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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이 그림 여행 - 화가의 집 아틀리에 미술관 길 위에서 만난 예술의 숨결
엄미정 지음 / 모요사 / 2020년 12월
평점 :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의 일상을 빼앗아갔다. 일상은 아니지만 교통기관의 발달로 이른바 '하루면 갈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길이 어느날 갑자기 막혔다.
이처럼 코로나는 우리의 세상을, 일상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묻는 설문조사에 압도적으로 1위에 오른 것이 '여행'이다. 물론 국내 여행이든, 해외 여행이든 구분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생활 필수 요소인 의식주가 아닌 여행이 선택된 것은 우리 생활이 그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여행을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로움의 '대명사' 역할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인간에게는 여행 본능이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풍요로운 생활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구나 하는 성찰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가 풍요와 편리를 계속 추구해온 '벌'이라는 급진적 반성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나가도 조금 멀리 나갔다는 느낌은 있지만 우리 일상에 대한 반성할 것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고 교훈적인 지적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 책 『후회 없이 그림 여행』의 저자 엄미정의 말도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었다. 연차를 모으고, 차곡차곡 적금을 부어서 때가 되면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하늘 길이 막혔다. 한두 달이면 끝나겠지 했던 팬데믹 상황은 일 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백신이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자유로운 해외여행은 언제 가능할지 아무도 점치기 어렵다. 갑자기 조바심이 생긴다. 이러다가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영영 못 보는 게 아닐까. 고흐와 세잔과 마티스의 흔적이 가득한 남프랑스는 아예 가보지도 못하는 건 아닐까.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라는 말은 백번 맞는 말이었다. BTS의 RM조차 팬데믹 상황이 끝나면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은 오르세 미술관이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라며..."

이어지는 저자의 말은 저자가 예술, 특히 미술(그림)에 관해 얼마나 극한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단초를 준다.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품은 여행지가 있다. 고흐의 아를,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 마티스의 니스… 미술사에 좀 더 관심이 있는 이라면 살인범이 되어 로마에서 나폴리, 시칠리아까지 도망 다닌 카라바조의 길을 따라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혹은 클림트가 정사각형의 캔버스를 가득 채운 꽃과 물과 하늘을 보러 아터 호수에 가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책에 실린 도판을 보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열망, 직접 원작을 보고 싶은 열망은 언제나 그림 여행을 꿈꾸게 한다. 어쩌면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림 여행은 어느
퇴락한 마을의 성당, 아틀리에, 낡은 집으로 이어진다. 화가의 구체적인 삶의 흔적을 좇는 여행이야말로 그림의 성배를 찾아가는 진짜 여행이므로. 언제 다시 떠날 수 있을까?"
출판사에 따르면 이 책을 쓴 저자는 ‘떠날 수 있을 때’ 떠났다. 미술사를 전공한 뒤 미술책을 번역하고 편집하는 일을 한 터라, 화가의 눈으로 그림을 보고, 풍경을 보고 싶은 열망은 그 어느 누구보다 강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부분의 프리랜서 번역가는 살림이 넉넉지 않다.
프리랜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마감을 맞추느라 시간에도 늘 쫓긴다. 처음 출판사에 그녀가 서른 곳이 넘는 도시가 표시된 지도를 내밀었을 때 이 ‘무모한 여행’에 제대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 내심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유레일패스와 항공권을 무사히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여행을 떠났다. 그녀를 배웅하고 올려다본 하늘 위로 날아오른 비행기를 보며, 걱정은 이내 질투로 바뀌었다. 그래, 당신이 위너다!

저자를 그토록 무모한 여행길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자가 쓴 책 1장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그림 여행은 ‘뒤러의 길’에서 시작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홀연히 나타난 ‘뒤러의 길’ 사이트를 발견하면서부터다. 정말 이 길이 남아 있다고? 눈이 번쩍 뜨였다.”
뒤러가 첫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그 길,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온몸으로 배우기 위해 떠난 그 길을 따라 걷고 싶은 열망이 저자를 이 여행으로 이끌었다. 이 때문에 저자의 여행에서 '뒤러의 길'은 고난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의 이름이 된다. 그래도 어떤가. 이제 저자에게 뒤러는 도판으로만 보던 화가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육체를 가진 화가로 가슴속에 각인되었을 터다.

뒤러의 길에서 시작된 그림 여행은 이후 델프트로, 아터 호수로 이어진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극찬한 페르메이르의 〈델프트 풍경〉을 보고, 클림트가 빛나는 윤슬을 그려낸 호숫가를 거닌다. 독자가 가본 적은 없지만 프루스트의 말을 빌려 상상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조토의 스크로베니 소성당은 중세가 가고 르네상스가 시작된 현장이지만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이 책에는 스크로베니 소성당에 입장하기 전 15분을 대기하며 저자가 느낀 설렘이 생생하게 쓰여 있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는 르네상스 최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여성 화가지만, 유명한 남성 화가들과 달리 정작 그녀의 그림을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단 한 점의 초상화를 보기 위해 시에나까지 달려간다.
카라바조의 도피 행로는 두 장에 걸쳐 이어진다. 도망자를 좇아가는 여행이라 그녀의 여행도 긴박하다. 사하라의 모래바람이 부는 그곳에서 카라바조의 최후를 이미 알고 있는 저자는 내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어지는 여행은 저자의 그림에의 열정을 잘 말해준다. 가는 곳마다 마치 새로운 것을 대하듯 짜릿함과 예술로만 인식할 수 있는 행복한 느낌의 연속이다. 문자나 언어로 표현하기에 벅차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저자의 가슴은 환희로 가득하다. "프랑스는 과연 인상파의 천국이었다.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보러 간 길에 마주친 폴 시냐크의 회고전은 이번 여행 최고의 수확이다. 우연히 보석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기에 여행은 늘 짜릿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요트 여행을 즐긴 뱃사람이라는 사실마저도 새롭게 느껴지고 처음 보는 것처럼 신비롭고 환희로 가득 찬 마음속이 드러난다.
“내 집과 올랭피아(요트)를 정박할 곳만 있다면, 원하는 건 하늘, 바다, 저무는 해뿐입니다.”
저자는 드문 여성화가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잠시 쉴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된다. 발이 퉁퉁 부어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 것이다. 빡빡한 일정은 타국에서 온 열정의 관람객들의 시선이나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재촉한다. 심신은 고달프지만 시선이 닿는 곳곳에서 전해지는 '예술혼' 때문인지 힘든 줄도 모르고 또 걷고... 결국 사달이 난 게 아닐까. 안타깝고 안쓰럽다. 저자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여성화가 앙귀솔라. 독자 그 화가의 이름도, 그림도 처음 보지만 왜 그토록 저자가 보고 싶어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강렬하고 역동적인 카라바조, 신비스럽고 웅장한 엘 그레코 두 거장은 그림만큼이나 삶의 폭이 넓고 자유로웠다. 특히 엘 그레코는 독자도 스페인에 갔을 때 가본 적이 있는 미술관이어서 추억도 새록새록 피어난다.

저자에 따르면 머리로는 대단한 화가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좋아하기 힘든 화가가 있다. 바로 세잔이다. 아마 대부분의 미술 애호가들도 이 말에 머리를 끄덕일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생트빅투아르 산과 마주하면서 세잔은 어느덧 그녀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숲 속에 좁게 난 길을 따라 홀로 걸었던 세잔을 이제 나는 근대 회화의 아버지가 아니라 ‘길 위의 화가’로 먼저 기억할 것이다.”
그림 여행은 마티스를 찾아 떠난 니스에서 끝난다. 처음 마티스의 그림을 보았을 때 세상 물정 모르는 화가의 그림이라며 경원시했던 저자. 하지만 니스에서 마주친 마티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그녀는 2019년에 다시 방스로 떠나 마티스 최후의 걸작이라는 로제르 소성당까지 보러 간다. ‘편안한 안락의자 같은 그림’의 진실을 마침내 발견한 것일까. 왜 독자는 니스에 갔으면서도 마티스를 못 봤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명한 말이 다시 생각나는 지점이다.

“그림 여행을 하는 동안 책에서 도판으로만 보던 그림들의 이미지가 도미노처럼 넘어졌다. 도미노가 쓰러진 자리엔 구체적인 공간에서 존재감을 내뿜는 실제 그림의 이미지가 들어섰다. 말하자면 이 여행은 기존에 내가 알던 미술사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준 중년의 그랜드투어였다.”
저자의 그림 여행 이야기를 읽다 보면, 빠듯한 일정에 쫓겨 여행 내내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애가 탄다. 산속을 헤매다 길을 잃고, 기차가 연착되어 일정이 꼬이고, 연간 3백 일 이상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아를에서는 세찬 비바람에 울상이 된다. 여행을 하는 동안 하도 걷고 걸어서 파스 냄새를 향수처럼 달고 다녔다는 그녀. 그럼에도 보고 싶었던 그림 앞에만 서면, 화가가 그린 바로 그 풍경과 마주하게 되면, 여행길의 모든 고난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저자의 책을 읽다보면 감사한 마음과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교차한다. 독자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책을 덮고 나면,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그녀의 여행에 절로 박수를 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장담하지만, 책을 읽어가는 동안 독자들도 역시 그 고난의 여행길에 오르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질투는 독자들의 몫이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설명에 따라 화가들의 생가, 작업실, 가족, 그들이 지나온 길을 지나니 자연스레 그림과 사연이 하나가 되어 다가온다. 한 예술가를 향한 시선은 어떤 순간, 어떤 공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두 다를 수 밖에 없고 작가의 일생을 놓고도 감정의 농도가 다르기에 매번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어도 새롭게 다가온다. 내가 알고 있던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 속 '노란벽의 작은 자락'은 어느 곳을 의미할까. 이렇듯 예술작품과 문학(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 만나면 그 의미가 더 심오해진다. 오랜만에 도슨트와 함께 서양화 거장들의 작품을 전시한 박물관을 한바퀴 돌아본 느낌은 대단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잃은 것만 있는 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책을 찾아 잘 읽은 덕분에 그림을 대하는 태도도 성숙되고 이해도 한층 높아진 느낌이어서 구름 타고 박물관을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황홀하고 환희에 벅차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들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후회 없이 그림 여행'이라는 제목의 깊은 뜻이 이제야 가물가물 보이기 시작한다.
저자 : 엄미정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을, 동대학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뒤 예술서 편집자로 출판사에서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편집자로 일한다. 매일 예술과 지식의 숲에서 그림과 글자 사이를 오가며 고군분투한다. 주말에는 박물관과 미술관, 유적지를 답사하는 여행자로 살고 있다. 책을 만들면서 예술가들 역시 여행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고, 그들의 삶과 예술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그림 여행’을 떠났다. 『후회 없이 그림 여행』이 그 첫 결실이다. 옮긴 책으로 『그림을 본다는 것』, 『판도라의 도서관-여성과 책의 문화사』, 『죽음과 부활, 그림으로 읽기』, 『모던아트-인상주의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의 역사』, 『조지아 오키프』, 『살바도르 달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