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한수산 지음 / &(앤드)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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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반갑고 그리움이 복받쳐온다. 문학을 알면서 가장 처음 '작가'의 존재를 가르쳐주었고, '작가란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각인시켜 준 분이다. 독자가 한수산을 만난 적은 없다. 글로써, 글로만, 그의 작품으로만 만난 분 중의 한 명이다. 그의 글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안개였다"라는 글귀가 나오는 작품이다. 작품명마저 잊었지만 그 문장만은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그 글귀가 독자에게 문학을 가르쳐주었고,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준 귀절이다. 그 글을 읽을 때는 한수산 작가가 춘천에서 생활한 사람인 줄도 몰랐다. 막연히 작품 속의 안개가 잘 끼는 도시를 '춘천'으로 설정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꿈‘내가 아는 모든 것은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안다.’

 


 

한수산의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은 에세이다. 그는 소설을 고집하고 에세이를 많이 쓰지는 않는 작가다. 아마 이 책 속의 스승 황순원 작가의 영향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한다. 황순원 작가도 수필이나 에세이 등은 일절 쓰지 않았다. 그가 쓰는 글은 오로지 소설이었다. 심지어는 수필을 '잡문'이라고 한 분이라 소설을 쓰는 사람은 소설만 써야 한다는 자신의 문학관을 끝내 지킨 분이다. 황순원과의 제자로서의 한수산이 거기에 적잖이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또 하나 더, '문장은 간결할수록 좋다'는 황순원 작가의 지론을 잘 지킨 분이 한수산 작가가 아닌가 한다. 그의 초기작부터 3년간 서커스단을 쫓아다니며 그들과 숙식을 같이해 한 식구처럼 됐다는 『부초』라는 장편소설을 쓸 때까지 그의 글은 간결했다. 간결하지만 앞뒤 문장 연결은 굉장히 자연스러웠고, 독자로서는 한 호흡에 한 문장씩 읽어나가니 이해가 쉽고, 작품속으로 빠져들기 쉽다. 또 간결한 문체는 글에 힘을 준다. 호흡이 빨라지니 자연스레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듯 한수산 작가는 황순원 작가처럼 간결한 문체의 수제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한수산은 표현의 적절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신이 '자란 곳이 춘천이다'를 '나를 키운 건 8할이 안개였다'로 표현할 줄 아는 문장 천재다.

 


 

이 책을 처음 광고로 접했다.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의 글은 물론 오랫동안 소식을 몰랐는데 갑자기 쓴 책 한 권 들고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작가에게 이렇게 마음이 쏠렸나 오히려 스스로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가다듬고 광고에 나온 소개글을 몇 줄 읽었다.

여전히 그의 문장은 좋은 것 같다. 광고 카피마저 시(詩)처럼 느껴진다. 그는 독자에게 어느 날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람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안개속에서 서서히 걸어나왔다. 반가움과 그리움 등이 겹치면서 묘한 감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그동안 어디서 뭘했는지는 지금 막 안개속에서 걸어나온 것 같은 사람에게는 별 뉴스거리가 아니리라. 책을 읽으면서 언뜻 언뜻 드러나는 행적을 추정하는 수밖에.

 


 

한수산 작가는 이 책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오른 생각으로 '작가의 말'을 대신하고 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이 말이 그때 왜 불현듯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을 때의 일이었다. 열차 안에서 10박 11일을 머무는 동안, 나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갔다. 소실점을 이루며 끝이 보이지 않게 뻗어나간 전선주를 따라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처럼 앉아 있던 새들은 열차가 지나가면 새카맣게 날아올랐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자작나무 숲이 차창 밖으로 몇 시간씩 변함없이 이어져 마치 한 폭의 풍경화가 걸린 듯했던 대륙의 시간이었다. 그때 마음속을 가로질러가 말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그것을 사랑했기에 알게 된 것들인가,"

 


 

‘작가의 말’ 맨 첫 문장으로 등장하는 이 말은 소설가 한수산이 지난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대륙의 시간을 건너 노년이라는 간이역에 이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인 듯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꿈꾸었던 여행지는, 청춘의 진혼곡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세 곳.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있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테너시 윌리엄스가 살았던 미국 플로리다주의 키웨스트 그리고 화가 폴 고갱이 묻힌 히바오아섬의 갈보리 묘지다. ‘언제쯤’ ‘꼭 이곳만은’이라는 단서를 붙이며 그리워했던 곳이다.’

27년의 작가 혼을 불살라 일제의 강제징용 문제와 역사 왜곡을 고발한 소설 『군함도』의 작가 한수산의 독백이다. 살벌한 역사의 전쟁터에서 이제 막 귀향한 군인처럼 드디어 우리는 문학의 본령으로 돌아온 그의 아름다운 문체를 만날 수 있다. 산문시처럼 투명한 문장과 깊은 사유의 언어로 다시 독자를 찾아온 소설가 한수산. 더 향기롭고 그윽해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독자들은 하룻밤 사이 머리칼이 하얗게 새버린 콜베 신부가 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결코 짓밟혀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서의 자존, 끝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찾아 헤맸던 꿈과 자유, 결코 물러설 수 없었던 그 모든 가치가 하나씩 붕괴되고 무너지는 것을 볼 때 그리고 더 이상 그것을 지킬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존재는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서글퍼진다. 이제는 그리움도 아픔이 된다는 소설가 한수산의 고백 앞에서 더욱 처연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오랜만에 만나는 한수산의 산문집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을 통해 독자는 그가 잠시 열어두었다는 마음속 다락방으로의 아름다운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백발이 되어 있을 한수산 작가의 모습이 그리웠는데 마침 책 표지 안쪽에 그의 근황을 추측할 수 있는 사진이 게재됐다. 젊은 날의 한수산의 모습은 아니다. 그때는 꽤 날렵한 몸매에 눈이 조금 크게 느껴졌다. 대신 중년의 모습으로 활동적인 제스처가 자연스러워 건강한 모습이어서 다행스럽다. 그의 오랜만의 책을 다 읽지 않았는데도 왠지 오늘 밤은 잠을 잘 잘 것 같다.

 

저자 : 한수산

 

194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월의 끝」이 당선되고 1973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해빙기의 아침』이 입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부초』 『유민』 『푸른 수첩』 『말 탄 자는 지나가다』 『욕망의 거리』 『군함도』 등이 있다. 오늘의작가상, 현대문학상, 가톨릭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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