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의 온기 -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 작가의 숨
윤고은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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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밤의 여행자들』, 『1인용 식탁』 등 기발한 상상력과 감미로운 문장력으로 세태를 감각적으로 그려온 소설가 윤고은이 첫 산문집을 냈다.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란 부제가 붙은 이 에세이집 『빈틈의 온기』는 하루 세 시간의 출퇴근을 반복하는 찐노동자이자 여행 예찬자이기도 한 저자가 일상의 빈틈 속에 숨어 있는 소소하지만, 그러나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찰나의 순간들을 기록했다. 출근길 말고는 산책할 틈이 없는 사람들에게 빈틈, 숨 쉴 수 있는 작은 틈새 역할을 하겠다는 기획의도가 엿보인다. 커피시럽과 폴리텐트를 각각 손 소독제, 치약으로 오인한 황당 에피소드 등 일상 생활에서 맞닥친 '읏픈 이야기'가 주 소재다.

 


 

이번 에세이집 『빈틈의 온기』에는 순도 100퍼센트, 저자의 진짜 일상의 모습을 담아냈다.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전거 바퀴에 껴 엉망이 된 스웨터를 가방에 구겨 넣은 채로 돌진하고, 자주 가는 카페에서 손소독제로 오인한 시럽으로 열심히 테이블을 닦기도 한다. 정리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평가하고, 요가복을 입는 것만으로 운동효과가 난다고 믿는다. 경찰차가 많이 모인 곳을 사건 현장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경찰서 주차장에 서서 말이다. 허당한 모습에 대한 솔직한 자기고백은 유쾌함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정여울 작가는 추천사를 통해 "산들바람처럼 싱그럽고, 해맑고, 경쾌한 그녀의 미소를 닮은 산문들을 모아보니, 이 모든 산문들이 '사랑스러움'의 새로운 의미를 연주하고 있음을 알겠다"며 "어디서든 자신의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꺼낼 수 있는 사람, 그녀가 자아내는 문장 하나하나가 그 따스한 내면의 빛을 가리킨다."고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어 정여울 작가는 "어른스러워 보이려 애쓰지 않고, 자기 안의 내면아이를 마음껏 보여주는 그녀만의 순수함이 책 속에 그득하다"며 자연스럽게 묻어나온 심성의 아름다움에 무게를 두었다.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60여 편의 산문에는 삶이 주는 기쁨이 퍼프소매처럼 살랑거리듯 녹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낡은 속옷은 어떻게 해야 우아하게 버릴 수 있을까(태우는 건 어떨까, 근데 가능하기는 할까), 난생 처음 보는 노부인에게 알몸의 등이 밀리고 있을 땐 어딜 응시하고 있어야 할까(바닥의 타일이 차라리 거울보다는 낫지 않을까), 치약 대신 의치부착재로 양치질을 하면 치과에 바로 가야 할까(어떻게 하면 이 두 가지를 혼동할 수 있는 거지) 등, 허당기 가득하지만 소녀 같은 심성으로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간직한 듯 독자로 하여금 읽는 내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게 한다.

이처럼 웃음만 있는 건 아니다. 지하철 환승을 위해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치타가 되어야 하는 고단한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작가는 생을 향한 애정을 노래한다. 말 못할 슬픔으로 인해 홀로 눈물 흘릴 때 누군가 무심히 건넨 귤 하나가 무한한 위로를 선사한 것처럼, 삶에 빈틈이 생기더라도 그곳엔 어김없이 따스한 햇살이 들이친다고.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가 되어 버린 지금의 이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저자만의 삶에 대한 비밀이 바로 이 책 속에 있다.

 


 

저자는 23살의 나이에 소설가가 되었고, 4권의 소설집과 3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는 동안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저자는 마흔을 넘어섰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를 의미하는 불혹(不惑)의 초입에 선 작가가 선보이는 첫 번째 산문집은 윤고은 작가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독자에게는 그래서 더욱 특별한 선물이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만남이 그렇듯이 책과의 만남도 시기를 탄다. 그 책을 만날 때 내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인생의 어떤 계절을 통과하고 있었는지에 따라 책의 존재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책이 누군가의 삶을 구원하거나 도발하거나 위로했다는 말을 들으면 한 권의 책과 한 사람이 만났던 어느 시점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책은 우리 산책의 가로등 같은 것, 가로등이 없어도 우리는 걸을 수 있지만, 있으면 덜 외롭겠지."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닌 나의 첫 책, 수다쟁이인 걸 들킨 첫 책, 아홉이나 산다는 걸 들킨 첫 책, 길고 긴 의자가 곳곳에 많이 놓인 책, 그래서 애처로운 의자를 더할 필요가 없는 책이다. 이별이라는 느낌이 덜한 밤을 지나고 있다. 마주치는 모두에게 내일의 산책을 잊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 밤이기도 하다. 산책을 권할 때 그 안에 담고 싶은 건 산들거리는 바람, 따갑지 않은 햇볕, 적당히 편안한 신발 같은 것이지만, 모든 산책로가 나긋하지만은 않다. 그걸 기대하는 순진한 산책자도 아니다. 다만 내일 산책로에서 가장 나긋하고 살랑한 존재가 되어보리라는 호기는 좀 부리고 싶은 밤이다."

저자가 「작가의 말」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다.

 

저자 : 윤고은

 

소설가. 라디오 디제이. 여행자. 지하철 승객. 매일 5분 자전거 라이더. 길에 떨어진 머리끈을 발견하면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 사람. 책이 산책의 줄임말이라고 믿는 사람. 라디오 [윤고은의 EBS 북카페]를 진행하고 있다.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 『밤의 여행자들』 『해적판을 타고』가 있다. 한겨레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용익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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