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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이름은
조진주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6월
평점 :
이 책 『다시 나의 이름은』은 9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신예 작가 조진주의 첫 소설집이다. 9편의 각 소설마다 성별과 연령이 다른 주인공(화자)이 등장하며 삶의 고통과 고독을 노출시키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각 소설 속에서 저자는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예리하게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하철 택배 서비스를 하면서도 못다 이룬 꿈을 마음에 품은 할머니(「란딩구바안」), 무대 위를 전전했으나 끝내 무명으로 남은 트로트 가수(「나의 이름은」), 학창시절 왕따 친구를 직장 상사로 만나게 된 계약직 사원(「베스트 컷」), 철없던 시절을 함께 보낸 단짝친구와의 추억을 뒤늦게 그리워하는 여성(「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각자 저마다의 위치에서 무엇 하나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주인공들의 서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깊은 상처를 생생하게 목도하게 이끈다. 오랜만에 문학성 짙은 작품들이 독자로서는 고맙기만 하다.
아홉 편의 작품 속 주인공의 상처가 모두 인간의 욕망이 낳은 갈등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각각의 화자들은 꿈과 이상, 영원한 사랑, 정의와 도덕, 정당한 대우를 원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거나 방해 요소들과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고군분투한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인물들은 조금씩 ‘인간다운 삶’과 멀어져가고, 저자는 “왜 어떤 고집은 열정이 되고, 어떤 고집은 아집이 되어버리느냐”(「나의 이름은」)는 묵직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무게에 지친 모든 이들’의 이야기와 맞닿게 된다. 마치 산업화 시대 집과 일터만 오가는 직장인들의 애환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직장 생활이 싫어 장사를 하지만 더 고약한 손님에게 멸시를 받는 순간의 분노를 삭이는 듯한 소시민의 모습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감정의 과잉이나 무기력함으로 인해 타인과 주고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무너지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스스로 처참하게 무너지도록 방치하느냐,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빠져나오느냐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이 소설집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응당히 누려야 하는 인간다움을 방해하는 요소와 이별하고 ‘진짜 나의 이름’을 찾기를 권한다. 즉, 현실에서 스스로 ‘나’를 지키는 방법을 소설이라는 공간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홉 개의 단편 속 세속적 갈등 상황이 우리가 처한 현실과 빗대어보게 만들지만, 그 끝에서 모두가'“함부로 대해도 좋을 사람은 아니'(「란딩구바안」)라는 따뜻한 희망적 메시지를 건네준다. 매 문장마다 담담하고 묵직한 울림을 담은 ‘희망의 전언’이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선물처럼 다가갈 수 있는 이유다.
2017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등단한 이후 활발하게 활동하며 발표한 아홉 편의 작품을 엮은 이번 책에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조진주식 문학 세계로 응축된 문장의 힘과 따뜻하고 선명한 시선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고독과 고통의 장면을 관조적인 시선과 밀도 높은 문장으로 구현하며 주목받고 있다. 신예답지 않은 노련한 문체와 '분위기의 형상화'에도 성공적인 작품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담담하면서도 설득력 있고 문장과 문장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소설가 김숨)지면서 “깊고 고요하고 느리고 무거운 분위기가 응축”된 탁월한 문장력을 인정받은 바 있는 저자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단편소설이 해내기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인 분위기의 형상화”(평론가 백지은)를 구축해내고, 삶이라는 여정에서 가장 예민한 갈등의 지점을 선택하는 통찰력을 선보인다. 또 그 속에서 보편적으로 만날 수 있는 상처를 진실되게 그려내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평단과 문단에서 평가받고 있다.
문학평론가 안지영은 "조진주 소설에 등장하는 비겁한 인물들을 비양심적인 괴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이들의 행동은 인정을 받지 않으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압박감과 불안 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우리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만 작가는 그러한 속물적 욕망이 어떻게 우리의 인간다움을 박탈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며, 이러한 세계에서 ‘나의 이름’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불안하다. 다만 그 불안의 표정을 타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숨기는 기술을 나날이 발전시켜가며 태연한 척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 가면은 견고해지고 그 내면은 텅 비어간다. 타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에도 무감각한 괴물이 되어간다. 이 소설집이 쉽게 상처를 입는 연약한 피부 혹은 살갗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고 작품집에 대한 평가를 내놨다.
연주황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날을 기억합니다. 곡 녹음 날짜가 잡히고 사무실을 찾았던 날이었지요.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점심 무렵이 지나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장의 손에 들린 믹스 커피의 달달한 향이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콘셉트와 앞으로의 활동 방향 따위를 설명하던 사장이 툭 던지듯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름말인데, ‘연주황색’할 때 그 연주황 어때? 부르기도 좋고 기억하기도 쉽고.”
연주황요? 하고 되물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고 많은 색 중에 왜 연주황일까, 궁금했을 뿐입니다.
“우리 딸내미가 요즘 연주황색 크레파스만 쓰더라고. 크레파스 통을 보는데 그 크레파스만 짜리몽땅해. 거기서 내가 딱 이거다, 싶었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가수가 되라고 말이야.”
- p.139, 「나의 이름은」 중에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이름은 아프다. (……) 누구도 불러주지 않아 사라지는 이름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꼭 기억해야 하는 이름들이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사라져가는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라도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 그렇게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덜 외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정말 많은 이름들을 만났다. 사랑하는 이름들, 고마운 이름들, 절대 잊지 못할 이름들, 잊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희미해졌을지도 모르는 이름들. 그들의 이름이 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다정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불렸으면 좋겠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이름도. 우리의 이름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스케치를 모두 끝내고, 나는 들고 나갔던 고모부의 사진을 다시 끼워 넣기 위해 그녀의 무릎 위에서 앨범을 조심스럽게 빼내 쇼파로 가져왔다. 사진이 있던 자리를 찾아 끼워 넣은 뒤 앨범을 덮으려다가 한 장씩 넘겨 보았다. 그곳에는 그녀의 가족이 보내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고모부는 조금씩 자라났고, 고모의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점점 나이를 먹었다. 종종 그들과 함께 등장하는 마당의 나무는 조금씩 허리가 굽어가고 있었다. 앨범 맨 뒷장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고모가 등장했다. 거실에 앉아 웃고 있는 고모와 고모부의 뒤로, 휘어진 나무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깊은 잠에 빠진 고모의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모두 나무가 되어가고 있구나……. 아직 식지 않은 열기를 느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p.276, 「나무에 대하여」 중에서
저자 : 조진주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17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했다. 현재 ‘어’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소설집 『다시 나의 이름은』을 펴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