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대혼돈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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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혼돈』은 이 책의 제목이자 중국의 마오쩌둥의 지혜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학 다닐 때 군사정권이 금서로 지정한 것을 몰래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 같아 저으기 망설였다. 그때는 두려움이었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하여 두려움보다는 '생각의 혼란'이 줄 사고 체계의 붕괴가 걱정된 것이다. 만일 마오쩌둥의 지혜라면 마땅히 공산주의 이론일 것이고, 그가 중국을 통일하고 옛날 '황제'처럼 군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독자의 생각은 부정적인 게 많다. 문화대혁명도 그런 부정적 인식을 가중시켰다. 등소평이 자본주의 경제를 일부 도입하는 이른바 '흑묘백묘론'에 의한 개방정책이 아니었다면 중국은 지금 최빈국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독자의 선입견이다. 그런데 이 제목의 단어가 마오쩌둥의 지혜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망설임이 없을 수 없었다. 책을 읽기 전에 조금 사전 공부를 해야만 했다.

세게백과사전이나 역사대백과사전, 철학대사전, 서양사상사대백과 등 사전을 찾아봐서는 '천하대혼돈'이란 부문은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이 책을 번역한 옮긴이의 말을 읽어봤다. 다행히 대략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풀어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천하대혼돈』은 지젝이 여러 언론 매제에 기고한 짧은 글들을 묶은 책이다. 그 가운데는 트럼프의 정치 행보에 관련된 내용도 다수 섞여 있다. (중략) 사실 이 책의 제목이 된 '천하대혼돈'도 이런 바탕에서 나왔다. 이 표현은 세계를 끊임없는 모순의 충돌로 이해한 마오쩌둥의 사상을 응집한 것이기도 하다. 정서와 안정은 정치의 소멸을, 대혼돈은 정치의 출현을 의미한다. 지젝은 트럼프의 출현이 미국의 위기에서 기인한 것이고, 이 위기는 정치의 귀환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2020년 미국의 대선은 이런 예견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민주당은 2020년에도 역시 샌더스를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이 책에서 지젝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의 귀환이자 또한 정치적 주체의 호명이다."

어렴풋이나마 제목의 배경에 대해 조금 설명을 들은 탓인지 책의 성격이나 저자의 성향, 출판의 이유 등에 대해 짐작이 간다. 다만 독자의 정치나 세계 문제에 대한 지식이 짧아 그의 의견을 잘 수용할 수 있을지, 또 부족한 면이 있는지 지적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일단은 충분히 경청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책장을 넘긴다.

 

 

책에 따르면 지젝의 정치학은 국가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해체이다. 지난 세대까지 세계를 지탱해온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지향점은 현재에 이르러 힘을 잃었다. 권위주의를 전복하고 자유 민주주의 수호라는 목표를 이룬 여러 저항이 마주한 것은 되풀이되는 실업, 가난, 사회 부패 등 자본의 실재였다. 위기의 근원은 우리 체제 자체에 내재하기에 현재 나타나는 좌파의 저항 정치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현존하는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으로는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의회 민주주의로는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없고, 단순히 한 정치 정당이 더 많은 투표를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게다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그 정치경제학은 구조적으로 급진적 정치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기후 위기론을 경제 논리로 바꾸는 식의 환상을 재생산하며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즘의 망령을 불러낸다. 지구가열에서 난민에 이르기까지, 디지털화한 통제에서 유전공학적 조작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당면한 도전은 전 지구적 재조직화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젝이 레닌의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묻고, 천하대혼돈은 곧 기회라고 본 마오쩌둥의 오래된 지혜를 되새기며, 자본주의국가의 철폐를 꿈꾼 마르크스의 슬로건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이러한 지젝의 지향점은 개인의 욕망부터 체제 변환에 이르는 총체적 대안의 정치학을 프로그램하고 다양한 저항 세력을 아우를 정치 지도자에 대한 요청으로 구체화한다. 문제는 대중의 눈먼 욕망이 아니라 경험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정치력의 창조 여부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5부 ‘대혼돈을 넘어’에서 지젝은 정치의 대혼돈이 어떤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불러올 수 있는지 탐색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매우 광범위하다. 인종차별, 공산주의, 자본주의, 기후문제 등 총 5장에 걸쳐 다양한 주제를 다룬 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행동하게 만든다.

『천하대혼돈』에서 다루는 주제는 현대정치와 문화 현상 가운데 이민, 반유대주의, 미국과 유럽의 정치 현안, 중국 문제, 기후 위기, 사회주의 등 지구촌 이슈를 총망라한다. 1부에서는 평화적 공존이라는 미명 아래 ‘자본’이라는 실재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허용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허위에 관해, 2부에서는 각종 허위 대립을 일으켜 현대정치를 혼란하게 하는 포퓰리즘이라는 유령을, 3부에서는 정치구조는 물론 무의식 세계까지 파고들기 시작한 ‘디지털 정치학’을, 4부에서는 문화와 권력이라는 불가분의 관계와 인간 심리의 심층을 다루며, 5부에서는 대혼돈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한다. 글의 작성 시점은 2018년도 하반기에 집중되어 있지만, 거대한 변화 속 현 상황을 진단하는 지젝의 성찰의 지도를 파악하고 그의 지적 성실성을 엿보는 데 큰 의미가 있다.

 

1부 새로운 세계 질서

2부 현대정치와 포퓰리즘

3부 디지털 정치학

4부 문화와 권력

5부 대혼돈을 넘어

 

 

지젝은 우리 시대의 숱한 논쟁에 개입해 자기주장을 거침없이 내놓는 논쟁적 인물이다. 그가 펼치는 비판은 이념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때로 ‘상식’도 거스르며 분야를 넘나든다. 그래서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고 자주 구설에도 오르내린다. 하지만 그는 한때의 위로나 미봉책을 제시하는 철학자가 아니다. 슬로베니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등 현실정치에 도전한 적도 있었던 특이한 이력도 있다. 그는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 현실 정치 등에 대한 분석 역시 왕성하게 하고 있으며 주목할 만한 인사이트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 『천하대혼돈』은 지젝의 기고문들을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제안으로 한국에서 처음 출간하는 책이라고 한다. 미국 패권중심에서 탈 양극화되는 세계질서, 우파 포퓰리즘의 창궐, 디지털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지고 있는 가짜뉴스, 문화 권력, 기후 변화 등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대혼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는 매우 다양하고 거대담론이다.

 

 

지젝은 이러한 대혼돈이 기존 질서를 넘어서 새로운 질서와 정치적 테마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옳다 그르다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독자는 그것을 판단할 식견을 갖추지 못해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입장에서 서평을 이어나간다. 저자가 담론화하는 이슈나 어젠더에 대해서는 거의 동의하지만 저자의 견해가 담긴 글에서는 일부 저항감도 느낀다는 사실만 미리 밝힌다. 현재 전 지구적인 위기(기후, 차별, 경제, 감염병 등)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그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읽고 배우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생각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느낀다.

 

 

한 가지 더 좋았던 점은 전 세계 인류의 거대담론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고 복잡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쉬운 말로 설명해 이해가 쉬웠다. 아마 저자의 글쓰기 능력도 이 책을 읽기에 한몫을 해주리라 믿는다.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보질 못해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책을 읽고 소화하기에는 굉장히 훌륭한 글쓰기 실력이라는 점도 느껴질 정도로 논리도 정연하다. 이와 함께 하나의 내용을 다루는 분량은 대략 10페이지 이내여서 독자로서는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다.

"인류의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는 우리 삶이 평소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우리 내면조차 바꿔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때만 가능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천하대혼돈』을 통해 우리가 선 자리를 먼저 되짚는 통찰을 제공했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인류의 위기를 말한다. 또 누군가는 현대 문명의 종말을 예언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위기의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기후변화, 제4차산업혁명 같은 단어는 이미 위험성이 제거된 관용구가 되어버렸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도 인류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마주한 위기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고 다면적인 원인에서 비롯했기에 해결책은 고사하고 그 실상을 파악하기조차 쉽지 않다. 『천하대혼돈』은 오늘 인류가 마주한 전 지구적인 혼란의 양상을 풀어낸 슬라보예 지젝의 칼럼집이며, 원저 없이 한국에서 처음 출간되는 지젝의 신작이다. 대여섯 쪽으로 이뤄진 서로 다른 주제의 글들이지만, 조각을 맞추어 퍼즐을 완성하듯 세계의 여러 양상을 연결해 위기의 전체상을 그려낸다. 각 글은 지젝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과 날 선 통찰을 품고 있으며, 마치 창문을 깨고 날아드는 벽돌처럼 우리를 깨우고 당장의 변화를 촉구한다.

 

 

저자 : 슬라보예 지젝

 

현대철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힌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류블랴나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 파리제8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파리제8대학교, 런던대학교 등 세계 주요 대학교에서 강의했고, 경희대학교 석학교수 EMINENT SCHOLAR로 재직 중에 3,500여 명의 청중이 참여한 ‘경희대 석학초청특강’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지젝은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에서의 독창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대중문화를 자유롭게 꿰어내며 전방위적 지평의 사유를 전개하는 독보적인 철학자다.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감과 그와 대비되는 독특한 유머 감각 때문에 언론에서는 그를 ‘문화이론의 엘비스 프레슬리’ ‘지적인 록스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스로는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공산주의자’라고 칭하며, 여전히 ‘혁명’의 불씨를 품고 그 현실화를 위해 노력한다. 첫 책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시작으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용기의 정치학》 《팬데믹 패닉》 등을 펴냈으며, 실천적 이론가로서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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