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박영서 지음 / 들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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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을 일컬어 '기록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는 한 사학자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무렵이었던 것으로 독자는 기억한다. 조선왕조실록이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자세하고 공정한 국정 전반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 더욱이 왕이라 할지라도 당대(후대 왕도 그렇지만) 에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하니 얼마나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록일까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치라는 것이 자신의 편은 후하게, 상대편에겐 없는 죄도 뒤집어씌울 수 있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이다. 특히 최고권력자에게는 당연히 민감하게 신경 쓰일 것이다. 자신이 선정을 베풀었는지 악행을 일삼은 불민한 왕이었는지가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리 신념 굳은 사관이 쓰는 기록이라도 당대에 열람할 수 있다면 당연히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기록된 것을 빼거나 고칠 우려가 크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공정한 기록을 남기는 일은 공정과 평등 등 민주주의를 행동으로 보여준 단면이기도 하다.

더욱이 사관들이 어떻게 기록할지 모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공정하고 개방적인 정치를 하려 애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은 물론 당대에 정치하는 사람들은 기록을 일절 볼 수 없게끔 제도화한 선조들의 공정에 대한 신념은 세게 어디에 내놔도 손색 없는 역사 정신이다. 그 사학자가 '기록의 나라'라고 자랑스럽게 말한 것도 그만큼의 깊은 뜻을 가진 것이다. 결국 우리 정치나 민족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리란 점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누구에게 보여줄 리 없는 사관의 기록은, 개인적으로 보면 남에게 보여줄 리 없는 일기와 맥락이 비슷하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은 감추고 싶은 비밀스러운 일도 왜곡 은폐할 필요가 없었고, 개인의 일기도 나중에 고쳐 쓰지 않는다. 자신이 쓴 일기라고 나중에 고쳐 쓴 적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책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은 우리 선조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거짓말을 일기에 쓰는 사람은 없다. 이 때문에 이런 개인적인 일기들은 민생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재미대로, 비밀스러운 것은 비밀대로, 슬픈 일은 슬픔대로 읽혀질 것이다. 당연히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없는 민생이 담겨 있다. 개인에게 오늘의 삶은 일기가 되고, 그 일기가 쌓이면 역사가 된다. 평범하지만 찬란했던 역사의 참 주인공들이 써 내려간 알짜배기 역사책을 만나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 박영서의 두 번째 책이다. 저자는 전작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에 이어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의 ‘일기’에 주목했다. 일기는 가장 사적인 기록이다. 개인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이 세세하게 녹아 들어가 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달을 보며 자리에 들 때까지 시시각각 스쳐 지나간 온갖 감정과 생각과 행동의 흔적들이 조용히 내려앉으면 일기가 된다. 그러나 일기는 거시적이기도 하다. 일기를 쓴 사람이 자신이 살아 숨쉬던 시대와 어떻게 교차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일기는 개인이라는 씨실과 시대라는 날실이 직조된 저마다의 직조물인 셈이다. 똑같은 일기가 나올 수 없는 이유다.

 


 

저자는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원한 이순신 장군의 마음과 활약을 읽는 일은 『난중일기(亂中日記)』 덕분에 가능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투를 이해하게 된 데에는 김구의 『백범일지(白凡逸志)』 역할이 크다. 『안네의 일기』 덕분에 우리는 유태인 소녀 안네가 겪었던 나치 치하의 참혹상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고, ‘일기문학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는 『아미엘의 일기』는 매일매일 행해지는 내면의 성찰과 명상이 어떻게 격조 높은 문학으로 탄생하는지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 모두 일기가 개인의 사유와 행동 및 희망과 절망을 담아내며, 동시에 후대 사람들에게 한 시대의 영광과 추락을 전해준다는 것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사람들이 쓴 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그들은 왜 글을 썼을까? 글은 양반의 전유물이었으니 일반 백성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

저자에 따르면 조선 사람들은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시대를 통찰하기 위해 일기를 썼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시대정신을 기록하기 위해, 후대에 남길 정신적인 유산을 축적하기 위해 일기를 썼다. ‘높으신 양반’ 네트워크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려고 목숨 걸었던 마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내미가 긴 병치레에 들어가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 백성은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정력제를 구해오라 다그치는 양반네를 고급스러운 유머로 받아치는 마음, 근성 있는 대탈주를 감행한 조선 노비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며 ‘아이고, 내 재산’(당시 노비는 가축처럼 재산이지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다)을 되뇌는 주인의 분통 어린 심정. 양반들의 속사정은 물론 함께 호흡하던 일반 백성의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모두 담아낸 이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다채로운 빛으로 채워준다.

 


 

이 책에는 가히 조선 사람들의 웃기고도 슬픈 조선 사람의 속마음,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조선의 하루가 담겨 있다. 특히 독서의 재미를 위해 저자가 직접 그린 주요 등장인물의 캐리커처와 저자가 직접 쓴 한문일기 필사본이 실려 있다. 다른 책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자료만으로도 독자들의 선택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사에 재미를 붙이고 싶은 학생들, 읽을거리를 찾아 온오프라인 서점을 방황하는 독서가들, 그리고 ‘역사라면 한국사, 한국사라면 미시사’를 외치는 역사 마니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 책에 소개된 자료들은 모두 전문 연구자들과 연구기관 관계자들이 쏟아부은 노력의 결과물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선시대 개인일기 학술조사’에 따르면 현재까지 확인된 조선의 개인 일기들은 무려 1431건에 이른다. 여행 중에 쓴 여행일기, 전쟁 중에 쓴 전란일기, 궁중의 여인들이 쓴 궁중일기, 단맛 짠맛 다 드러나는 생활일기, 공무를 수행하던 중에 쓴 사행일기 등 짧게는 수십 일, 길게는 몇 세대가 이어 쓴 일기들이 있다. 우리는 그 수많은 기록자료 덕분에 21세기 책상에 앉아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을 비교적 낱낱이 확인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때로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처럼 웃을 수 있고, 때로는 슬픈 영화를 볼 때처럼 눈시울을 붉힐 수도 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기록에 푹 빠져 일기의 주인들과 완전히 공명할 수 있다. E.H 카의 말처럼 “과거의 조선인들과 현재의 우리가 대화하는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남긴 선조들과 소통하며, 이제 또 다른 21세기 대한민국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중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글은 선비들의 전유물이어서 민초, 노비들은 자신들의 생활이나 생각을 직접 글로 남긴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자기 ‘라인’을 과거에 합격시키기 위해 거주지를 허위로 등록하게 하고, 과거장까지 이끌고 온 조즙의 뻔뻔한 행위에 동네의 선비들은 분개합니다. 감독관과 응시생의 말싸움은 점차 커져, 둘 다 시험장을 나가버리는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하죠. 초유의 감독 거부와 응시 거부 사태는 결국 부상자를 초래하죠. ‘조즙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고개를 떨궜다.’라는 내용은 조즙 자신도 본인의 행위가 비도덕적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즉, 비록 ‘관례적’으로 온갖 종류의 부정행위가 매우 자주 벌어졌지만, 그런 행위가 부정한 것이라는 최소한의 인식은 공유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과거 시험장의 부정행위는 야근을 하지 않고 수당을 입력하는 우리 시대의 ‘관례’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떠한 부정한 행위가 ‘관례’가 되는 순간, 오히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받곤 하죠.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한 선비처럼요.

- 「나는 네가 과거 시험장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 중에서

 


 

1614년 3월 2일 『계암일록(溪巖日錄)』

오늘 아침, 승문원(承文院)?에 첫 출근을 했다. 들어가자마자 윤 대리님이 엄청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를 대청마루의 현판 밑으로 내보내 시를 짓게 했다. 오 과장님은 끝도 없이 시 짓는 문제를 내어서 나를 괴롭혔다. 그가 너무, 너무 미웠다. 저녁에는 선배들 집을 돌면서 명함을 돌렸다. 열심히 말을 달려 윤 차장님, 오 과장님, 김 대리님, 윤 대리님 댁 등을 포함해 열네 곳이나 명함을 돌렸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숙소에 돌아오니, 민 부장님이 “오늘 하루 정말 고생 많았지? 내일부터는 허참례(許參禮)를 할 때까지 명함을 그만 돌려도 되네.”라고 하셨다.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한 38세의 ‘뉴비 공무원’ 김령.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따뜻한 환대와 조언이 아닌,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신고식이었습니다. 업무 시간에는 선배들이 일도 안 하고 온갖 퀴즈를 내며 김령을 괴롭히더니, 이제는 ‘명함 돌리기’를 시켰습니다. 명함 돌리기 풍습은 많은 곳을 돌아야 했기에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김령도 열네 곳이나 되는 집을 두루 돌아다니며 명함과 함께 인사를 드렸죠.

게다가 꼭 귀신 분장을 한 것처럼 낡고 찢어진 옷을 입어야 했는데, 야간통행금지 시간에 사람들을 단속하는 경찰도 이들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일부러 창고에 가두고 밤늦게까지 뉴비 관원을 붙잡고 얼굴에 먹물을 칠하는 모습이 담겨 있죠? 주변에서는 아예 BGM까지 깔아주며 제대로 놀리는 모습입니다. 신입생 환영회 때의 추태가 동기들 사이에서 내내 회자되듯, 조선 시대에도 이때 망가지는 모습이 관직 생활 내내 술안주로 쓰였겠죠?

- 「신입 사원들의 관직 생활 분투기」 중에서

 


 

아내 김돈이가 이토록 거칠고 예민하게 반응한 까닭은 하녀들이 전해준 거리의 풍문 때문이었습니다. 기생 종대가 마치 이문건의 두 번째 부인이 된 것처럼 행세하면서, 이문건과 있었던 ‘베드 토크(bed talk)’를 자랑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죠.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내의 항의는 정당합니다. 그런데 이문건은 사실이 아니라며, 대꾸할 가치도 없다며 차가운 태도로 일관합니다. 오히려 쓸데없이 거짓 소문을 전하는 아내의 하녀들을 비난하죠. 하지만 이미 전과(?)가 있는 남편의 해명을 믿기 어려웠던 아내는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건강이 점점 악화하죠. 어느 날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남편에게 “기생 종대가 보고 싶어서 나랑은 못 살겠지? 그렇지?”라며 우격다짐을 펴기도 합니다.

이문건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아내의 상태를 걱정합니다. 그래서 며느리나 하녀에게 아내를 제대로 모시라며 혼을 내면서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하지만, 결국 본인이 풀어야 하는 문제임을 알았죠. 기생집 사장님과 남편, 그리고 아내 사이의 삼자대면이 벌어지고, 다시는 기생 종대가 이문건을 만날 일이 없다는 확약을 받고 나서야 이 일은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 「식구인지 웬수인지 알 수가 없다」 중에서

 


 

오희문이 끔찍이도 아꼈던 막내딸, 단아는 잔병치레가 잦은 소녀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희문 부부는 전쟁을 치르듯, 아이의 치료를 위해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특히,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할 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기 위해 발바닥에 땀 나듯 뛰었죠.

1596년 9월 25일 『쇄미록(鎖尾錄)』

단아의 병세가 약간 나아진 것 같지만, 여전히 말을 제대로 못 하고 밤새 통증에 시달렸다. 우리 부부는 서로 교대하며 밤을 새워 단아를 돌봤다. 며칠째 이러니, 내 정신이 어디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단아가 간신히 입을 움직여, “아버지……. 석류가 먹고 싶어요”라고 하기에 백방으로 구해봤는데 이 동네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 지인에게 석류가 있는지 물었더니, 저녁에 석류를 보내주었다. 단아는 석류를 보자마자 아픔이 무색하게 얼굴이 환해지면서, 그 자리에서 석류를 깨물어 반 개를 먹었다.

 


 

이 책은 ‘공명 유도서’다. 저자가 “책을 엮을 때 독자들이 일기 속 주인공과 충분히 공명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미리 밝힌 이유다. 일기의 주인공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생활상과 시대를 마주할 때 비로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조선이라는 나라를 온몸으로 느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의미는 회고나 복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재의 순간을 사는 우리 자신 역시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임을 깨닫는 데서 증폭한다. 저자가 원문 및 번역문을 쉽게 접하실 수 있는 생활일기들을 주로 선정한 것도 이 같은 매락에서다. 시시콜콜한 일상 속의 사건 중심으로 각 장을 꾸리면서도 등장인물들의 삶을 조망하기 위해 노력한 이 책을 통해 보통의 삶 따위 가뿐히 뛰어넘은 인생 선배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역사 해석의 새로운 길이 될 것이다.

 

저자 : 박영서

 

1990년생이며 충주의 작은 사찰에서 살고 있습니다. 금강대학교에서 불교학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철학 플랫폼 ‘철학이야기’를 도반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쓴다는 핑계로 골방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무언가에 완연히 몰입하는 시간만큼 행복해지는 시간이 없습니다. 역사는 저를 행복하게 하는 소중한 우물 중 하나입니다. 물 흐르듯 유려하거나 논리적으로 탄탄한 글을 쓰지는 못합니다.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도 잘 못 씁니다. 다만, 제가 울고 웃었던 것만큼 누군가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덕후’의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던 10대와 20대를 뒤로 하니, 이제는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어렵다’는 말이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시대 안에서 ‘어려워도 행복한 삶’이 어떤 삶인지 한번 살아보겠노라, 오기를 부리는 중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가르침,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인스타그램 : @ddirori0_099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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