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중독자 봉호 씨
이봉호 지음 / 왼쪽주머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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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스위스의 화가 파울 쿨레(Paul Klee)가 한 말이다. 예술의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책 『문화중독자 봉호 씨』는 존재하되 눈에 보이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되 현실에 존재하는 다면의 문화를 담담한 시선과 필치로 짚어낸 에세이다. 저자 이봉호의 실명을 그대로 제목에 썼다는 점에서 '문화중독자'인이 자신의 문화관(文化觀)이 당당한 것임을 내비친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문화중독자’라 불리는 그는 경계와 경계 사이를 넘나든다. 낯익은 것과 낯선 것 사이의 풍랑을 요요히 가로지른다. 익숙한 것의 새 얼굴을 드러낸다. 익숙지 않은 것의 살가운 내음을 속삭인다. 현재와 레트로를 상징하는 LP와 유튜브를 넘나들며, 가깝고도 먼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호흡하며, 추상적으로만 미술과 상징을 삶에 접목하며, 문화중독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문학과 작가, 영화와 연극, 동양과 서양, 현대사의 밝은 그늘을 비롯한 어제와 오늘의 다채로운 문화가 독자를 유혹한다. 봉호 씨가 중독된 문화를 단숨에 들이쉬고, 이채로운 문화의 빛에 함께 중독된다. 문화중독자 저자의 눈에는 우리 인간의 삶 속에 드러난 모든 것이 문화의 대상이고, 문화이다.





칼럼니스트이자 대중문화평론가이며 강사이고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 누가 보아도 문화인이라 칭해도 모자랄 것 없는 타이틀이다. 다방면의 문화계 인사와 교류하며 명실공히 문화중독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기나긴 타이틀의 맨 뒤에야 자그마한 목소리로 ‘문화중독자’라 덧붙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어째서 그를 ‘문화중독자’라 일컫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우리 곁의 사회와 세계를 향한 시선, 오늘날의 환경과 과거의 역사, 책과 독서와 문학과 작가를 아우르는 목소리, 음악과 미술과 영화, 다양한 인물을 비롯한 드넓은 관심사가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렇게 홀리듯, 놀라운 순간을 만난다. 총천연색 문화가 한데 모인 이곳에서. 문화는 이렇게 우리 삶의 이야기이며, 우리 삶은 '문화'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 앞에 드러난다. 문화의 정체성은 정치에도 있고, 경제에도 있다. 사회에도 있고 자연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다. 잘못된 정치를 '예술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는 맞는 얘기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찾아내 우리 앞에 보여주는 인간 활동의 하나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드러내는 표현에 걸림돌이 정치가 있었기에 정치에 관여하는 것일 뿐 예술의 본질은 정치가 아니다. 잘못된 정치가 우리 삶을, 아름다움을 방해하기 때문에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도, 경제 정책에서도 그렇다.





"봉호 씨를 알게 된 것이 커다란 행운이자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에는 그리운 이름과 생소한 이름이 하늘의 별처럼 등장한다. 사람을 좋아하고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쭉 이어지는 이름만 보고도 행복감을 느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별이 없어진 것은 아닌데, 우리는 때때로 그 존재를 잊고 산다." 출간에 앞서 인터뷰를 가진 지승호 씨는 이렿게 이 책을 이렇게 평하며 추천사를 썼다.

"그 별들의 존재를 잠시 잊고 살던 내게 봉호 씨의 글은 그야말로 나침반과 같았다. 원고를 받자마자 단숨에 읽어버렸다. 소설, 영화, 음악, 그림, 사람이 하나로 모이는 놀라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문화라는 통로를 이용해서 더 나아질 사회와 세상을 그려내 보인다.

그의 글에는 그리운 이름과 생소한 이름이 하늘의 별처럼 등장한다. 사람을 좋아하고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쭉 이어지는 이름만 보고도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운 이름을 보면서는 '아, 예전에 좋아했는데'라 생각하기도 했고, 생소한 이름을 보면서는 '나중에 찾아서 감상해봐야지'라 마음먹기도 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별이 없어진 것은 아닌데, 우리는 때때로 그 존재를 잊고 산다. 그 별들의 존재를 잠시 잊고 살던 내게 봉호 씨의 글은 그야말로 나침반과 같았다. 동양과 서양,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거침없이 횡단하고 종단한다. 예술을 포함한 문화는 삶을 흥미롭게 하고, 창조적인 사고를 하게 도와준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부디, 문화중독자 봉호 씨를 통해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되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의 입구를 발견하길 바란다."





저자는 말한다. ‘예술의 생명은 누가 뭐라 해도 표현의 자유가 우선이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말한다. ‘모든 예술 작품이 사회정치적 이슈를 담을 필요는 없다’라고. 시대와 문화를 관조하는 저자의 자세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자유와 방종의 상징으로 포장된 밥 말리의 이상. 죽음까지 불명예를 안고 가야 했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이면. ‘금서’라는 치명적 단어 속에 묻힌 도전. 단골이 사라진 오늘날. 스스로 피부색을 선택한 사람들. 무능력한 능력자들. 아날로그와 디지털, 어제와 오늘, 그리고 우리의 열린 내일. 그렇게 켜켜이 쌓인 시간 속의 문화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릿하게 글 걸음을 재촉한다.

‘예술과 삶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공간, 그곳을 우리는 천국이라 부른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책 속에서 다채로운 문화와 하나가 된다.

바빠지는 글 걸음만큼 그곳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 달콤한 맛이 내 안에 축적되어 문화의 풍미를 돋운다.

저자인 문화중독자 봉호 씨는 그렇게 문화를 사랑하고 문화에 빠지고 문화를 옹호한다. 여기서 '옹호'라는 표현은 조금은 표현임을 독자는 시인한다. 잘못된 문화, 예를 들어 폭력 지상주의, 선정적 표현 일방주의 등도 '문화'인가라는 질문이 있을 것 같아서다. 물론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폭력이나 선정적 표현 난무 등은 사회의 일시적 현상이지 결코 문화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답변에 독자 임의로 안심하고 '옹호'라고 표현했음을 밝힌다.




문화전쟁의 주인공은 뉴욕에서 태어난 안드레 세라노(Andress Serrano)라는 사진작가이다. (중략) <오줌 속의 예수(Piss Christ)>는 작가의 오줌, 정액, 피가 섞인 통에 빠진 십자가를 표현한 사진 작품이다. 이를 기독교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하는 종교인의 일갈은 미국제일주의를 주장하는 공화당원의 좋은 요릿감이 된다. (중략)

모든 예술 작품이 사회정치적 이슈를 담을 필요는 없다. 이 또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일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로려는 예술혼을 탄압하는 사회는 후진국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중략) 예술가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그곳은 뇌사 상태에 빠진 권력자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와 다를 바 없다. 천국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예술과 삶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공간. 그곳을 우리는 천국이라 부른다.

<그저, 아름답기를> 중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책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서 전쟁광의 활약상을 집요하게 나열한다. 대표적인 예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이다.

로마라는 국가의 관점에서 카이사르는 위인으로 추앙받을 만한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로마 군단에게 패배한 피지배 민족에게 카이사르란 위인이 아닌 광폭한 지배자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위인에게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어떤 위인은 인종주의자였고, 다른 위인은 성차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인간은 모두 위인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인간은 모두 위인답지 않은 행위를 범하는 양가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위인다운 인물이란 없다. 단지 위인다운 행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무엇보다 강하고, 무엇보다 약한> 중에서


소설 『망원동 브랏더스』를 마포아트센터에서 연극으로 다시 만날 기회가 이었다. 소설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무대에 등장하는 배역은 마지막까지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소설처럼 누구에게도 미안해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활 여건이 비록 누추할지라도 세상을 향해 비수를 던질 줄도 모르는 심약한 인문이었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기회보다 건넬 기회가 많았는가, 미안한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는가,

미안하다는 말이 듣고 싶어 관계를 차단하지는 않았는가, 자문해본다. 우선은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줘야 할 듯싶다. 자신에 대한 설득을 마쳤다면 흐트러진 마음을 챙겨야겠다.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서.

<개인의 취향, 타인의 취향> 중에서





191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사업가 집안에서 출생, 1936년 하버드대학교 문학부 졸업, 소설 창작으로 비트제너레이션의 주역으로 등장, 작가이며 배우이며 미술가인 동시에 음악가로 활동, 1974년 뉴욕시립대학교에서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1983년 미국문예아카데미{American Academy and Institute of Arts and Letters) 회원으로 선출, 앤디 워홀과 수전 손태그(Susan Sontag) 그리고 톰 웨이츠와 교류. 마약중독자, 장물과 모르핀 주사기 밀거래, 뉴욕 지하철역 권총 강도, 텍사스에서 마리화나 재배, 마약 소지 혐의로 미국에서 추압, 1950년 총기 오발 사고 살인범으로 구속 수감, 1953년 마약을 소재호 한 자전소설 『정키(Junky』) 발표, 이후 사디즘(Sadism)과 섹스와 퀴어(queer) 그리고 마약과 폭력을 소재로 한 연작소설 출간.

문학의 본령이 추함을 제거한 제한적인 미의 추구라면, 윌리엄 버로스는 저주받은 작가에 해당한다. 그는 소설을 통해서 제2차세계대전 이후 풍요화 기회의 땅으로 알려진 미국의 두 얼굴을 분해한다. 예상대로 그의 문학세계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다. 1966년 매사추세츠주 대법원은 『네이키드 런치』의 무혐의 처분을 내린다. 출간 당시 음란물이라 혹평했던 문학비평가들의 주장을 무색케하는 판결이었다.

<사랑일까요, 연민일까요> 중에서





여기서 죽음의 계급성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인간의 죽음에도 계급이 존재한다. 언론은 망자의 국적에 따라 사건의 경중을 조절한다. 언론이 정보권력화라는 철가면을 쓰는 순간이다. 정승 집 개가 짖어야만 마이크를 들이대는 시청률 및 구독률 지상주의의 결과이다. 정당한 침략전쟁이란 없다. 언론에서 진정 다뤄야 하는 기사란 전쟁이 남기는 비극성과 참혹성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권력투쟁으로 인한 집단사망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죽음은 언론의 무관심으로 조용하고 쓸쓸하게 자취를 감춘다. 또 다른 죽음은 언론의 관심으로 오래도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이러한 언론의 구별 짓기 현상은 죽음의 차별화를 당연시하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죽음이란 없다. 전쟁을 둘러싼 세상의 뉴스는 평등하게 다뤄야 한다.

<부디, 늦지 않기를> 중에서


저자 : 이봉호


문명보다 문화를 생각한다.

물질보다 시간을 신뢰한다.

언어보다 사유를 지향한다.

순응보다 변화를 추구한다.

찰나보다 영원을 응시한다.

과거보다 미래를 질문한다.

반복보다 창조를 고민한다.

잡설보다 직설을 선택한다.

권력보다 자유를 열망한다.

채움보다 비움을 수용한다.

작가, 강사, 칼럼니스트, 대중문화평론가, 다음으로 문화중독자이다. 《음악을 읽다》, 《취향의 발견》, 《독서인간의 서재》, 《음란한 인문학》, 《나쁜 생각》, 《광화문역에는 좀비가 산다》, 《나는 독신이다》, 《제9요일》을 출간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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