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대고 잇대어 일어서는 바람아 - 집콕족을 위한 대리만족 역사기행
박시윤 지음 / 디앤씨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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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부대낌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먼 곳으로 가 닿고 싶었다. 무구한 역사를 지닌 이 땅에서 내가 설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아주 우습고도 어려웠다." 이 책의 머리말의 첫 단락이다. 짧은 세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한두 번 방문해서 쓴 글이 아니란 점과 코로나 팬데믹을 핑계 삼아 평소 혼자 여행하는 버릇을 은연중 드러냈다. 또 목적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가 목적이 새로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더 저자는 우리말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독자만의 판단인지 모르지만 한글 사랑이 몸에 밴 듯하다. 제목은 물론 첫 단락 세 문장에 순우리말이 아닌 단어는 '반복'이 유일하다. 일부러 우리말로 쓰려고 의식했다면 '반복했다'를 '거듭했다'로 바꿔 쓸 뻔했다.

 


 

제목도 순우리말을 잇대어 썼다. 이 책의 제목 『잇대고 잇대어 일어서는 바람아』는 13자인데 순우리말로만 이루어져 있다. '잇대다'는 사전에 ① 서로 이어져 맞닿게 하다 ② 끊어지지 않게 계속 잇다로 나와 있다. 사전식 풀이로는 '연이어 부는 바람이 어느 순간 맞닿아 일어선다'는 의미로 읽힌다. 아마 동해안에 부는 강한 바람이 이리저리 불어대다 어느 순간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이 떠오르는, 매우 감각적 표현이다. 시어에서 많이 쓰일 법한 표현에서 저자의 글에 관한 사색의 깊이가 묻어난다.

이 책은 동해안 국도 7호선(부산~고성간 해안도로, 총 연장은 513.4㎞)을 따라 이어진 2년 간의 절터 탐방 여행기라고 볼 만하다. 부산에서 시작하여 경남·경북·강원도를 거쳐 휴전선까지 이어지며, 경북 포항시부터 강원도까지는 31번 국도에 이어 동해 바닷가를 따라 도로가 형성되어 있다.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도로다. 부산에서 강원까지의 물동량 수송과 지역개발 및 관광 진흥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휴전선에서 끊긴 도로가 이어지면 남북한의 경제교류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이 땅을 휘저을 때 저자는 사람과의 부대낌에서 벗어나 무작정 길을 나섰다.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바람을 만끽한 그가 멈춰선 곳은 낡고 허물어진 땅, 쇠락한 땅, 오래된 절터였다. 저자는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절터에서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독자들과 함께 나눈다. 때로는 독자들로 하여금 차분하고 평온하게 절터의 고요를 느끼게도 하고, 때로는 절터를 찾아 숨가쁘게 내달리게도 하며, 가끔은 아무렇게나 훼손된 절터를 바라보며 공허함을 느끼게도 한다. 속도를 조절하는 저자의 글이 독자들을 고성으로, 속초로, 동해로, 삼척으로, 울진으로, 경주로 무한히 이끈다.

저자의 옛 절터 기행은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무심하게도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어느 날 잡지에서 우연히 보았던 한 장의 사진에 마음이 동했다.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채 눈보라 속에 서 있던 탑 하나, 그게 전부였다. 어떤 쓸쓸함과 충만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오래오래 마음에 남을 매혹적인 풍경이었다. 결국 한계령 어디쯤에서 빈터를 지키고 선 탑과 조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동해안 7번 국도 바람을 따라, 소멸해가는 옛 절터로 이어졌다. 어떤 절터는 이곳이 절이 있던 자리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듯한 전혀 다른 땅이 되어버렸고, 어떤 절터는 오랜 시간 터를 잡고 살아온 마을의 촌로들만 기억하는 그야말로 석조물만 남아 있는 곳이었다. 어떤 절터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속에 제법 많은 옛 흔적을 간직한 곳이었다. 절터의 특성상 험준한 산세를 비집고 들어가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기에 지은이는 여러 해, 여러 계절에 걸쳐 확인하며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을 세세히 담아냈다. 책 속의 사진에서 사계를 느낄 수 있다.

"잘 짜인 구도 위에 교리를 바탕으로 빈틈없이 세워진 가람도 훌륭하겠지만, 역사에 기록도 없이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만났을 때의 전율은 쓸쓸함과 신비함이 뒤섞여 작용했다. 눈 감고 스스로 세우는 가람과 그 속에 나를 위해 거룩하게 세운 교리는 무기한으로 심취할 수 있는 안식처였다."

 


 

저자가 여행을 여행에서 멈추지 않고 굳이 책으로 펴낸 것은 절터의 현재를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약 1,700년 동안 이 땅에서 불교는 종교적 신앙뿐만 아니라 문화의 큰 축을 그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절터만 해도 4,000여 곳. 상당수의 폐사지는 사유화되거나, 무분별한 개발과 경작 등으로 사라졌고 훼손되었다. 더 늦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라도 기록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사진을 찍고, 문헌을 찾아보며, 정돈된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저자는 우리 땅 북쪽 끝 강원도 고성을 시작으로 남쪽 끝단 부산에 이르기까지, 동해안을 따라 지난 2년 동안 둘러본 절터 가운데 23곳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에 추려 엮었다. 여기에다 갈 수 없는 절터 2곳에 대한 이야기를 부록으로 따로 뽑아 실었다.

그 중 하나는 고성 유점사 터. 행적구역으로는 고성이지만, 분단으로 인해 닿을 수 없는 북녘 땅에 있다. 게다가 유점사는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며 왕실의 원당 노릇을 할 정도로 융성했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사라져버린 비운의 사찰이기도 하다. 저자는 아쉬움이 컸던 유점사 터와 더불어, 아직 절터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고성 적곡사 터 이야기를 통해 상상 속에서나마 절터를 만나도록 독자들을 안내한다.

 


 

"누구에게는 가벼운 기행문이 될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종교적 포행이나 만행, 누구에게는 문학적 에세이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쓰임을 받든, 이 책으로 하여 잊히고 묻힌 곳에 대한 아쉬움과 허탈을 달랠 원천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곳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자의 말에 문학적 감성으로 한껏 달아올랐던 마음에 서서히 평온을 되찾아간다.

 

저자 : 박시윤

 

별이 많은 벽촌에서 태어났다. 뜻하게 않게 도회지로 나와 평범하게 자랐다. 학창시절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10대를 온전히 글과 함께 보냈다. 한때 녹록지 않은 세상살이에 절어 문학과 멀어졌으나, 병을 앓으며 원고지 위로 돌아왔다. 2011년 목포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도피하듯 떠난 울릉도에서 숨어 지내다 2년 만에 뭍으로 다시 나왔다. 이곳저곳 세상 흘깃거리기도 하고 밤새워 글줄 엮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는 2013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 지원금을 받았고, 2019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지원작가로 선정됐다.함께 지은 책으로 『우리가 몰랐던 울릉도, 1882년 여름』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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