해놓은 것 같기도 하고, 길어야 100년 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다. 특히 전쟁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지나온 건축물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누군가의 얼굴 같아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건축물 중에서 유독 긴 여운을 남기는 건축물은 가장 최근에 일어난 전쟁이자 엄청난 사상자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 전쟁으로 인해 지어진 지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여럿 부서지거나 피해를 입었다. 베를린의 한복판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와 노이에 바헤가 대표적인데,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인 독일 정부가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과거사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부서진 종탑을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노이헤 바헤엔 전쟁터에서 아들과 손자를 모두 잃은 독일의 예술가 케테 콜비츠가 만든 조각 〈피에타〉가 있다. 오늘날 베를린 시민들이 ‘빠진 이’ 또는 ‘깨진 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기념교회의 깨진 지붕,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내리쬐는 한 줄기 빛에 의지해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슬픔을 삼키는 어머니의 동상은 전쟁이 남긴 뼈아픈 상흔 그 자체다.
한편 독일 건축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드레스덴 성모교회는 모두가 복원할 수 없다고 여길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되었음에도, 시민들이 하나둘 어렵사리 수집한 건물의 잔해를 모아 옛 모습을 기적적으로 되찾은 경우다. 이러한 건축물은 보이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우기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증언자나 다름없다.
전쟁과 관련된 건축을 다룬 만큼 이 책엔 좀처럼 조명되지 않은 각국의 요새나 성채 등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 많이 수록되었다. 이 중에는 ‘최후의 보루’를 뜻하는 대명사로 우리에게 친숙한 프랑스의 마지노선과, 연합군 34만 명을 구한 세기의 구출 작전인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펼쳐진 도버성 같은 영국 각지의 성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건축물에 얽힌 전쟁의 역사다. 파리의 랜드마크이자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을 비롯해 작가 빅토르 위고와 마크 트웨인이 찬미할 정도로 아름답기로 이름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성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건축물이라고 해서 전쟁의 참화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 경우엔 유명하거나 가치가 높을수록 건축물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 이들 덕분에 가까스로 전쟁을 피했거나, 파괴되었어도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사람의 땀과 노력으로 복원되었다.
에펠탑이 파괴되지 않은 것은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긴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의 용기였으며, 예르미타시박물관을 지킨 것은 전쟁 통에 굶어 죽어가면서도 박물관을 사수한 직원들의 노력이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관광객으로 북적이지만 이 책을 통해 이 건축물들이 겪은 수난의 시간을 알게 되면, 주로 관광 명소로만 알려진 이곳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또 검투사들의 피 튀기는 싸움터로만 알려진 콜로세움에서 모의해전을 치렀다든지, 런던의 명물 런던탑이 왜 매년 빨간 양귀비로 장식되는지 등 일반적인 역사책에서는 만나기 힘든, 전쟁과 관련된 건축물의 뒷이야기를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전쟁사 역시 우연과 필연이 엮여 만들어진 거대한 드라마와 같다.
특히 이 책엔 전쟁이라는 극심한 풍파를 이겨낸 건축물이 여럿 등장한다. 성 베네딕토가 설립한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몬테카시노수도원은 무려 5번 파괴되고 5번 재건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지금도 탄흔과 그을린 흔적이 역력한 건축물을 살펴보다 보면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벽과 기둥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하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말이 없지만 이들이 품은 시간의 무게와 울림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인간은 겪을 수 없는 시간이 건축물에 녹아 있어서일 것이다. 저자는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견뎌낸 건축물을 통해 모색해볼 수도 있다며, 전쟁에서 생존한 건축물을 말하는 이 책이 오늘날 우리가 부딪혀야 할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는 나침반이 되어주길 희망한다.
실제로 과거에 치열한 전쟁터였던 건축물 중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거나 다 같이 행복하게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바뀐 곳이 많다. 살육의 현장이었던 콜로세움은 현재 사형제도의 폐지를 외치는 국제적인 캠페인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으며,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성에서는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목적으로 매년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이 열린다. 피비린내와 포화가 가시지 않던 전쟁의 장이 평화를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우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전쟁의 상징이었던 건축물이 반전(反戰)의 기념비로 우리 곁에 우뚝 서게 된 것은 역사의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조용하지만 큰 변화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전쟁과 건축물은 지나온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남겨 교훈으로 삼기를 바라지만 지금 이 시각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티투스개선문은 2,000년 가까이 이어진 로마제국의 영광과 유대인의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건축물이다. 예루살렘성전 파괴로 유대인들은 고향을 떠나 세계로 떠도는 ‘디아스포라Diaspora’를 2,000년 가까이 한다. 티투스개선문으로 전쟁사에 뚜렷이 남은 티투스 황제의 예루살렘성전 파괴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20세기 히틀러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도 일어날 리 없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기에 오늘날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며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있는 중동의 평화를 바랄 뿐이다.
- p.259, 「티투스개선문 - 로마인에게는 기쁨, 유대인에게는 아픔」중에서
저자 : 이상미
2009년 파리 고등예술연구원IESA 예술경영학과를, 2012년 파리 고등연구실습원EPHE 서양예술사와 고고학 석사과정을 모두 최우수생으로 졸업하고, 2014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예술과 언어 박사과정을 수료하는 등 프랑스에서 예술 전반의 기본기를 닦았다. 2010년 프랑스 정부 산하 문화통신부에서 프랑스 문화재 감정과 문화재 서비스 전문가 자격증을 취득했다.
학업을 마친 뒤 파리의 현대미술 갤러리와 감정사 연구소, 유럽 상위의 미술 경매 회사 등에서 다년간 쌓은 현장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급변하는 미술시장에 대처하는 실질적인 노하우를 익혔다. 2016년 이상미술연구소를 설립해 문화재와 예술 작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인과 집단의 문화 활동이나 문화유산이 경제적 가치와 특정한 정치적 입장 등에 따라 획일화되는 것을 막는 전문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는 전시기획사인 이상아트(주)의 대표이사이자 전시 공간인 이상아트 스페이스를 운영하면서 국내 작가들에게 다양한 전시 기회를 제공하며 예술감독, 전시기획자, 칼럼니스트, 작가, 강연자 등으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