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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길
레이너 윈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3월
평점 :
우리들의 삶에는 무수한 역경이 있고 전환점도 있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함께 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역경에 굴복해 삶의 의지를 잃고 방황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놀라운 투지를 발휘해 역경을 이기고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이 책 『소금길』의 두 주인공 레이너와 모스는 결혼 32년을 맞이한 중년부부다. 열심히 살았고 행복한 삶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더욱이 남편 모스는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희귀병 진단을 받는다. 늦은 나이에 이런 신세가 될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부부는 그야말로 맨붕 상태였을 것이다. 실제 "이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막연하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고 고백한다.
더는 내몰릴 곳 없는 벼랑 끝에 선 두 사람은 내일을 위해, 희망을 되찾기 위해 배낭 하나씩만 메고 영국 남서부 해안의 절경을 품고 이어지는 내셔널 트레일 코스인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패스’로 가기로 결심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길로 간 것이다. 이 길 사우스웨스트코스트 패스(South West Coast Path)는 영국에서 가장 긴 보도(步道)이자 국립산행로이다. '쥐라기 해안(Jurassic Coast)'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동부 데번의 엑스머스(Exmouth) 근처 오컴브(Orcombe Point)로부터 도싯의 스워니지(Swanage) 근처 올드해리록스(Old Harry Rocks)에 이르는 약 153km 길이의 해안을 포함해, 1,000km에 이른다. 책에서는 '무작정'이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잃을 것도 없는 처지여서 무모한 도전이 가능했으리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평범한 주부였던 레이너 윈이 쉰이 넘어 1,000km 도보 장정을 한다는 것은 쉽게 용기를 낼 일이 아니다. 더욱이 동반자 남편 모스는 희귀병 환자로 체력이 따라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부부가 다시 삶을 위해 시작하는 대장정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작했다.
열여덟에 처음 만나 서른두 해를 함께한 중년 부부 레이너와 모스. 수십 년 동안 머리를 누이고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집과 농장은 3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법정 공방 끝에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 모스가 겪고 있는 극심한 통증의 원인은 치료제도 없이 진통제로만 버텨야 한다는 희귀병, 피질기저퇴행이었다. 의사에 따르면 모스에게 남은 시간은 겨우 5년 정도이고, 치매 증상과 함께 몸은 점점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그대로 숨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레이너로서는 청천벽력도 이런 날벼락이 없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걷기 시작한 부부는 사실 그저 걷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 같지만, 이대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멍하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밤이 되면 자연 한가운데에서 텐트와 침낭을 펴 잠을 청하고, 위험한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절벽과 바다, 하늘을 벗 삼아 그 곁을 걷고 또 걸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1년여 동안 1,000km가 넘는 길을 묵묵히 걷는 동안 자연은 진심 어린 위로를 선물했고 그래도 희망이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중년의 부부는 배낭을 메고 마인헤드부터 시작하는 1,000km가 넘는 긴 여정을 두 사람의 발자국으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 않을 것이라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두 사람 앞에 놓인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어느 칠흑 같은 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밀려드는 파도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 텐트를 그대로 들고 해변을 달리기도 하고, 가진 돈이 없어 야영장에 몰래 들어가 조용히 텐트를 친 뒤 짧은 잠을 청하고는 빠져나오기도 한다. 한번은 큰맘 먹고 산 파이를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먹을 것을 찾던 약삭빠른 갈매기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겪는 레이너의 모습에 안타까움이 느껴지면서도, 위로인 듯 약 올리는 듯한 모스의 말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부부여서 가능했을까.
“우리한테 일정이 있었던가?”
“그야 물론이지. 이렇게 걷고 쉬다가 다시 우리 미래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걷고 또 걷는 거야.”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야.”(p. 110)
SWCP에 들어선 이후부터 이 초록색 텐트는 우리의 집이 되어 주었다. 매일 저녁이 되면 우리는 마치 의식이라도 치르듯 텐트를 치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다 들여놓았다. 우선 저절로 부풀어 오르는 깔개를 깔고 그 위에 작은 플리스 담요를 덮었다. 그런 다음 침낭을 편 후 우리 발이 닿는 곳에, 그러니까 텐트 문 앞에 배낭을 들여놓았다. 우리는 배낭을 열어 작은 주머니에 따로 들어 있는 조리도구를 꺼냈고 옷가지들을 꺼내 추위를 막기 위해 텐트 바닥 여기저기 빈 공간에 깔았다. 그리고 텐트 문 지퍼 위쪽 지붕 부분에 달린 고리에 손전등을 매달았다.
이렇게 준비가 다 끝나면 비로소 차를 끓이기 시작했고 모스는 짧게 편집된 《베오울프》를 읽었다. 우리가 가져온 단 한 권의 책이었다. 뭔가 의식 같은 걸 치르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편안히 잠에 빠져들기 전에 안전한 주변 환경을 만들어두려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고? 우리는 그런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한 결코 진정으로 편하게 잠들 수는 없는 것일까? 바닷가 어딘가쯤에 세워놓은 이 텐트 안은 중추 신경 진통제를 먹지 못해 벌벌 떨고 있는 죽어가는 한 남자와 내가 기대고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p.165~166, 「걷기」 중에서)
“어디로 가는 길이세요? 배낭여행을 하기에는 좀 시기가 늦지 않았나요?”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와 모자 달린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우리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이렇게 물었다.
“랜즈엔드로 가요. 그다음은 아마 날씨에 달려 있겠지만, 어쨌든 계속 걸어갈 겁니다.”
“얼마나 더 갈 건데요?”
“그야 우리가 가고 싶은 만큼.”
“아니, 그럼 돌아갈 계획이 없다는 거예요?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로 대단들 하시네요. 일상을 박차고 나와서 원하는 일을 하다니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서요.”
“아니, 내 말이 맞잖아요. 돌아갈 계획이 전혀 없다면 자유롭게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거지요. 정말 대단합니다.”
남자는 다른 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나 이렇게 외치는 걸 잊지 않았다.
“어르신들, 인생을 즐기세요.”
우리는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빨리 움직이고 있으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걸어서라면 몇 시간은 걸릴 거리를 단 몇 분 만에 가고 있는 것이다. SWCP는 우리에게 걸어서 가는 길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실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게 되었고 출발 지점에서 다음 목적지까지 그리고 다음에 목을 축일 수 있는 곳까지의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중략) 우리는 그렇게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p.298~299, 「살가죽」 중에서)
“우리가 과연 잘한 걸까?”
모스가 진통제 네 알을 삼키고는 바위 위에 앉았다. 나는 중국 약재상에서 구한 진통제 연고를 그의 어깨에 발라주었다. 삶은 양배추 냄새를 풍기는 이 약은 효과는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고 있다는 기분은 들게 해주었다.
“우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어. 방이 필요하면 우리가 번 돈으로 방을 얻으면 되고 당신은 다시 공부를 하고. 그리고 나는 또 뭐든 일을 찾을 수 있겠지. 아니면 나도 뭘 다시 배우던가. 그렇지만 이제는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된 거야.”
“그래, 나도 알아. 그건 확실하지. 내 말은 이렇게 다시 걷고 있는 게 잘한 선택이냐는 거지.”
“우리가 살면서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일 거야.”
“그렇다면 좋아. 사실은 그 말을 당신에게서 듣고 싶었지.”(p. 454~455, 「생명의 기운」 중에서)
우리는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몸이 갈색 가죽처럼 바짝 말라갔다. 14개월 전만 해도 힘없이 늘어져 있던 연약하고 창백했던 우리의 몸은 이제 군살 하나 없이 햇볕에 탄 몸이 되었으며 영원히 되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탄탄한 근육까지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형편없이 상해 있었으며 손톱은 부러졌고 옷은 올이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닳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시간만 죽이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일분일초가 지나가는 것을 잘 알고 그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바위는 점점 기울어가는 태양을 따라 그대로 열기를 전달해주었고 바닷물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갈매기들은 각자 다른 소리로 울어댔다. 내 손은 시간이 갈수록 주름이 더해졌고 허벅지는 먼 길을 걸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모스가 나를 끌어안고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분명한 열정으로 서둘러 내게 입술을 가져다 댔을 때 갑자기 시간이 거꾸로 흘러갔다.
나는 19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모스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의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순식간에 자라버린 갓난쟁이들의 엄마였다. 우리는 우리였고, 우리가 살아간 일분일초도 우리였고, 온갖 경험을 넣어 푹 끓인 인생이 바로 우리였다. 우리는 우리가 되기 원했던 모든 것이었으며 동시에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모든 것이기도 했다.(p. 532~533 「소금길」 중에서)
이 책은 저자 레이너의 첫 번째 책이다. 『소금길』은 1년여 동안 1,000km가 넘는 길을 묵묵히 걷는 동안 경험한 가지각색의 사람들, 쉽지 않은 여정 그리고 자연이 두 사람에게 선물한 진심 어린 위로와 희망을 담았다. 무려 550페이지에 이른다. 영국에서는 출간 직후부터 수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선물하며 여러 매체의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관찰 예능을 보는 듯한 현실감 넘치는 부부의 살아 숨 쉬는 이야기와 함께 영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유려하게 묘사한 문장으로 가득차 있다고 평가를 받았다. 이 책은 유례없는 세계적 팬데믹 속에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함께 다시 한 걸음 내디딜 용기를 준다.
당장 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팬데믹 상황으로 오가기가 몹시 어렵고 불편하다. 더욱이 여느 때와 달리 반길 리도 없을 터, 이들 부부가 간 길을 따라 독자의 삶에 희망과 용기를 담아오고 싶다.
저자 : 레이너 윈
자연의 치유력과 캠핑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이자 장거리 워커(walker). 3년여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법정 공방은 손수 일군 집과 농장 등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되었다고 느꼈던 그때, 남편 모스와 함께 영국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약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내셔널 트레일인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패스’를 무작정 걷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걸음을 옮기면서 경험한 자연이 준 위로와 희망을 첫 책 《소금길》에 담았다. 출간 직후부터 수많은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며 위로를 선물한 이 책은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코스타 북 어워드’와 생태와 환경 분야 도서에 수여하는 ‘웨인라이트 프라이즈’의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금길》 이후 새로운 터전에서의 정착 과정을 담은 《와일드 사일런스》가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