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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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노라와 모라』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노라가 우연히 만난 모라를 통하여 인생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뿔뿔히 흩어져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부메랑처럼 돌아서 한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점을 선물처럼 전해준다. 작품의 분위기가 우울하고 슬픔이 감돌지만 삶을 따로 떼놓고 보면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이 타인의 삶을 위해 기여하고, 또 같은 방식으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삶의 의미를 전해주는 따뜻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설가 김숨은 이 작품에 대해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은 이의 창가에, 이 소설을 놓아두고 싶다”고 평하며 마음 둘 곳 없는 일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소설이라고 작품의 따뜻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소설은 나지막한 문장과 섬세한 시선으로 삶과 죽음의 평행 관계를 역설하는 작가 김선재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소설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한 작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애틋하고 특별한 삶의 순간들을 시적인 언어로 풀어내어 왔다. 그리고 이제 『노라와 모라』를 통해 선뜻 손 내밀지 못했던 존재들의 희미한 삶 한가운데로 독자들을 인도해 낸다. 우리의 이웃이자 나 자신이기도 한 세상의 모든 ‘노라와 모라’ 들에게.

『노라와 모라』에서 작가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관심 있게 다뤄온 소외된 인물들을 가족의 연으로 다시 엮어낸다. 그의 작품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관계가 바로 ‘엄마와 딸’, ‘아빠와 딸’이다. 이번에는 혈연과 서류로 묶인 가족이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시 혼자가 되고 마는 중에 ‘죽음’을 계기로 삶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되는 개인들의 역사가 어떻게 지금 이 사회에서 온전히 일어설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노라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노(魯)가 성에 돌배나무 라(邏) 자를 쓰는 ‘노라’는 자신이 어째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의 이유와 거친 손바닥의 촉감으로 남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읊조린다. 어린 딸을 두고 어느 밤에 갑자기 죽어버린 아버지의 유품은 엄마도 처음 본다는 눈 감은 사진뿐이다. 아이 딸린 과부가 되어 딸에게 냉담한 엄마의 영향으로 노라는 어른이 되어서도 매사에 무심하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말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기를 선택한 노라에게 언제부턴가 회사는 시끌벅적한 회식을 강제하고, 그 길로 노라는 회사를 관둔다.그런 노라가 새로 취직한 곳은 채소의 종자를 구별해 파는 가게 ‘명농사’다. 똑같은 종자를 심어도 여건에 따라 다르게 자라고, 겉모양이 똑같아 보여도 실상 다른 종자인 것들을 보며 세상일에 조금씩 마음이 여는 노라는 자신에게 몇 차례 걸려온 부재중 전화의 발신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는 20년 만에 듣는 의붓자매 모라의 것이다. 7년을 함께한 노라의 엄마와 계부가 이혼한 지 20년 만에 모라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노라와 모라는 그렇게 ‘죽음’을 계기로 연결되었다가 헤어지고 또 재회한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더 자고 싶었다. 뭔가가 내 이불 속으로 들어온 건 내가 다시 잠이 들던 순간이었다. 차고 낯선 감각이 팔뚝과 등허리에 닿았다. 흠칫 놀랐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차고 말랑말랑한 그 감각이 모라의 손이고, 다리고 몸이라는 걸 닿는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모라와 내 숨소리가 섞이는 게 느껴졌다. (……) 같은 방에서 자고 깼지만 살이 닿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중에서




소설의 주인공 ‘노라와 모라’는 위태롭게 소외와 학대의 경계를 지나는 이 사회의 약자들과 닮아 있다. 각자의 몫을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순리는 강자에게도 약자에게도 똑같이 부여된다. 그렇기에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생명의 몫은 때때로 가혹하다. 하지만 “혼자서 하나가 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인물의 속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세계를 이어주는 희미한 연결고리가 있다. 작가는 ‘노라와 모라’를 통해 우리가 간직한 아픔과 외로움이 기실 모든 인생의 본질임을 보여주며, 이러한 공감을 통해 타인을 향해 마음 여는 데까지 이르게 한다.

살기 위해 궁핍한 기억을 지우려 애쓰지만 따뜻했던 기억은 꼭 붙잡아야 했던 노라와 모라. 이들이 함께한 7년의 기억 중에 유일하게 일치했던 ‘실감의 기억’은 불가해한 삶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연대하게 만드는 작은 발원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의지할 곳 하나 없다고 느껴질 때, 그럼에도 살아있는 한 만남은 계속된다고 말이다. 누군가와 이어지는 삶에는 온기가 흔적으로 남아 계속해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노라가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깬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뜬다. 갑자기 느껴지는 손의 서늘한 감촉이 낯설어 어리둥절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던 날까지 먼저 뭘 하는 건 언제나 나였다. 정말이지 이 아이는 내가 먼저 묻고, 먼저 웃어 보여야 마지못해 입을 열거나 찡그린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어 보이던, 새침한 아이였다. (……) 그런데 노라가 지금 그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선을 넘어 온 것 같다.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말을 걸고 말을 한다. 그래도…… 아버지잖아. 노라가 그렇게 중얼거린다.

- 「있는 것과 없는 것」 중에서




양모라. 소리 내어 말하면 아직도 노래처럼 들리는 이름. 나는 모라가 자신의 공책 하단에 적어놓았던 이름의 모양을 아직 기억한다. 그런 ㅁ과 ㄹ 같은 것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런 걸 볼 수는 없을 거다. 그건 이제 없는 것일까. 이제 없는 세계는 아예 없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그것들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앞으로도 내내 그럴 거 같다. 다만 나는 한때 하나였던 어떤 시간을 되풀이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 누군가 다녀갔다고 여기면 마음이 한결 좋아진다. 너무 애쓰지는 말자고, 모라는 내 손바닥에 메일 주소를 적으며 말했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더 애쓰게

되는 마음이 있다.

- 「노라」 중에서


내가 아는 노라답게 노라는 사진 한 장을 달랑 보내왔다. 내 글씨가 적힌 노라의 손바닥이었다. 나는 길고 가는 손가락을 쭉 펼친 노라의 손과 몇 개의 곡선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내 글씨를 오래 바라본다. 아주 긴 명줄을 가진 그 손바닥은 희고, 작다. 바닥을 기며 자라는 넝쿨이 빛을 향해 고개를 드는 순간이 있다. 웅크리고 있던 어린 새들이 입을 벌려 우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생겨나는 세계가 있다. 나는 새로 태어난 우리들의 손바닥을 본다. 낯선 사탕을 아껴 먹던 언젠가의 마음이 된다.

- 「모라」 중에서



독특하게 작품의 중반에 이를 즈음 소설의 화자는 노라에서 모라로 바뀐다. 노라의 기억에서 발화되던 서사는 모라의 기억으로 치환된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일터에 나가는 아빠를 기다리며 보살핌 없이 지내야 했던 ‘모라’는 누구에게도 모나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모라의 기억은 노라의 기억과 조금씩 같으면서 다르다. 아버지와 달리 두 딸에게 공평하지 않았던 계모에 대한 기억, 방과 후 자신을 기다리는 노라를 뒤로하고 부러 다른 약속을 만들었던 일들까지 같은 장면이 만들어 내는 전혀 다른 기억들이 조우한다. 그럼에도 노라와 모라가 동일하게 간직하는 유일한 장면은 바로 태풍이 지나가던 어느 밤의 기억이다.


생일 따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아버지 덕분에 나는 내 생일을 자신할 수 없다. 아버지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음력인지 양력인지 모를 생모의 생일, 혹은 그즈음에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사실이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생모를 떠올릴 모든 가능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갈치나 꽁치, 고등어 따위를 먹지 않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생모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혼자 잠들었다가 혼자 깨어나야 하는 많은 밤 동안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아예 생일을 잊는 쪽을 택했다. 아버지의 말대로 잊어버리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이었다.

- 「말할 수 없는 마음」 중에서




우리는 항상 선택과 결정을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때론 후회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자신의 결정에 대해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결과에 대해 결코 후회하거나 원망하거나, 슬퍼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결과는 우리 삶의 영속성 안에 항상 있는 것이고, 한순간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삶이 끝나는 일도 없다. 그저 이런 저런 일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우리 삶의 일부로 남을 뿐이다. 관계 역시 한 번 선택했다고 결과가 정해진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도 없다. 언제나 바로 잡을 기회는 살아가는 한 있다. 다만 그것을 포기하느냐 포기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삶이 바뀔 수는 있지만.


물컵처럼 옛날이 쌓인다. 한 번 쌓이면 걷잡을 수가 없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옛날이라고 말하면 내가 까마득해진다. 잡았다 놓으면 옛날이 되는 이름들이 늘어간다. 층층이 쌓여 서랍이 된다. 서랍은 여는 것. 열면 오늘이 되는 이야기들. 나는 당신들을 꺼내 늘어놓는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마다 생각한다. 더 무슨 할 말이 남았을까. 하지 못한 말은 하지 못한 대로도 좋다. 당신이 읽는 동안 내가 들을 수 있다면. 내가 듣는 동안 새들이 말할 수 있다면. 빗소리가 창문을 흔든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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