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 조선의 586 - 그들은 나라를 어떻게 바꿨나?
유성운 지음 / 이다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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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우리는 ‘후조선’을 살고 있다는 체념어린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헬조선'이었다가 지금은 '후조선'으로 바뀌었다. 신분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부와 학벌과 계급이 세습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명분과 도덕을 앞세워 집권한 뒤 현실을 외면하고 실리는 챙기지 못하는 현 집권층에 대한 경고와 분노다. 이는 이 책 『사림, 조선의 586 그들은 나라를 어떻게 바꿨나?』 저자 유성운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앞에서는 너무나 당당하면서 중국 앞에서는 움츠러들고, 각종 규제로 꽁꽁 묶어 집값을 폭등시키고, 가붕개로 만족하고 살자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화려한 스펙을 쌓아주기 바쁜 그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다. 오늘날의 586과 조선의 사림을 빗대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조선의 무능한 양반 지배층들을 비판하며 오늘날 정권을 잡은 주축 세력인 '586 집권 세력'의 무능과 지도력에 타격을 가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고려 권문세족들의 부패를 비판하며 자신들을 차별화했지만, 조선을 성리학 세계로 바꿔놓은 뒤에는 자신들만의 특권과 이권을 챙기는 데 몰두했다. 지금의 586 집권 세력이 똑같은 우를 반복하고 있다는 데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저자는 「프롤로그 : 누가 대한민국을 '후조선'으로 만들었나?」를 통해 자신이 한때 '묻따민'이었다고 고백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민주당을 찍는다'란 의미의 신조어까지 동원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희망돼지'를 들고 캠퍼스를 누볐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대학 졸업 후 신문사에 입사해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른바 운동권의 이분법적 시각, 한나라당에 대한 헐뜻음(?)의 지나친 정도에 따라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많이 당황햐고 당혹스러웠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민주주의 정당이라면서 김대중 노무현 정신이라는 것을 앞세우고 이것은 무오류고,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는 식으로 비판을 허용하지 않은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덧붙인다. 또한 이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워 의견이 다른 상대를 마치 사문난적처럼 다루는 것도 민주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조선 사림의 당파를 보는 듯했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탈(脫)민주당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경험의 유무를 떠나서, 저자의 생각이 옳든 그르든 이 책은 민주당의 586 집권 세력을 조선의 반민중적 정권 유지의 '사림'에 빗대고 있다.



조선 사림은 일부 긍정적 기여도 있지만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중화주의에 빠져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는 눈과 귀를 닫은 채, 상업을 죄악시하며 나라 전체를 가난하게 만들고, 무인을 천시해 국방을 약화시키고, 신분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 노비는 늘리고, 자신들의 특권을 대대로 보장해줄 ‘성스러운’ 족보 만들기에 골몰한 세력으로 폄하한다. 저자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은 더 깊은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조선이 처음부터 이런 나라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는 신분제도 느슨했고, 여성의 재혼도 인정했으며, 국방력을 중시했던 역동적인 시대였다. 그랬던 조선을 바꿔놓은 것은 사림이다. 《소학》의 가르침을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원리주의자 사림 세력은 조선 건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성리학의 종주로 만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이후 정계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실력이 아니라 절의를 기준으로 세워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세력은 ‘소인’이나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였다. 또한 ‘중화(中華)’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해 망한 명나라의 복수를 해야 한다며 나라 전체를 이념화, 교조화시켰다."고 이유를 열거했다.



책에 따르면 대체로 조선의 사림은 여말선초 무렵 조선의 건국에 반대해 지방으로 낙향한 지식인들의 후예이다. 중소 지주 출신인 이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지역에서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고, 조선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로 진출한다. 성리학에 대한 강력한 실천 의지를 가지고 '소학'을 중시했다. 그런데 당시 훈구 세력과 충돌해 네 차례 사화를 입으며 타격을 입었지만 선조 때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조선을 세운 세력도, 훈구 세력도, 사림 세력도 모두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이다. 하지만 조선 초기의 지도층이 성리학을 국가 통치에 유용한 도구로 생각했다면, 사림은 성리학이 사회 밑바닥까지 스며들어 모든 곳에서 적용되는 절대적 이념으로 생각했다.

​​조선의 사림은 1519년 11월의 밤, 기묘사화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중종 14년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는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들을 숙청하게 된다. 당시 중종의 오른팔이자 개혁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던 조광조와 그 세력이 하룻밤에 몰락했다. 조광조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은 사림계의 기대주였다. 20대에 진사 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할 때부터 학문 수준이 높다는 평이 자자했다. 조광조를 가르친 김굉필은 우모사화의 시발점이 된 김종직의 제자였다. 조광조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중종 역시 조광조를 신뢰했다. 사림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결집했고 훗날 기묘사화로 숙청되기에 이들을 기묘사림이라고 부르게 된다. 조광조는 현량과를 설치했는데 이는 기존 인재 등용 방식을 전면 부정한 것으로 가묘사림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정책이다. 사림이 장악해야 할 거점으로 삼은 것은 삼사였다. 성리학적 기풍을 진작하고 새로운 정치를 열고자 했던 성종은 삼사를 적극 후원했고 사림은 삼사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현량과는 추천제로 무엇보다도 과정과 결과의 불공정 가능성이 지적됐다. 그럼에도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줬고 현량과가 실시됐다. 현량과에 대한 세간에서 지적했던 불공정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고 현량과에 합격한 28명 중 절반이 당시 청요직이라 불린 대간이나 홍문관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뜻이 같으면 천거를 하고 뜻이 다르면 배척을 하게 된다.



조선 사림이 수양대군의 쿠데타였던 계유정난에 분노하고, 기묘사화라는 탄압을 통해 도덕적 명분을 획득하고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586은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에 분노하고, 5.18과 1987년 민주화운동을 통해 명분을 얻고 정치 세력화에 성공했다. 조선 건국에 반대한 정몽주 등 재야 세력을 복권시키고 국가적 공인을 받기 위해 투쟁했던 사림은 정권을 잡은 뒤엔 자신들만 ‘정의로운 세력’이고 건국에 참여한 세력은 ‘불의한 세력’으로 끌어내렸다. 586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인사들을 ‘항일민족주의자’로 평가하고, 건국에 참여한 이들은 ‘친일친미반민족세력’으로 매도하고 있다.

조선 초기 공신들의 부패와 탐욕을 성토했던 사림은 집권 후에 그에 못지않은 특권을 향유했고, 자신들의 불의와 영달에 대한 지적에는 “예전에도 그랬다”라고 변명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불통을 비판했던 문재인 정부는 역대 최다의 청문보고서 없는 임명 강행과 4대강보다 많은 가덕도신공항 예산을 예비타당성조사 없이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집권 이후 정의와 도덕을 독점한 것처럼 의기양양했던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이제 ‘내로남불’의 상징이 됐다.



저자는 책을 통해 사림이 정치 세력으로 대두하는 과정과 집권 후 조선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보여주면서 586의 나라가 된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을 짚고 있다. 마치 둘로 쪼개진 거울을 하나로 맞추는 것 같은 유사한 흐름을 보면서 지금 우리 앞에 ‘후조선’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경각심을 주고 있다.

실력보다 계보를 따지고, 집권자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 윽박지르고,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무덤을 찾아 ‘계승’을 맹세하고, 중화주의에 쩔쩔매는 조선의 잔재를 이제는 청산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한 사람의 양심에 의한 비평인지, 이념에 따른 비판인지를 가리기에는 독자의 지식이나 생각이 너무 짧은 것이 안타까울 뿐 찬반의 입장을 밝히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게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저자 : 유성운

고려대학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서 문화부-정치부-사회부를 거쳤다. 대학원까지 역사 공부를 이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문화부에서 학술 분야를 담당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기자 생활 15년의 절반을 정치부에서만 보냈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원에서는 마음을 바꾸어서 기후환경학을 공부했다. 정치부와 문화부를 거치며 〈중앙일보〉 지면과 온라인에 ‘유성운의 역사정치’, ‘역(歷)발상’, ‘역지사지’ 등 역사 관련 칼럼을 연재했다. 《사림, 조선의 586》,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을 펴냈고, 《고지도로 보는 유토피아 상식도감》을 우리말로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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