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 - 공주에 새겨진 조선 역사 이야기 공주가 좋다 2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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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공주에 딱 한 번 간 적이 있다. 근처 부여와 함께 일정이 잡힌 1박2일 직장 동료들과의 여행이었다. 십수년이 넘은 일이라 그때의 물가나 경제 상황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곳의 분위기는 또렷이 기억을 비집고 나온다. 도착할 때가 낮이었고 초여름이니 날짜로 봐서 6월초 지금쯤이었던 것 같다. 옛 도성이어서인지 활발한 느낌보다는 고즈넉하지만 평안한 분위기였다. 역사의 격동기를 몸으로 받아낸 도시 같지 않았다.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격동기 역사를 잊어서일까. 도성으로서의 위엄과 활기보다는 그저 쇠락한 옛 도읍지 딱 그 느낌이었다. 도시이지만 농촌의 분위기가 훨씬 강했다. 성터로 올라가자 전경을 볼 수 있었고 날씨가 더워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로 보이진 않았다. 산으로 이어진 성터여서 우리 일행 말고 외지에서 온 여행객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관광철이 아니어서 그럴 것이란 생각을 잠깐 했었던 것 같다.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교통의 요지였으니 왕도가 들어서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특히 나중에 안 얘기지만 지형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에 천혜의 요새처럼 산과 물이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 『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는 공주가 교통 요지이고 늘 역사의 현장에서 기쁨보다는 슬픔을 많이 간직한 곳으로 이야기한다. 책에 따르면 조선 후기 공주는 조선을 격동시킨 여러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조세개혁의 상징인 대동법 시행을 촉발한 고장이었고, 만민의 평등함을 주장하며 선교에 나섰던 천주교가 거센 탄압을 받았던 박해의 현장이었다. 외세를 물리쳐 나라와 백성을 살리자고 외치던 동학농민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격전지였다. 대단한 역할을 전면에서 감당해낸 도시다. 조선 후기 300여 년간 공주가 이렇게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 되었던 것은 호서의 중심이자 충청감영이 설치된, 명실상부한 지역의 대표도시였기 때문이라고 책은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 전국 8도에 각각 설치되었던 감영도시(지금의 도청소재지)의 하나로 공주를 들여다보면, 공주의 역사가 그만큼 새롭게 보이고, 공주의 실상과 가치를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는 게 저자(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의 말이다. 공산성과 제민천변을 오가던 감영이 지금의 사대부고 자리로 정해진 사연을 접하면 구시가지의 공간 구성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또 황새바위 성지와 우금티에서는 천주교도와 동학농민군이 지켰던 믿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전언한다. 공주가 많은 할 말을 갖고 있는 도시라고 은연중 강조하는 것으로 들린다. 저자는 공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공주의 이름을 단 곳곳에서, 산책으로 걷는 길마다 여러 시대, 여러 주인공의 이야기들이 걸음마다 따라올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을 읽으며 조선을 격동시킨 역사의 현장 충청감영 공주로 들어가는 탐험을 시작해보자. 300여 년간 감영도시 공주가 겪었던 흥망성쇠 속에서 수없이 나타났다 사라져간 수많은 인물과 그들이 겪었던 영광과 고통의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현재 공주는 웅진백제의 수도로 유명하지만, 공주가 오래도록 충남권(호서)의 중심도시였던 것은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백제의 수도가 되었던 이유, 예를 들어 차령산맥과 금강, 계룡산과 같은 자연적인 방벽, 삼남으로 향하는 길들과 금강을 통한 수운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지리적 이점, 내포를 비롯해 호서의 비옥한 평야지대와 가깝다는 경제적 까닭 등 공주가 오래도록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고 번성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백제의 문주왕은 아버지 개로왕이 고구려 군대에 패해 한성과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은 상태에서 나라의 운명을 건 천도를 단행했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이 웅진-공주였다. 고려 현종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40만 대군의 병력으로 고려를 침공하자 남쪽 나주로 피란을 떠났다. 1011년 1월, 겨울 추위 속에 떠난 피란은 신하나 백성들의 냉대와 외면 속에서 비참했지만, 공주에서 비로소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환대를 받으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이후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에 들러 시간을 보냈으며, 김은부의 딸들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그 사이에서 나온 아들들이 이후 왕이 되어 덕종, 정종, 문종으로 이어졌다.

 


 

조선 인조는 반정 공신이었던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역시 한양을 떠나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가 피란지로 머물렀던 곳이 공주 공산성으로, 현종과 마찬가지로 피란길에 받았던 냉대와 외면과 달리 공주에서 따듯한 환대를 받았다. 이괄의 난은 바로 진압되었는데, 인조는 며칠 더 공주에 머무르면서 그 인연을 더욱 깊게 했다.

웅진백제 당시에 나라의 목표는 ‘갱위강국’이었다. 다시 강국이 되겠다는 이 꿈은 꿈으로 그치지 않고 역사가 되었다. 비록 처음 공주에 자리 잡은 문주왕은 일찍 그 꿈을 접었지만, 이후 동성왕, 무령왕, 성왕을 거치며 예전의 강성한 백제가 되었다. 고려 현종도, 조선 인조도 외침과 반란이라는 극도의 혼란을 잘 수습해 다시 나라를 살필 수 있었다. 공주와 우리 역사의 좋은 인연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공주에 충청감영이 들어서면서 지금 공주와 이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탄생했다. 조선 이전까지의 공주는 유물과 유적을 거치며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만, 충청감영의 공주는 생생하다.

지금 공산성의 주 출입구인 금서루로 오르는 길에 있는 40여 개의 공덕비가 일단 그러하다. 충청감영과 공주목과 연관이 있는 여러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비들인데, 그중 맨 앞에 있는 것은 관찰사로 머물렀던 이들의 것이다. 관찰사는 당시 호서/충청지역을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왕의 대리인이자 지역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지금으로 생각하면 도지사+교육감+지역 군사령관+지역 경찰청장+지역 사법책임자 등 여러 역할을 맡았다. 이 책에서는 (충청도)관찰사가 했던 복잡다단한 일들,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을 그 일들의 세목을 만날 수 있다. 일의 노동강도와 스트레스가 심해 일찍 세상을 떠난 관찰사들도 많았다니 그 자리가 꼭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충청감영이 공주에 들어서면서 조선 후기 역사의 격변이 공주를 거쳐 갔다. 바로 천주교-서학과 동학이 그것이다. 공주의 황새바위 성지는 조선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격렬한 탄압과 억압의 현장 중 하나였다. 공주 우금티 고개는 동학혁명에 나선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신식무기에 속절없이 패배한 아픈 역사의 장소였다. 그 자신 동학군으로 나서기도 했던 김구 선생은 공주 마곡사에서 몸을 숨기며 은거한 적이 있고, 해방이 되자 공주를 찾아 동학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며 마곡사에 나무 한 그루를 심기도 했다. 김구 선생이 공산성 안의 누각에 지어준 ‘광복루’라는 이름은 이전 왕조시대의 ‘갱위강국’과 같은 꿈일 것이다. ‘다시 나라다운 나라가 되겠다’라는 꿈. 공주는 그런 원대한 꿈을 간직한 곳이다.

 


 

〈공주가 좋다〉는 공주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기획하고 엮어낸 역사문화 교양 시리즈이다. 1,500년의 잠에서 깨어난 고대 웅진백제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한편, 호서의 중심지이자 감영도시 공주에 새겨진 300여 년 조선의 역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와 더불어 근대 공주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간다. 1권 《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 2권 《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 의 출간을 시작으로 탄탄한 후속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저자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수집·조사·발굴하는 연구기관으로 2004년에 만들어졌다. 충남과 옛 호서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연구서 《충청남도지》 25권, 《백제문화사대계》, 《내포문화총서》 등 충남의 정체성을 밝힌 연구서를 비롯해 청소년을 위한 지역문화 소개 책자 등 다양한 종류의 연구 및 출간 사업을 진행했으며, 문화재 발굴과 정비 복원,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의 역사 대중화 작업도 꾸준히 해왔다.

문화재 발굴 사업 중 공주 지역의 장선리 마한 토실 유적, 수촌리 고분군 등의 발굴을 통해 백제 왕도가 되기 이전 공주의 역사 환경을 밝혔고, 공주 구도심의 대통사터와 정지산의 제향시설, 무령왕릉 주변의 발굴 조사로 백제사의 지평을 넓혔다. 땅 속의 문화재뿐만 아니라 훼손과 멸실 위기에 처한 충남의 여러 문화자원을 찾아 연구하고 보존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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