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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년
이인화 지음 / 스토리프렌즈 / 2021년 2월
평점 :
작품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작가 이인화의 불행한 일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터, 그의 개인사를 들먹이고 싶은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독자는 저자가 그 고초와 고통을 오롯이 홀로 감내하고 극복해낸 사실이 반갑다.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문학적 회복을 구원하지도 않았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 논리 속에 저자의 시간은 멈췄을지도 모른다. 그의 문학적 성과와 노력의 바탕으로 학교 강의도 맡았고, 바쁜 강의 일정으로 문학에서 잠시 떨어져 있었던 게 화근일까, 아니면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중용'의 위치를 망각하고 사사로운 정이나 위계 질서의 위력 앞에 잠시 한눈을 팔았던 잘못에 대한 신(神)의 벌일까. 어쩌면 사회의 흐름에서 일탈한 행위를 꾸짖는 것일까. 독자로서는 그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며 저자가 다시 문학의 세계로 돌아와 독자를 위한 글쓰기, 세상을 위한 글쓰기 본업을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이 고맙기만 하다. 그런 이유로 이 책 『2061년』에 애착을 더 갖게 된다. 이 책에서 하룻동안 벌어지는 일은 저자 개인의 시간일 수도 있고, 우리 국민의 시간일 수 있고, 하루일 수 있고 영원일 수 있다는 점을 느낀다.
독자의 판단보다는 저자가 이 책 말미 「작가의 말」에 직접 쓴 글을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에 인용한다.
"나는 5년 전부터 외톨이가 되었다. 직장도 없어지고 사람들과의 연락도 일절 끊어져서 나와 사회 사이에는 무엇 하나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번민으로 밤을 지새운 뒤에 걷는 새벽길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까지 훤히 꿰뚫려 보였다.
나로부터 저 만치 멀리 떨어진 시대는 팬데믹과 인공지능이라는 두 가지 힘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 깊고 빠른 운명의 균열이 삶의 구석구석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이면으로 들어가 우리에게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어떤 것, 대체불가능한 것, 그래서 이 혼돈의 시대 뒤에 출현할 새로운 것을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과학기술과 관련된 외부로부터의 거시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가능성 가운데 무엇을 실현할지 선택하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내재적인 것,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된 어떤 것이다. 한글은 가장 발달한 문자, 모든 언어가 꿈꾸는 알파벳이라고 한다. 이런 알파벳을 대영제국이나 미합중국 같은 지구 문명의 중심부가 아니라 한국인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자학적 사치’라고 말해진다. 나의 이 글은 ‘문자학적 사치’에 대한 탐구이다.
오래 전 세종 이도라는 고독한 사나이가 국경을 넓혀 민족을 재구성하고 그 민족을 위해 이 글자를 만들었다. 이도는 새로운 민족의 사고에 뭔가를 새겨 넣었다. 지금 남북으로 나뉜 우리는 이 글자로부터 강력한 불꽃을 나눠 받았다. 전쟁을 겪고 갈등을 겪었지만, 우리의 결속은 그리 약하지 않다. 백두산이 폭발하면 같이 죽을 사람들. 그 존명 공동체의 미래를 밝힐 횃불이 이 글자 안에 타오르고 있다. 지금 이 횃불을 높이 들어 캄캄한 밤을 밝히고 우리 힘의 결속을 세상에 꺼내놓을 때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글쓰기 주 재료는 역사다. 이는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을 바탕 삼아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는 작가적 눈과 판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전작 『영원한 제국』도 우리의 과거 조선으로 갔다. 저자는 정조 시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역사적 인물들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그들이 남긴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한 바 있다. 독자가 과문(寡文)으로 저자의 다른 작품을 전부 읽지 못한 점을 미리 용서를 구하고, 저자의 이번 소설 『2061년』도 역사소설의 범주에 넣어도 문제가 없을 작품으로 판단한다. 물론 얘기의 시점으로는 2061년인 가까운 미래이지만 실제 사건이 벌어지고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내용도 대부분이 과거 역사의 현장이고, 배경이다. 독자의 표현으로는 'SF요소의 역사소설'로 규정하고 싶다. '1896년'이란 연도의 역사적 의미는 무한하다.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기 1년 전이고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1년 후이다. 제물포는 지금의 인천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가장 가까운 국제항 구실을 하던 곳이다.
소설의 발단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2061년으로 설정돼 있다. 이도 문자를 쓰는 인공지능들이 이도 문자 데이터의 저작권자인 한국인들을 제거한다. 가족을 잃은 시간여행 탐사자 심재익은 최악의 팬데믹을 막고 역사를 되돌릴 수 있다는 말에 설득되어 1896년 조선으로 이동한다. 이도 우파, 이도 좌파, 반이도파의 탐사자들이 팬데믹 바이러스의 원형 균주와 훈민정음해례본을 차지하기 위해 1896년 제물포에서 격돌한다.
전염병 바이러스가 2013년 메르스, 2020년 코로나 19와 같은 추세로 진화한다. 인공지능이 2015년 알파고, 2020년 알파폴드 투, 지피티 쓰리와 같은 추세로 발전한다. 2061년 전염성과 치명성이 극대화된 바이러스 아바돈이 출현하고, 이에 대응하는 전 지구적 인공지능 방역시스템 '이도의 무지개'가 가동된다. 이도의 무지개는 인간, 동물, 식물, 기계, 토양, 바다, 공기의 7개 영역에서 인간의 가청주파수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소리를 감청한다. 그리고 이 천지자연의 소리를 ‘ ?’ ‘ㅡ’ ‘ㅣ’의 3 기본 모음으로 시작하여 398억개의 분절음을 만드는 자질문자, 이도 문자로 표기하여 바이러스 변화와 전파를 파악하고 차단하는 시스템이다.
2061년은 세종 이도의 문자와 사상이 지배하는 이도리안 문명기. 세계의 모든 정치 세력이 이도 우파, 이도 좌파, 반이도파로 나뉘어 있다. 세 세력은 1896년 2월 11일의 제물포로 시간여행 탐사자들을 파견한다. 탐사자들은 제물포의 일본군, 미국 선교사, 여의사, 세계어 운동가, 철벅이, 유곽 창녀, 만인계 도박꾼, 하역 인부 사이에서 팬데믹 바이러스의 원형 균주와 훈민정음해례본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한다. 야인 여진을 민족 내부로 수용하면서 한글이라는 문자가 창제되던 과거가 소환된다.
기계 혼종인, 인체 임대인, 철벅이, 유곽 창녀, 만인계 노름꾼, 세계공동어 운동가, 아편쟁이, 부두 하역 인부 그리고 시간여행 탐사자들. 경이로운 인물들로 가득 찬 미스터리 스릴러. 2061년에서 1896년으로, 다시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1896년 2월 11일 하루 동안 영원 같은 역사가 지나간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수의 이색적이며 한 번 들어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용어들을 미리 몇 개만 정리한다.
실라리엔 관통선 : 과거의 한국으로 뻗어 있는 시간 폐곡선
치명적 옛 것 : 과거 치사율이 높아 숙주를 너무 빨리 죽였던 바이러스
인체 혼종인 ; 자신의 뇌에 전자칩을 이식해 몸을 인공지능에 임대한 사람
아바돈 : 예측되는 최악의 코로나 바이러스
데모닉 : 1896년에 발생한 아바돈의 치명적 옛것
이도의 무지개 : 바이러스가 일곱가지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변화를 보이게 하는 것
“너희가 한 일은 고작 젊은 객기를 주체하지 못한 뚱보를 숭배한 거였어. 그 뚱보의 유일한 욕망은 총을 들고 군인들과 장난질 하는 거였고 유일한 업적은 보천보 오지로 기어와서 경찰서에 방화하고 민간인 한 명을 죽인 거였지. 멍청한 성황당 숭배였어. 너희들은 열등감과 백일몽 때문에 삶 전부를 희생했던 거야.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대해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야겠다고 바라던 이상을 투사했어. 한때 성리학에 오염되었던 인간들이라 심리적으로 너무 취약했거든. 성리학 환자였어. 세상의 짐승스러움에 상처받고 세상에는 도나 천리 같이 정연한 질서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는 거지. 그래서 정신적인 승리를 추구하다가 집단적으로 돌아버린 거야.(p. 334)
검은 먼지 하늘이 온다면 너같이 교만한 자들은 보답할 가능성이 없는 좋은 사람들의 사랑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야. 그들의 온순하고 겸허한 말들이 네가 멸시했던 진실임을 깨달을 것이야. 왜 네 이웃과 착하게 대화하지 않느냐. 너희 무조가 무어라고 했느냐. 새벽의 여신 우얼둔이 꽃피는 해안에서 하얀 머리 산으로 달려올 때. 하일레 나무가 그 길 끝에 버들솜을 눈처럼 날리며 서 있을 때. 인간과 까치의 결혼으로 태어난 신성한 수령이 하일레 나무 앞에서 묵상에 잠겨 있을 때. 무수히 일어나는 천지자연의 소리를 들으라 하지 않았더냐.(p. 357)
조선인들은 여진족을 팔천(八賤)이라 부르면서 백정, 무당, 노비, 광대 같이 대접했다. 서북 사람에겐 벼슬도 주지 않았다. 말로만 동족이었다. 여진은 조선에게 문명의 이름으로 복속당했다. 조선이 일본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수치를 겪었다. 내가 문명이다, 더러운 반편들아. 게을러터진 무지랭이들아. 너희는 나를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흉내 내어야 해. 그러면 나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언젠가 비슷해질 수는 있을 거야……. 오만한 대동주의와 장형의식의 끝은 언제나 최악의 결별이었다.(p. 360)
저자 : 이인화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계간 [문학과 사회]로 등단하여 89편의 문학평론을 발표했다. 1992년 제1회 작가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시작으로 『영원한 제국』『인간의 길』『초원의 향기』『시인의 별』『하늘꽃』『하비로』등 18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한국적 팩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영원한 제국』은 미국, 프랑스, 스페인, 일본, 중국, 대만, 몽골 등에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추리소설 독자상, 중한청년학술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창작 발레 [신시21] 설치미술 [아슈켈론의 개] 오페라 [눈물 많은 초인] 영화 [청연] 등의 시나리오를 썼고 온라인 게임(MMORPG) [쉔무] [길드워] 등의 스토리 작업에 참여했다. 웹전략 게임(MMORTS) [인페르노 나인]을 개발했으며 영화·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저작도구인 ‘스토리헬퍼’를 개발 중이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