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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월드 ㅣ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17
엄정진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에서 과학소설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독자 역시 최근에야 SF 소설의 묘미를 알고 틈나는 대로 읽고 SF 소설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
예전에는 과학소설을 공상(空想)과학이라고 '헛된 생각'이라는 뜻으로 폄훼하기도 했지만, 이는 일본에서 SF(Science Fiction)를 잘못 표기한 데서 오는 오해였다고 독자는 알고 있다. 막연한 공상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썼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소설'의 의미를 일본에서 그렇게 표현했나 보다.
이런 잘못된 인식 외에 SF는 '미래를 배경으로 현실을 비유하거나 풍자, 비판하기' 위한 소설이라고 잘못 알려진 부분도 있다. 허구의 미래 사실로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소설이라는 의미로 이같이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잘못된 인식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작가의 상상력이 소설의 바탕이고, 과학적 근거는 작가가 상상하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도구이자 근거일 뿐이다. 더욱이 요즘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과학적 근거를 얼마든지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인터넷이라는 '세계의 도서관'을 손에 들고 다니는 시대인데 풍자를 위한 소설이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이 소설 『레일월드』는 다른 SF소설과는 조금 다른 점을 가지고 있긴 하다. 과학소설에는 다양한 하위 장르가 있고 저마다 독특하고 흥미로운 세계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 과학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펼쳐가는 하드 SF와 SF지만 과학적인 기술보다는 재미에 집중하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있다. 『레일월드』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표방하지만, 하드 SF의 재미도 곁들인 소설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시리즈가 출간된 그래비티북스의 『우주아이돌 시리즈』도 장르를 구분하면 스페이스 오페라이지만, 『레일월드』에서는 같은 장르이지만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출판사에 따르면 『레일월드』가 출간되는 2020년은 한국 과학소설에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전부터 오랫동안 2020년은 미래를 상징하는 연도로 여겨졌다는 주장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는 한국 SF역사에 남을 작품이고 성과라는 주장이다.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담을 담고 있는 『레일월드』는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소설이다. 애니메이션을 봤던 독자들이라면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또한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를 패러디한 부분도 있다고 하니, 이를 찾아보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가 될 것 같다.
스스로 과학적 지식이 짧아 하드 SF가 너무 어렵다는 독자들은 이 기회에 스페이스 오페라이자 정통 과학소설의 흥미를 가미한 『레일월드』를 읽어보면 우리나라 SF소설의 우수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독자는 판단하고 있다.
방금 ‘인간’이라고 말했지만, 지구에 번성했던 호모 사피엔스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아득히 오래 전 멸종했으니까. 앞으로 내가 인간이나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나와 동등한 존재, 즉 은하 연방에 소속되거나 그에 준하는 고등 지성체를 가리키는 보편적인 호칭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연방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은하계의 지성체를 평등하게 받아들였다. 신분은 오직 두 가지로 나뉠 뿐이다. 나와 같이 각 행성에서 생명체로 태어난 후 연방에 소속된 〈내추럴〉과 연방에서 직접 만들어낸 인공지능. 능력은 인공지능이 뛰어난 경우가 많아도 생물로 살았던 경험과 풍부한 감각을 가진 내추럴을 연방에서는 소중한 자원으로 여겼다. 그래서 신분차는 없어도 내추럴이 지휘를 맡고 인공지능이 보조하는 역할을 주로 부여받는다.(p.18)
길이 47기가미터에 이르는 원형 선로 위를 달리는 열차처럼 생긴 수수께끼의 거대 구조물 '레일월드'. 이 안에는 파충류에서 진화한 지성체 에우두 종족이 살고 있다. 우주선 임라나호는 우연한 계기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
레일월드는 인구증가와 환경오염으로 멸망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에우두 종족은 이 위기를 전쟁으로 해결하려 하고, 임라나의 선장은 이를 막기 위해 은하 연방에 개입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한다.
에우두 종족 1경 5천조 명 이상이 참전한 대규모 전쟁은 바로 그들이 직접 합쳐져 만들어진 단일체끼리의 싸움이다. 은하 연방의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선장은 전쟁을 막기 위해 애쓰지만 무력한 개인의 힘에는 한계가 있고 이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워프웨이를 빠져나오자 검은 종이에 뿌린 쌀알처럼 많은 우주선이 보였다. 크고 작은 우주선과 함께 임라나도 질서정연하게 항로를 따라 워나스-마바이로 향했다. 워나스-마바이는 은하 연방의 수도이자 관청 역할을 하는 구조물이다. 현재 36곳이 있고 지금도 새로운 수도가 만들어지고 있으나 지리적인 문제와 광속으로 인한 연락 지연이라는 문제로 인해 모든 워나스-마바이는 동일한 장소로 간주되며 이곳을 비롯하여 연방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집정관은 모두 같은 자격과 권한을 가진다. ‘출생지 혹은 거주지에 가까운 관청을 방문해야 함’ 같은 구시대적인 제약은 없다는 의미.(p. 33)
레일월드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 은하 연방은 왜 은하계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까? 전쟁에 휘말린 에우두 종족의 운명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선장은 무엇을 보고 느끼며 판단하게 될까.
장편소설 『레일월드』는 작가가 오랫동안 선보인 〈우주선 임라나 시리즈〉의 일부이자 〈중재 삼부작〉의 첫 편으로, 1990년대부터 부각된 ‘급진적(RADICAL)’ 하드SF의 영향을 받아 진지하고 수준 높은 작품이 다수 등장하면서 과거의 오명에서 벗어난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이제 과학과 사변으로 무장한 ‘첨단’ 스페이스 오페라를 읽을 시간이다.
시공자는 미확인, 연방의 승인이 없는 불법 구조물이었다. 구체적인 실태파악이 필요하다고만 적어놓고 실제 조사나 대처는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우주는 넓고 연방의 인원은 늘 부족하니까. 이 고질적인 인력부족 상황을 인공지능을 왕창 만들어서 해결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인지? 물론 쉽지 않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하나의 완제품처럼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까. 부관 정도면 완전히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 할 수 있는 정보의식체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아직도 내 밑에서 배우고 있는 신분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내 경우처럼 유기생명체를 정보의식체로 만드는 편이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은하 연방의 시민을 육성하는 방법이다.(p. 180)
책에 따르면 평소와 같이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우주선 임라나의 선장과 부관. 그들이 우주 항로를 따라 이동하던 중 항로에 무수한 조각 더미를 발견한다. 자세히 관찰한 결과 그 조각 더미는 우주 쓰레기나 소행성 잔해가 아니고 수천 구에 달하는 생물체의 사체들이다.
그리고 발견한 네모난 별. 유옌의 말처럼 정말로 평평하고 네모난 별이 있었다. 그것은 무려 47기가미터 (0.31 au에 해당하고 지구와 달 사이 거리의 123.6배에 해당하는 길이)에 이르는 선로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 레일 월드이다. 하지만 레일 월드는 이제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레일 월드에 살고 있는 종족은 이 위기를 전쟁으로 타개하려고 한다. 과거 시리즈에서 훌륭하게 위기를 막아낸 경험이 있는 ‘선장’과 ‘부관’은 이 위기를 막아내고 ‘중재’해낼 수 있을까.
“맛은 못 느껴도 되니까 가문의 일원으로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절실]” “아시잖아요. 유옌님의 입과 구강구조는 겉모습만 비슷하게 만들었을 뿐 아무 쓸모도 없어요. 목소리는 입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나오고, 목구멍이 막혀 있으니 애초에 음식도 물도 삼킬 수 없죠. 정 후손들에게 예의를 차리고 싶으면 음식을 조금 떼서 씹는 시늉만 하다가 안 볼 때 뱉어 버려요.” “[실의] 너무 슬픕니다. 이게 사는 건지 싶고. [한탄]” “저들의 기준으로 당신은 살아있는 게 아니죠. 밥도 안 먹고, 숨도 안 쉬니까요. 명심하세요. 저장된 기억을 제외하면 당신은 저들보다 훨씬, 그야말로 저와 더 한없이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을.”(p. 147)
작가는 pilza2라는 필명으로 환상문학 웹진 ‘거울’에서 주로 활동하는 SF 판타지 작가이다. 그가 구축한 스페이스 오페라 세계관인 '우주선 임라나 시리즈'는 우주선 임라나를 타고 다니며 우주 연방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내추럴 ‘선장’과 인공지능 ‘부관’의 이야기를 다룬 연작 소설 시리즈이다. 스페이스 오페라만 해도 우리나라 작가로서는 드문 시리즈인데
더욱이 하드 SF적 세계관까지 함께 곁들이고 있으니 독자로서는 일거양득의 독서가 될 듯하다.
작가에 따르면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한 게 2013년이니 올해 7년째 쌓아 올린 세계관의 총집합체가 이 시리즈이다. 『레일월드』는 시리즈 중 6번째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연작 시리즈 중 유일한 장편이다.
저자 : 엄정진
pilza2, 정희자, 엄정진 등의 필명을 사용한다. 환상문학웹진 거울 24호부터 필진으로 활동했고, 99호부터 편집진으로 활동 중이다. 『U, ROBOT』(공저), 『아빠의 우주여행』(공저), 『코뉴코피아』, 『고치 짓는 여인』, 『아직은 끝이 아니야』(공저) 등을 출간했다. 전자책 출판사 페가나를 만들어 『페가나의 신들』, 『달의 첫 방문자』, 야만인 코난 시리즈 등을 번역 출간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