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폴리스 - 홍준성 장편소설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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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배경은 '비뫼시'라는 가상의 도시이다. 지하철이 다니고 텔레비전이 존재하며 방송국 또한 존재한다. 무정자증을 진단할 수 있고 스테로이드 주사가 존재하며 댐을 건설하는 현대의 도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도시는 여왕이 통치하는 절대왕권의 도시국가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신하(각료) 한두 명쯤은 지하 감옥으로 끌고 들어가 고문하고 죽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공포정치로 다스리는 왕국이다.

도시 안 고서점의 주인인 곱추는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고 그곳에서 쫓겨난다. 고서점 안에서 비밀스럽게 지내오던 박쥐는 그 사건으로 여파로 보금자리를 잃고 바깥세상으로 나간다. 나가자마자 송골매에게 먹이로 사냥을 당하게 되고, 박쥐를 사냥한 송골매는 고양이와 싸우다 결국 3마리 모두 죽는다. 그 박쥐와 송골매를 노숙자가 주워 약재상에 팔고 심각한 관절염에 시달리던 유리부인이 그 박쥐를 약으로 먹게 된다. 그러던 중 빈밀굴에 살던 유리부인은 갑작스럽게 40이 가까운 나이에 임신을 하게 된다.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나라에서 진행하던 댐 공사 현장에 유리부인의 남편이 일하게 된다.

 


 

공포정치로써 왕권을 유지하던 비뫼시의 가시여왕은 갑작스럽게 변덕이 생겨, 현재 진행중인 댐 공사에 시멘트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줄이라고 명령한다. 목이 달아날까(해고가 아닌 죽음) 무서웠던 건설부 차관은 건축사를 종용하여 시멘트를 줄여서 공사를 진행한다. 때마침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고 댐은 붕괴하여 비뫼시를 덮친다.

대홍수 물난리로 남편은 죽고 유리부인은 죽기 직전 아이를 출산한다. 그 아이는 괴기스럽게도 박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태어난다. 물난리로 비뫼시는 아비규한이 되고, 시체를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신원 확인조차 없이 다같이 묻어버릴 정도로 치안과 국가 행정은 마비 상태에 이른다. 이에 콜레라가 창궐하고 빈민가의 시민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공권력도 점점 힘을 잃어간다. 비슷한 시기에 가시여왕은 아이를 출산한다. 이 아이의 얼굴은 박쥐와 똑같은 얼굴로 태어난다. 불행하게도 이 아이는 자아가 붕괴된 채 태어나 짐승과 같은 행동을 한다. 절대왕권의 왕국, 카르마의 도시 비뫼시의 앞날과 시민, 대홍수 고아, 여왕의 아들의 앞날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42번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울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날 일어난 대홍수, 명백히 인재라고 해야할 바로 그 재난 때문에 번호로 불리우게 된 고아이다. 다른 소설이라면 분명 주인공의 위치이지만 이 책에서는 주인공이라 부르는 것조차 애매하다. 이 책에서는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의 전개가 42번에 맞춰져 있지만 이야기를 이끌고 가지는 않는다. 이쯤 되면 주인공은 없거나 모두가 주인공일 수 있다. 소설 속 전지적 시점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작가가 주인공이 되는 셈이다.

작가는 독자의 시선을 붙잡고 이야기가 흐르는 곳마다 들여다보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서사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첫 페이지부터 독자의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대단한 스토리텔링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 특유의 스토리텔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소설의 전개 등 구성력도 뛰어나다. 소설 속 사건 하나하나가 전부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유기적 연관관계를 맺고, 가끔은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만 작가는 완력으로 독자를 이끄는 듯한 구성 능력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중견 소설가 정유정은 저자에 대해 “독자를 끌고 가서 기어코 끝을 보게 만드는 이야기의 완력”을 보여준다는 평을 내놨다. 지금 이 책을 읽어보니 정유정 작가의 평이 설득력을 얻는다. 정유정 작가는 2015 한경신춘문예 장편소설 공모작 심사에서 홍준성이 제출한 작품을 장편소설 부문 당선작으로 내면서 이 같은 심사평을 했다고 한다. 저자의 지적 수준 역시 소설 전개 능력을 뛰어넘는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연상케하는 것과, 절대왕권의 독재정치, 절대왕권 아래서 신음하며 피폐해가는 시민의 삶, 서서히 무너지는 공권력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사의 중심에 섰던 정치 권력들을 두루 갗춘 느낌의 절대왕권의 여왕을 내세워 소설의 극적 부분을 담당케 한다. 또 제목으로 채택한 '카르마'란 용어도 범상치 않다.

카르마(karma)는 불교에서 말하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뜻한다. 불교에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혹은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 Karman의 의역으로, 음역하여 갈마(?磨)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신업(身業)·구업(口業)·의업(意業)으로 나누고 이를 삼업이라 하는데, 신업은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고 구업은 언어적 표현으로 나타나며 의업은 정신적 활동으로 나타난다. 대개는 전생에 죄를 많이 져서 이 세상에 와 고생한다고 할 때처럼 쓰인다. 부정적으로 상황을 비난할 때 주로 쓰이는 용어다.

 


 

즉, 이 소설은 인간사를 관통하는데 특정 시대나 지역을 뛰어넘는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42의 이야기는 모든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결국 42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비판적, 우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글에는 에너지가 넘친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작가가 쉽게 쓰지 않았을 것이란 느낌이 강하게 온다.

인물의 대사를 활용해서 역사와 철학적 지식을 엿볼 수 있다. 표현도 대화법으로 소크라테스가 떠오르는 건 독자만의 과민한 탓일까. 단순한 대화 같지만 한 단어 한 단어가 매우 절제돼 있고, 다듬어졌다. 다양한 지식과 높은 소설 작성 능력, 그리고 전개와 구성 능력 등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독자로서는 읽기만 해도 독자의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 지식을 이리저리 찾아내는 데 신경 써야 할 정도로 지식이 동서고금, 가상과 현실, 실제인듯 상상인듯 현실인듯 느낌마저 몽롱한게 하는 텍스트의 매력은 한 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지식 탐구의 늪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 지식은 단순 지식이라기보다 역사와 철학,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삶에 대한 지독한 사유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모두 9장으로 구성돼 있는 이 작품의 중간에 '악곡 없는 간주곡'이라는 연극이나 오페라의 대사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내용도 옛날 그리스 시대의 희곡처럼 시적(詩的)이다. 당장이라도 오페라나 뮤지컬의 대사로 다듬어 무대에 올려도 될 만큼 압축적인 노래 가사 같다. 독자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긴장감을 더 조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독특하고 실험적 구성이다. 이런 저런 이유를 다 합쳐도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사회 풍자적이고 시적이라는 점이다. 독자는 소설을 평가할 능력은 갖추고 있지 않지만 재밌다, 재미없다 정도는 가릴 줄 안다. 이 모든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요즘 소설로서는 보기 드문 수작(秀作)임에는 틀림없다.

 

저자 : 홍준성

 

1991년 부산 출생. 부산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2015년 제3회 한경 청년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열등의 계보》가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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