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극단과 광기의 정치
유창선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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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산 시장 선거가 야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서울 25개, 부산 16개 등 전 행정구에서 야당인 '국민의 힘'이 이겼다. 말 그대로 '싹쓸이'다. 지난 1년 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는 180석을 여권에 몰아준 민심이 불과 1년만에 정반대 양상으로 뒤짚힌 이유가 뭘까.

정계는 물론, 정치평론가들, 정치부 기자들의 의견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부동산 정책 실패뿐만 아니라 LH 직원이 개발 정보를 빼내 투기한 사실이 드러나자 그동안 야당의 대여(對與) 비판 구호였던 '내로남불'까지 오버랩되면서 민심이 완전히 이반됐다는 평가다. 그렇잖아도 코로나 백신 접종률과 백신 확보율도 당초 발표했던 목표치에 못 미쳐 'K 방역'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던 민심이었다. 보수 언론들의 포성은 더욱 가열되고 있고, 민심 또한 보수 언론에 다시 한 번 눈길을 주는 모양새도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보수 지향적 중앙일간지 신문은 제목부터 매우 온화하게 뽑아내며 단순 사실 보도에 그치고 있다. 아직 확정이 안 되어서 그런가? '정권 심판', '압승' 정도로 순화되고 절제된 제목으로 보도했다. 날선 내용의 기사는 있어도 제목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선거일보다 조금 앞서 출간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유창선, 인물과사상사 刊)는 이미 시장 선거 결과를 예상하는 듯한 내용의 책이어서 눈길이 더 간다.

유창선 저자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비판적 논객으로 분류돼 입각이나 정부 주요 정책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오히려 수난을 겪었던 분이다. 저자는 정치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1990년 대부터 활발한 정치 평론을 해오던 우리나라 1세대 정치평론가다.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도 그를 배제시켰다. 현실과의 타협이 아닌 자발적 고독을 선택해 동네 독서실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써가며 자신을 지켜온 저자는 이번에 칼을 빼들었다. 단죄의 칼이 아닌 '올바른 정치'를 위한 논객으로서의 칼이다.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 시기와 겹쳐 있다. 책의 내용도 현 정권의 실정과 불공정 정책, 중요 자리에 있는 사람의 부패와 비리, 비판에 대한 대응 방법의 몰염치 등 야당의 공격대로 '내로남불'이 점점 커진 상태인데도 염치 없이 보궐선거에 또 후보를 냈다. 두 곳 모두.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조심스럽게 발표해오던 지지율은 정확하지 못했다. 여론조사 기관에서 발표한 것보다 훨씬 큰 격차로 당락이 갈렸다. 변명도 있을 수 없는, 정부로서는 완패, 야당으로선 압승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진영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다시 배제된 후 저자는 "저쪽의 민낯도 보고 이쪽의 민낯도 본 사람으로서 내 머릿속은 회색이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에서 강조한다. 자신의 신념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성찰할 줄 모른다. 이들은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거를 제시해도 귀를 닫아버린다.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옳고 내가 선이라는 신념을 지켜야 불굴의 정신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과신하지 말고 내가 행했을 수 있는 불의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내가 잘못했을 수도 있음을 어째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인가? 프랑스의 철학자 제라르 벵쉬상은 “내가 정의롭다고 믿을수록, 또 이러한 믿음에 만족할수록 나는 덜 정의롭다”라고 말했다.

서로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정치적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의 감정이 여과 없이 표현된다. 이는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해 자신의 생각만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는 ‘정치적 신앙인’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정치가 종교와 다른 이유는 내가 믿는 하나의 것만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종교화는 맹목과 맹신과 광기만을 부추긴다. 감정과 정념의 정치는 숭고한 대의로 무장할수록 극단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나만이 옳다는, 그리고 너는 모두 틀렸다는 불변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신념 속에서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를 통해 '극단과 광기가 난무하는' 문재인 시대를 비판한다.

 


 

책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는 대화와 타협은커녕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행태를 계속해왔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 세력은 우리만이 선이고 우리만이 옳다는, 성찰과 회의를 모르는 독선의 정치를 해왔으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내로남불의 정치를 해왔다. ‘촛불 정부’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에서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폐라고 단죄되고, 의견이 다르면 토착왜구라고 낙인찍힌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소통과 공론의 장은 사라졌고, 서로가 극단적인 자기주장만 반복해서 외친다. 더구나 그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리더십은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보다 심하게 분열되었고, 극단의 시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는 그래도 ‘착한 권력’인데, 왜 야당을 비판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권력을 비판한다는 것이 야당에 문제가 없다는 의미는 전혀 아닐 것이다. 다만 한국 정치의 과거에 대한 책임을 보수 야당에 물었다면, 적어도 오늘에 대한 책임은 현재의 집권 세력에 묻는 것이 균형 있는 태도다. 더구나 현재의 집권 세력은 대통령, 행정부, 국회, 지방자치단체, 지방의회 등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권력이 아니던가. 그런 권력에 오늘의 현실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자의 비판은 계속 이어진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6년 말의 겨울, 나라의 기본이 무너진 상황에서 국민들은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촛불을 들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쓰일 것이라는 기대가 가슴속에 충만했다.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문재인에 대한 지지율이 80퍼센트를 넘었던 현상은 그 기대가 얼마나 컸던지를 말해준다. 정권만 쥐면 권력에 도취되는 한국 정치사의 악순환에 종지부가 찍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것이 문재인 정부의 역사적 소명이었다. 그러나 갈등은 격화되었고, 국민들은 실망에서 체념으로, 다시 절망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극단과 분열의 상처가 깊어만 가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국민들을 비통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와 함께 문재인 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성찰할 줄 모른다고 날을 세운다. 오직 비판자들을 악마로 만들어버리는 선악 이분법을 구사한다고 말이다. 더구나 선악 이분법이 정치적 의도와 맞물릴 때 악마 만들기의 폭력은 기승을 부리게 된다.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상대방은 악마로 규정되고 돌팔매질을 당한다. 이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 사이에서 인간의 다양한 생각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본래 정치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모색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국민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서로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반목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광신적인 팬덤 정치가 낳고 있는 온갖 비이성적인 형태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시대의 이성을 욕보이고 있다. 오늘 한국 정치에서는 사실에 근거한 이성적 토론보다는 감정과 정념의 언어들이 지배하는 상황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실책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의 기강 해이가 연이어 물의를 빚어도,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어도, 조국 사태가 일어났어도, 추미애와 윤석열이 갈등을 했어도, 민주당 광역단체장들의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어도, 입법 독주를 했어도, 결국 문제의 출발은 그렇게 단추를 채웠던 집권 세력의 책임이었건만, 좀처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제나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검찰의 탓이요, 검찰 편에 선 기레기들의 책임이며, 정권의 발목을 잡으려는 야당의 탓이다. 이들은 자신들만 도덕적으로 옳고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적폐에 대해 준엄했던 정권이라면 그 이상으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들에게도 준엄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문재인은 국정 운영에서 진영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선언한다. 집권 초 적폐 청산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힘입어 지지율이 고공 행진을 했던 문재인 정부는 이를 자신들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착각해 모든 것을 우리끼리 해나갈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 즉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사 문제도 진영의 울타리에 갇혀 자신들끼리 국정을 운영하려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추미애와 윤석열의 갈등으로 나라가 혼돈과 분열의 늪에 빠져 있는데, 문재인은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무능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 것이 부동산 정책일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학자 존 킨은 “민주주의는 겸손한 자들의, 겸손한 자들을 위한, 겸손한 자들에 의한 통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무능하면서 겸손하지도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DNA인 것 같다고 뿌리부터 의심한다.

 


 

저자는 이와 함께 윤석열 검찰총장이 2021년 3월 4일 임기 4개월여를 남겨놓고 전격 사퇴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 세력은 ‘검찰 개혁’을 주장해왔지만, 그것은 ‘검찰 장악’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추미애는 윤석열의 징계를 밀어붙이기까지 1년 내내 무리한 언행을 하면서 법치의 책임자가 법치를 무너뜨린다는 비판을 초래했다고 몰아붙인다. 특히 윤석열에 대한 징계는 숱한 편법과 위법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검찰 개혁은 국민적 합의처럼 되었던 사안이다. 비대한 권력이 되어 부패한 검사 감싸기를 거듭해온 검찰 권력을 개혁하자는 데 반대할 국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윤석열 몰아내기가 전부였던 검찰 개혁은 그런 국민적 합의에 심각한 균열을 내고 말았다. 그것은 순수한 의미의 검찰 개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권력에 칼날을 들이댄 검찰총장에 대한 응징이었다. 앞으로 정권 관련 인사들의 비리가 있다면, 누가 감히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더구나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훼손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검찰 개혁이라고 믿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추미애가 윤석열 몰아내기에 몰두해도 집권 세력 내에서 이를 말리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임명한 법무부 장관이 그 난리를 쳐서 민심이 등을 돌리고 있는데도, 거기에 제동을 걸지 못한 문재인의 무능과 무책임의 결과다. 민주당도 무능하고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식과 이성을 갖고 있고 민심을 무섭게 여기는 정당이라면 법무부 장관의 난폭한 언행과 법규를 무시하는 조치에 대해 제동을 걸었어야 했다. 민심의 편에 서서 조국과 추미애를 비판했던 금태섭이나 조응천 같은 정치인들은 징계를 받았거나 지지자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했다. 검찰 개혁의 핵심이었던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쓰레기통에 던져진 채 검찰은 결국 정권의 하수인이 되고 말 것으로 예측한다.

 


 

야당의 대여 공격 지점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른바 '내로남불'에 대해서도 한마디 보탠다. 내로남불의 정치는 정치적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법이다. 또한 진실을 덮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라도 승리를 거머쥐려는 비겁한 행태다. 내로남불의 정치는 도덕적 우월의식에서 나오며, 겸손을 모르는 오만의 정치와 맞닿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내로남불이 여야 불문하고 저질러지고 있으며, 여야 정치인들이 서로를 내로남불이라고 비난하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여야가 올바른 정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나쁜가?’를 가지고 싸우는 꼴이다. 그래서 합리적 보수와 건전한 진보가 없는 것인가?

어느 정권하에서든, 인사청문회만큼 내로남불의 정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도 없다. 여당은 지난 정권하에서는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 비판했던 사안들에 대해 감싸주기에 급급하고, 야당은 지난 정권 시절 바로 자신들이 행했던 일들을 단죄하는 정의로운 심판자로 변신한다. 우리 편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방패가 되어주려는 정파적 충성을 하기 위해 정치적 소신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일도 다변사다. 여와 야가, 보수와 진보가 서로 욕하면서 닮아버렸다는 비판이 지나치지 않다. 내로남불에 익숙한 정치인일수록 자신의 변신에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정치인들이란 숙명적으로 낯 뜨거운 존재들인지 모른다.

내로남불의 바탕에는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선민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나 자신이든 혹은 같은 진영 내의 누군가의 문제가 드러나도, 그 잘못은 쉽게 이해되고 정당화된다. 국회 인사청문회 때마다 반복되었던 내로남불은 문재인 정부의 인재풀도 다를 바 없다는 회의론을 증폭시켰다.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김의겸은 ‘영끌’해서 부동산을 매입해 내로남불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지난 정권에서 방송 장악을 그렇게도 비판했던 문재인 정부의 집권 세력은 ‘착한 방송 장악’의 수혜자가 되었다. 물론 지난날 자신들이 했던 행동은 눈감은 채, 문재인 정부가 방송 장악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던 보수 야당도 낯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야당도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인 것 같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발전한다고 확신한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에서 출발해 다양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합의를 이끌어내는 제도라는 원론으로부터 말을 꺼낸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그러니 자기와 다른 의견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하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다른 생각과 공존할 수 있다는 정신이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 이는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 문화에 기댄 집권 세력의 정파 이기주의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집단적 광기 앞에서 인간들의 합리와 이성이 패배하는 사회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세상이다.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고 말했다. 이러고도 우리가 민주주의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있을까?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에 대한 지나친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자는 결국 민주주의를 죽게 한다. 나와 다른 의견, 그러한 의견들을 가진 사람들과 공존하며 살아갈 마음이 있는 사람들만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고, 보수적인 사람들도 있으며, 어느 한쪽에 고정되지 않은 중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자기 자신을 진보나 보수라고 말하지만, 막상 그 안에서도 결이 서로 다르다. 또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념과 가치에 따라, 직업과 계층과 계급에 따라, 혹은 사회정치적 지위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갖는다. 민주주의를 하는 사회에서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굳이 그런 차이들을 하나의 것으로 통일시키려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적군 대하듯이 하는 데는 역사의 그늘도 작용했을 것이다. 8·15 해방 이후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좌우의 이념 대결로 점철된 역사를 살아왔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을 했고, 서로를 죽였고, 그로 인한 증오의 정념은 한국 현대사를 지배해왔다. 더욱이 오랜 독재권력의 시대를 거치면서 독재와 민주의 이분법에 세상을 흑과 백의 논리로 보는 데 익숙해졌다. 그 중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역사를 살아온 우리에게는 서로 다른 이념과 생각에 대한 증오가 정치적 DNA가 되어 머릿속에 박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21세기로 들어선지 20년이나 지난 요즘도 민주주의 원론을 얘기하며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앞날을 얘기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독자의 입장으로도 우리 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아무것도 보탠 것이 없음을 자성하고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책을 통해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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