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소준철 지음 / 푸른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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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존재한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부를 쌓은 사람도 있고,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사람도 있다. 같은 시대 같은 땅에서 살아도 이런 차이는 발생한다. 단순히 생각하면 돈을 잘 버는 사람과 돈을 못 버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이 돈 버는 데 관심이나 노력이 있고, 없는 결과라고 단순 평가하기는 어렵다. 돈을 번 사람도, 돈을 벌지 못한 사람도 동의할 것이다. 척어도 노력이나 돈에 대한 관심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구분을 짓는 척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차이로 빈부의 차이는 인류 시작 이후부터 공동체 안에서 생겨왔을까. 독자는 관심은 크게 갖지 않았지만 부자를 부러워하기도 했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갖고 있는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이다. 스스로 벌어 먹고, 사회의 틀에 맞춰 일하고 먹고, 결혼하고 자녀 낳아 키우고 하는 매우 보통의 사람처럼 살아온 사람일 뿐이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신체나 정신에 특별한 이상이 없다. 다만 '부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 없지만 '남에게 손 벌려 먹고 살아서는 안 된다' 정도의 생각은 일생 갖고 살아온 지극히 평범한 보통 시민이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산다. 돈을 많이 벌고, 못 벌고는 개인의 능력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개인의 능력 차이인데 왜 극도의 빈부 차이가 지속될까.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잘못 됐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어느 분야에서 모두 최선의 노력을 다해 일한다면 그 차이가 돈으로 환산했을 때 수십 배, 수백 배 차이난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 아닐까.



이 책 『가난의 문법』은 도시연구자 소준철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연구한 결과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소설처럼 허구의 사실을 엮은 것이 아니다. 연구 활동을 꾸준히 해온 저자는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여성 도시 노인의 생애적 특징과 재활용품 수집이라는 일을 통해 가난을 들여다본다. 그들은 어떠한 가난의 경로를 거쳐왔는가? 분기점에서 한 어떤 선택이 그들을 가난으로 이끌었는가? 그들이 살아온 삶, 재활용품 수집을 시작한 이유, 수집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경쟁, 노인들의 지역공동체를 들여다보며 가난의 구조를 배운다. 그 구조는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여러 가지 문제를 연구한 결과를 갖고 논문 형식의 글을 썼다. 다만 자신이 실제 만난 사람의 익명성 보장을 위해 가상의 인물을 내세울 뿐 그들이 하는 일과 생활 등은 모두 저자가 직접 겪거나, 취재한 후 자료를 더해 연구 분석해 낸 결과물이다. 이런 점에서는 르포르타지 문학이라고 해도 괜찮을 듯싶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무의미하다. 저자가 소설을 쓰기 위해, 혹은 고발 차원에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도시연구자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을 맞닥뜨린 문제의 원인을 추적해 나가면서 얻어낸 연구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도시 빈민들을 연구해 그들의 가난이 사회 제도의 문제점도 한몫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 제도의 수립, 정책 과정에서 이들 문제의 보완점이 반영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저자는 ‘윤영자’라는 여성노인의 생애경로를 해부하며 노인들의(특히 여성노인의) ‘가난’에서 구조를 찾으려 시도한다. 윤영자는 개인적으로는, 결혼, 3남3녀의 출산, 그들의 대학 진학, 그들의 결혼, 자식들의 퇴직 및 사업 실패와 금전 요구, 남편의 퇴직, 남편의 질병과 같은 사건사고를 겪었다.

사회적으로는 남방개발(남편의 인도네시아 파견), IMF 경제위기, 북아현동 재개발, 2008년 세계경제위기 등의 경로를 거쳤다. 윤영자는 한때 아현동에 단독주택을 구입할 정도의 부를 축적했지만 이런 개인적/사회적 사건사고를 겪으며 자산을 잃고, 지금은 20만원 남짓 하는 연금과 폐지를 주워 판 돈, 노인일자리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을 합쳐 50만원 남짓으로 한 달을 살아가고 있다. 윤영자씨의 가난은 그녀의 개인적인 선택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와 사회와 시대의 변화 과정에 휘말린 결과다. 저자는 이렇게 윤영자의 생애경로를 좇으며 가난의 구조를 해부한다.

가난한 여성노인에 대한 상징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다. 대개는 재활용품을 줍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의 광고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한 포스터는 더 노골적이다. “65세 때, 어느 손잡이를 잡으시렵니까?”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아래에는 여행용 캐리어가, 위에는 신문이 쌓인 카트가 그려져 있었다. 국민연금에 가입하면 “노년에 폐지를 팔아 생계를 잇지 않고, ‘품위 있게’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p. 125)



달동네가 재개발되고 판잣집이 사라지면서, 넝마를 입고 고물을 주우러 다니던 넝마주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은 우리사회에서 가난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난은 모습을 바꾸었을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판잣집 대신 쪽방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넝마주이 대신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 나타났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옛날의 공동체는 사라지고 한낮의 동네에는 일할 곳 없는 노인들만 남았다. 도시의 노인들은 각자도생하며 폐지를 줍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65세 언저리를 은퇴연령으로 정해놓고 그 연령이 지나면 미래세대에게 일자리를 넘기기를, 이제는 쉬면서 사회의 복지제도라는 혜택을 누리기를 ‘강요’한다. 그런데 왜 폐지를 주워 파는 노인들이 있는 걸까? 젊은 날에 저축을 못한 것이, 연금을 부으며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 자식이 있어도 그들에게 부모의 생활비를 댈 능력이 없는 것이, 과연 노인들의 잘못일까?

리어카나 카트를 끌며 폐지를 줍는 노인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 시대 가난의 표상이다. 가난의 표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왔다. 전후 시대에 누더기를 입고 맨발로 미군들에게 껌을 구걸하는 모습에서, 경제성장기 달동네의 판잣집 좁은 부엌에서 연탄불을 때는 모습, IMF 경제위기 이후 도심을 차지한 노숙인의 모습으로.

“가난의 모습은 늘 바뀔 것이다. 다음에 올 ‘가난’이 어떤 모습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p. 9)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가난의 문법이 바뀌었다." 도시의 가난이란 설비도 갖춰지지 않은 누추한 주거지나 길 위에서 잠드는 비루한 외양의 사람들로만 비추어지지 않는다.(p. 28)

거리에서 폐지와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인 리어카나 카트를 끌고 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충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나뉜다.(세 가지 반응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외면하거나, 동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세 가지 반응을 나타내는 무리 중 각자의 사정은 이렇다.

첫째, 외면하는 사람들의 경우다. 아스팔트에서 김이 나게 뜨거운 날, 혹은 언덕길이 빙판이 된 날, 폐품을 잔뜩 쌓아 수백 킬로그램은 될 리어카를 끌고 그 길을 힘겹게 걷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편한 마음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들의 처지를 직면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젊었을 때 저축을 별로 안 한 사람들이겠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어서 자식이 생활비도 안 주나 보네. 나는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고 연금도 붓고 있으니 저런 노인이 될 일은 없을 거야. 외면하는 이들은 그들의 처지가 ‘내 일’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는 고개를 돌린다.

그다음으로 ‘재활용품 수집 노인’이란 단어다. 지난 몇 년간의 조사를 통해, ‘폐지 줍는 노인’이란 사회적 호칭의 한계를 느끼게 됐다. 우선 그/녀들은 폐지만을 줍는 게 아니며, 재활용이 가능한 폐품을 줍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들은 국가와 산업이 산정한 재활용 체계의 말단에서 ‘재활용’ 가능한 폐품을 수집하여 판매하는데, 이는 폐품을 재활용 체계로 밀어 넣는 비공식적인 현상이다. 단순히 ‘폐지 줍는’이라고 표현할 때, 이 현상의 문제를 은폐하고 개인의 문제로 따지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한다.(p. 14~15)



둘째,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는 어떤 이들은 동정하기를 택한다. 폐지 줍는 노인들은 연민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 경우에 속하는 이들은 가끔 노인들의 리어카를 뒤에서 밀어주기도 하고, 어디에 폐품이 많이 쌓여 있다고 알려주기도 하고, 집에 모아둔 폐품을 노인들에게 건네기도 한다. 이들은 늙어서도, 몸이 아픈데도, 푼돈을 위해 거리를 쏘다녀야 하는 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다. 세 번째 경우의 사람들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낀다. 그 노인들의 처지가 언젠가 ‘내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이들은 현재의 사회보장 제도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노인이 되었을 때 사회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며 걱정한다.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여 일찍 은퇴하거나, 질병으로 모아둔 재산을 병원비로 소진할 경우, 자식이 없거나 자식에게 노후의 부양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고려하며 냉정하게 미래를 계산한다. 하지만 남는 것은 실질적인 대비보다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커다란 두려움이다. 나도 저런 처지가 되면 어쩌지. 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난의 문법이라고 표현해 가난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책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에는 다 사연이 있다. 그리고 가난은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고, 이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와 정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주는 내용었다. 이 책은 75세의 재활용 쓰레기를 줍는 여성이라는 가상 인물을 만들어 그들의 삶을 따라가면서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가상의 인물인 윤영자씨의 시간대별 하루 일과와 함께 저자의 그에 대한 사회 문제(또는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다. 윤영자씨의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과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녀의 삶은 소설이 아니다. 70세 이상의 재활용 쓰레기를 줍는 여럿의 여성에 대한 사연을 모아 그들이 특정되지 않도록 섞은 이야기라고 한다. 누군가의 실제 사연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하지만 실제 이야기에 바탕이 있어 허구의 사실이 아니다.


저자 : 소준철


도시사회학 연구자. 가톨릭대학교에서 심리학과 국제관계학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도시의 통치술과 하층민의 생계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며, 쓰레기 수거-처리체계, 수용시설, (해적판)출판물 시장에 이르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1970년대의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60~1980년대 서울시의 쓰레기 수거-처리체계 변화를 다루는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연구논문으로 〈정부의 ‘자활정책’과 형제복지원 내 사업의 변화〉가 있다. 서울연구원 ‘작은연구 좋은서울’ 우수논문상(2015)과 제1회 최재석 학술상 우수논문계획상(2020)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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