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지음, 백지민 옮김 / 푸른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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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는 1980년대 초반 폴란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무렵 폴란드는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이루고 있었으며 구 소련의 연방국으로 전락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소련에 의해 강제 병합된 체제다. 미소의 극한 냉전 대립으로 소련의 경제력이 미국에 압도적으로 뒤지면서 소련의 경제공동체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국가 배급제인 식료품 및 생필품 부족으로 시위가 일어나자 1981년 12월 13일 게엄령이 선포된다. 소설은 게임령이 선포되기 일년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늘 아침, 12월 13일부로 사회주의 공화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어씃ㅂ니다. 이번 조치의 배경으로는 민주와 운동권에서 몇 주간 전개한 파업과 데모는 물론, 공산권 사상 최초의 독립 노조인 솔리다르노시치...... 의 혜성과 같은 세력 확장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됩니다. 폴란드 정부 측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극단적인 조치를 연이어 공표했습니다. 이에 초중고교와 대학교가 폐쇄되고 국경이 봉쇄되었으며, 시민들에게는 야간통행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p. 10)



사회주의 체제하의 폴란드는 늘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해 소련에 의한 공급과 지원에 의존할 정도로 국가 경제가 몰락해갈 무렵이어서 국민경제는 더할 나위 없이 어려운 때이기도 하다. 이를 배경으로 한 퀴어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라니 상상하기 어려웠으나 작품 전반에 깔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에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청년 루드비크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농촌활동에 참가했다가 눈을 뗄 수 없는 청년 야누시를 만난다. 그리고 누군가를 갈망해본 이라면 알고 있을 그 익숙한 감정에 휩싸인다. 우연히 강가에서 만나 친해진 루드비크와 야누시는 농촌활동이 끝나고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꽉 막힌 사회와 그들을 옭아맨 굴레에서 벗어나 몇 주 동안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한껏 자유와 여유를 즐긴 두 사람이 돌아온 바르샤바는 떠나기 전과 같았다. 루드비크와 야누시는 억압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마음을 눈치챈다. 루드비크는 박사과정 진학이 좌절될 위기에 놓이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반면 야누시는 다른 이가 내민 손을 잡는다.



소설은 지금 미국 뉴욕에 있는 ‘나’인 루드비크가 지난 날의 연인이자 사랑이었던 ‘너’ 야누시에게 마음속으로 편지글을 읊조리듯 나아간다. 작품 전반에 아련하고도 우수 어린 분위기가 깔려 있으며, 두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 모든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자연 속에서 즐기는 모습은 여행 후에 두 사람을 맞이하는 처참한 사회주의 바르샤바의 일상과 대비를 이루어 더욱 애처롭고 안타깝다.

자연 속 빛나는 호숫가에서 두 사람은 오직 서로를 갈망하지만, 회색빛 도시로 돌아온 이후에 두 사람의 열망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모습은 자연과 도시, 자유와 억압 사이의 색채를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결국 ‘나’와 ‘너’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갈망을 좇아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은 저자의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전에 가까운 구성과 간결하고도 시적인 문체로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역설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고, 몰입도를 높이도록 문장 이음새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유려하다.



줄거리는 대략 주인공인 한 소년이 또 다른 한 소년을 사랑하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퀴어소설'로서만 이 소설이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의 2차 세계대전 전후 시대상과 사회주의 체제와 그 시절 사람들의 고민이 너무 잘 드러나 있다. 독자가 이 소설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공산주의 사회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관심이다.

때는 1981년 한 해 마지막달 추위에 휩싸인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배급 줄을 선다. 독일령이었다가 폴란드가 된 마을도 있고, 폴란드였는데 러시아가 된 마을도 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이리 저리 흩어졌다. 주인공인 루드비크는 9살 때 유대인 소년을 좋아했지만, 그 친구가 이스라엘로 떠나버린 경험이 있다. 남자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시기가 그때쯤이다. 이후 대학 마지막학기 때 강제로 노역해야 하는 노동봉사에서 야누시를 만난다. 좋아하게 되고, 같이 성을 즐기는 사이가 된다. 두 사람은 호숫가에서 수영을 하고 둘만의 밀회의 시간을 갖는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으로 내 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하자 급박한 숨결이 얼굴에 와 닿았다. 내 심장은 아예 가슴을 뚫고 나오기 직전이었다. 다급하면서도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가 내 바지 혁대를 끄르고 꺼낸 내 OO은 낯선 손가락과 여름 공기의 감촉에 반응했다. 그는 무릎을 꿇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따스한 동굴 같은 입으로 나를 감쌌다."(p. 49)

서로 사랑하게된 야누시와 루드비크는 여러 가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의견이 안맞기도 한다. 체제 안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누시, 남들에게 이성애자로 보이기로 결심한다. 그 안에 결혼도 포함 되어 있다. 루드비크는 할머니가 들려준 서방 세계의 라디오처럼 동성애자인 '나'를 폴란드에 두는 것보다는 떠나고 싶어하는 쪽이다.

주인공이 여권을 얻을 무렵 다방면으로 감시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정보력에 놀랐다. 이후 많은 관계의 전환점이 되는 주말파티(양귀비 줄기로 끓인 마녀스프)에서 그 방탕함의 진면목에 크게 놀랐다. 억압된 자유의 분출일까. 차마 옮기지는 못하고 설명만 남긴다. 중반까지는 잔잔하면서 큰 사건 없이 흐르다가 마지막에 감정의 폭발들이 많이 그려져서 소설 후반부가 더 재미있는 느낌이다. 루드비크의 고민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결국은 여권을 얻기 위해 굴종하는 모습엔 처연한 삶을 생각하며 안타깝다.



소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침울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한 사랑의 나날들엔 폴란드가 낳은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피아노 곡이 흐르는 듯 아름답고 유려하다. 마치 잔잔한 호수를 연상케하고 호수에 내리쬐는 햇빛이 반짝거리며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주인공의 생생한 기억은 독자의 상상력이 더해져 사랑으로 충만한 호숫가의 연인의 속삭임처럼 신비스럽고 영롱하다. ​회색빛 도시로 돌아온 이후의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고 이런 모습들은 자연과 도시, 자유와 억압 등으로 대비를 이루면서 갈등은 높아진다. 저자의 글솜씨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상징과 은유인데도 무척 자연스럽고 상징적인지, 은유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글 속에 녹아든다. 이런 상징과 은유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강렬하게 표현되고 있다. '어둠속에서 헤엄친다'는 자체가 사회주의 마지막의 모습에서 보이는 경제난, 그에 따른 시민의 봉기를 뜻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는 극도로 제한되는 자유 의지에 반한 억압 때문에 살기 위한 발버둥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또 헤엄이라는 몸짓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동작으로 본다면 국가 체제의 전복도 예견할 수도 있다.



저자 :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폴란드계 부모님 아래 독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폴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거주한 경험 덕분에 다섯 개 언어에 능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폴란드의 바르샤바와 영국을 오가다가 지금은 프랑스에 살고 있다. 영어로 쓴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는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역자 : 백지민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학과 및 영어통번역학과와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영번역과를 졸업하고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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