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 - 마종기 산문집
마종기 지음 / &(앤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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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시에 대한 마종기 시인의 애착은 눈물겹다. 먼 미국 땅에서 말도 제대로 잘 하지 못했을 텐데 험난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괜찮은(?) 의사로서 바로 설 때까지 그는 시를 놓지 않았다. 시가, 우리말로 쓴 시가 유일한 위안이었고 탈출구이기도 했다. 독자는 개인적으로 그의 선친 마해송 작가는 잘 알지만 마종기 시인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다. 그런데도 몇 년 전 어디선가 그의 시를 읽은 기억이 있어 찾아보았다. 아, 나태주 시인이 쓰고 엮은 책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시』에서 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책에 마종기 시인의 시 한 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시가 바로 「바람의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찾아보니 조용필의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도 마종기 시인의 이 시를 개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시인의 허락을 받았다.

그가 이번에 산문집으로 본격 독자 앞에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앞서 독자가 시인을 너무 몰랐다는 미안함, 그의 미국 생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얘기를 듣고 보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죄송한 마음 감출 길이 없다. 이런저런 미안함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의 시를 사랑하고 싶다.

 


 

시인 마종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문학가인 마해송과 현대무용가인 박외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지금 한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에는 그가 그동안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시적 감성을 자극했던 수많은 예술 작품과 모티프들, 그 눈부시던 감동의 순간들과 삶에 대한 성찰, 모국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했던 이들과의 예기치 못했던 작별 그리고 시의 행간 속에 고여 있던 뜨거운 눈물에 대한 이야기가 숨은 듯 담겨 있다.

1966년 여름 그는 공군 군의관 때 제대를 앞두고 재경문인 한일회담 반대서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공군본부 광장에서 체포돼 몇 달 후 미국으로 가야 했다.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떠났다. 미국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단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출구 없는 감옥이었다. 매일 새로운 생명을 받아내고 또 죽어가는 환자를 보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시신 부검에 참여하며 어제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의 육체를 손상하는 것을 응시해야 했다. 혹독한 수련의 시간 속에서 그는 틈틈이 시를 쓰고 휴일마다 근교의 미술관을 찾아 고독과 향수를 달랬다. 오로지 모국어로 쓰는 시와 예술만이 구원이었다고 술회한다. 아는 사람은 없고 언어도 불편한 타지에서 극한의 인턴 생활을 하면서 지치고 힘들어질 때마다 한글로 된 시를 갈망했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그 마음이 담긴 시는 더욱 빛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지에 있으면서 고국의 언어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졌고 자는 이로 인해 진정한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저자는 첫 번째 이야기로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새겨보며 담담하게 글자로 표현했다. 1장(독자가 편의상 '장(章)'으로 표현함)에서는 한국과 미국에서 생활하며 느꼈던 감정들, 가졌던 생각들을 담백하게 들려준다. 2장은 예술에 대한 저자의 여러 생각들을 보여준다. 여러 장르의 예술에 심취하고 온전히 즐기는 저자만의 방법들이 담겨 있다.

3장은 문학과 의학 그리고 종교, 4장은 행복한 여행자란 제목으로 문학, 의학, 종교, 여행과 관련된 저자의 단상들이 주를 이룬다. 마지막 5장에서 저자는 예술이 직면한 위기를 조명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저자만의 의견을 밝힌다. 시인 마종기를 수십년간 위로하고 지켜준 수많은 예술 작품과 그에게 문학적 영감을 준 예술가들을 만나기 위해 그의 책 속으로 들어간다.

 


 

시뿐 만 아니라 미술과 음악을 즐기는 저자의 모습에서 독자로서 배울 점이 매우 많다. 그림 앞에 섰을 때 그림을 이해하고 해석하기보다는 즐기냐 아니냐로 접근하기에 부담감이 없다. 즐길 수 있으면 즐기고 아니면 그림 앞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음악을 감상할 때에도 레코드된 음악만 듣는 것이 아니라 공연장의 생음악을 들으려 한다. 오선지 위의 음악에 생명을 불어 넣는 연주자들의 긴장, 초초, 집중, 노력까지 보면서 듣는 것이다. 미술과 음악의 핵심을 꿰뚫는 감상법이란 느낌을 받는다. 시인 마해송은 모든 예술을 대할 때 직접 부딪치고 직접 경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야 감상법도 자신만의 감상법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뒤늦게 깨닫는다.

 


 

이 책은 저자의 예술에 대한 가치관뿐만 아니라 문학, 의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공포로 다가오던 프리다 칼로의 그림과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 제1실에 전시된 25개의 동일한 크기의 자화상들, 오슬로의 고풍스러운 뭉크미술관에서 본 화가의 고통, 영국의 테이트모던미술관에서 본 로댕의 조각품〈키스〉나 마크 로스코의 그림들, 비엔나에서 본 화려 방창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요염한 여인들과 그들을 둘러싼 찬란한 황금빛 색채. 이들 외에도 마종기를 압도한 예술가는 누구였으며 그들의 작품은 무엇이었는지, 또한 예술적 영감의 세계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와 그 시절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생소한 오페라 문화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나이와 장르를 초월해 예술적으로 교감을 나눈 사람들과의 이야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의 인연, 문학작품과 의학상식, 미국 현대시의 비밀에 관한 내용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오페라 하나에 완전히 감전되어서 그 후부터는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 뉴욕에 갈 때마다 오페라 티켓을 미리 예약해서 관람했고 그런 날들은 내가 은퇴하기 전까지 거의 30년 세월 동안 반복되었습니다(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말고 내가 지켜본 오페라 극장은 단 하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오페라하우스로 마이어베어의 ‘예언자’라는 오페라였지요. 내가 꼭 그 오페라하우스에 들어가고 싶었던 이유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이 유럽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바로 이 오페라 극장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들었고 무척 좋아하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19세기 말부터 10여 년 동안 맡아 오페라단의 수준을 최고급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해서 그의 숨소리는 어떤지 그의 땀방울은 어디에 떨어졌는지를 보고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 「오페라의 황홀」 중에서

 

무엇이, 지친 우리를 이보다 더 위로할 수 있을까. 읽는 내내 한 사람의 선한 의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면서 다정하고도 결곡한 목소리로 쓰인 글들의 강력한 힘에 대해 순정한 존경을 전한다고 말하는 유희경 시인의 추천사와 시인의 산문을 읽으며 그가 전하는 묵직한 물음 앞에 목이 멘다는 이병률 시인 그리고 선생의 글의 읽으면서 다시 북촌의 언덕길로 그리고 명륜동과 올랜도로, 그 어느 날로 여행을 떠난다는 루시드 폴의 목소리가 봄날 아침에 듣는 투명한 음악 소리처럼 신선하다.

 


 

이 엄혹한 시절, 코로나19 팬데믹의 비극이 온 세상을 뒤덮은 처참한 암흑에서 오늘도 수많은 생명이 비명 속에 죽어가고 시신을 덮을 관도, 묻을 땅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지구. 살아 있는 사람조차 마주 보고 담소도 주고받지 못하는 날들이 도대체 얼마나 더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서로가 서로를 피하려고만 하는 이 암담한 외면 속에서 무슨 문학이, 무슨 음악 듣기가, 무슨 그림 구경이, 또 무슨 지난날의 동서남북 여행기가 도대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야단을 치는 듯해서였다.

거기다가 내가 즐기는 음악이나 그림 감상이나 연극, 영화, 무용 공연이나 잡독의 독서가 뭐 그리 대단한 수준이라고 이 나이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낯간지럽게 책으로 출간하느냐는 질책이 귀에 들리는 듯해서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게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사실이다. 바로 이렇게 경계가 다 막힌 경험해보지 못한 창백한 세상이기에, 치기 어린 내 생의 미로가 어쩌면 누구에겐가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고 잠시나마 푸근하고 편안한 자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예술의 전문 분야를 전공하고 깊이 공부한 분의 학문적 분석이 아니고 그냥 하루하루의 생활 중에 만나는 예술의 즐거움, 내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오랜 세월 나와 함께 살면서 나를 살려준 고마운 은인. 젊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했던 진한 외로움을 달래주고 힘이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준 그 모든 예술이나 독서나 여행을 그냥 친한 이에게 말하듯 순서도 곡절도 이유도 없이 줄줄이 벌려놓은 게 이 책이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꽃 몇 송이를 키우는 볼품없는 꽃나무 화분이고 내가 평생 키운 꽃은 의사라는 내 생업과 밤잠을 설치면서 만들어낸 시 몇 편이 전부인데 그 꽃 화분을 이렇게 오래 편하게 살게 해준 흙과 비료와 단비 같은 물은 바로내가 즐기는 음악 듣기고 그림 보기이고 독서이고 믿음이고 여행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저자 : 마종기

 

부드러운 언어로 삶의 생채기를 어루만지고 세상의 모든 경계를 감싸안는 시인이다. 1939년 일본 도쿄에서 동화작가 마해송과 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 앉아 혼자 동시를 쓰기 시작했던 소년은 중학생 시절부터 일약 ‘학원’ 문단의 스타가 되어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을 도맡는 등 타고난 시인의 재능을 맘껏 선보인다.

자연스럽게 문인의 길로 접어드는 듯 했으나 어려운 고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주위의 권유로 연세대학교 의대에진학했다. 1959년 본과 일학년때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면서 ‘의사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 병원에서 수련의 시절을 거쳐 미국 진단방사선과 전문의가 되었고, 오하이오 의과대학 방사선과 및 소아과 교수 시절에는 그해 최고 교수에게 수여하는 ‘황금사과상’을 수상했다. 이후 톨레도 아동병원 방사선과 과장, 부원장까지 역임했고 2002년 의사생활을 은퇴할 때까지 ‘실력이 뛰어나고 인간미 넘치는 의사’로서 명성을 쌓았다. 은퇴한 후에는 연세대 의대의 초빙 교수로 본과 2년생에게 새 학과목인 ‘문학과 의학’을 5년간 가르쳤다.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보내야했던 그리움과 고독의 시간을 자신만의 시어로 조탁하여 『조용한 개선』을 시작으로 『두번째 겨울』(1965), 『평균율』(공동시집: 1권 1968, 2권 1972), 『변경의 꽃』 (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6), 『그 나라 하늘빛』 (1991), 『이슬의 눈』 (1997),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2006), 『하늘의 맨살』 (2010), 『마흔두 개의 초록』 (2015) 등의 시집을 펴냈다. 그 밖에 『마종기 시전집』 (1999), 시선집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2004),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2003)과 『아주 사적인, 긴 만남』(2009),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2010), 『우리 얼마나 함께』 (2013),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2014) 등 수많은 시집을 펴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대산문학상을 받았으며, 2009년에는 시 「파타고니아의 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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