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방 암살 사건 - 정도전 죽음의 미스터리 큰 스푼
박은숙 지음, 김창희 그림 / 스푼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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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담장의 횃불이 모두 꺼진 밤, 얼굴을 가린 한 떼의 무사들이 바람을 가른다. 칼끝이 향하는 곳은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편 송현방이다. 주요 표적은 새 나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 조선을 설계한 일등공신이 왜 암살자들의 표적이 되었을까? 그들의 배후에는 과연 누가 있는 것일까? 정도전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 속으로 들어간다.

불교국가인 고려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은 유학자들이다. 당시 중국 대륙은 송나라의 주자학과 명나라의 왕양명이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여 유학의 꽃을 피웠다. 두 학문의 사상은 요즘 말로 이론은 다르지만 모두 뿌리가 공맹사상이다. 불교는 이념이고 사상으로 받아들여 피지배자인 백성은 불교신자이지만 지배계급인 정치와 관료 계급은 모두 유학 시험을 통해 선발되는 유학자들이 선발됐다. 불교계의 타락과 일부 관료들의 전횡으로 국세가 기울던 고려말, 유학자 정몽주, 정도전 등도 과거를 통해 관료에 등용된다. 이들은 유학의 근본인 위민 정신으로 관료 생활을 한 신흥 사대부 계급이다. 고려의 호족의 부패와 불교계 타락으로 나라는 민심이 이반되고 있었다. 정몽주 정도전은 유학 이념으로 나라를 구하고 돌아선 민심을 잡아야 하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다만 정몽주는 고려 왕을 중심으로 한 나라를 주장하고 정도전은 새 나라로 민심을 되돌리고 위민 정치를 해야 한다고 의견이 갈렸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와 같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고려 말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급기야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다. 훗날 태종으로 즉위한 이방원과의 갈등은 이 책에서 다루는 '정도전 암살 사건'은 무관치 않음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초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



위의 당시 정치적 배경이나 새 조선왕조의 상황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던 갈등 관계를 TV 사극이나 '조선왕조실록' 중 독자가 이해한 내용을 배경으로 임의로 재구성한 것이다. 저자는 정도전 암살 사건의 미스터리란 제목으로 어린이들에게 흥미를 돋우고 역사 의식 고취라는 차원에서 집필하다 보니 배경 설명을 자세히 할 필요가 없이 사건 중심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또 '암살' 사건인 만큼 아직 역사적 배경에 따른 정치적 암투를 어린이들에게 너무 힘든 내용으로 받아들 것을 우려해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의 담장을 따라 환하게 켜져 있어야 할 횃불이 전부 꺼진 어느 날 밤, 얼굴을 가린 한 떼의 무사들이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편에 있는 송현방에서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무사들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한편, 태종의 부마인 남휘는 우연히 자신의 할아버지인 영의정 남재의 동생 남은이 역적 우두머리 정도전과 한 무리였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남휘는 태종의 첫째아들인 양녕대군과 함께 정도전의 죽음에 얽힌 매듭을 한 올씩 풀어나간다."






사건의 배경을 생략하고 사건 본문 속으로 바로 들어간 저자의 집필 취지와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썼기 때문에 모두가 고려된 기술이었다고 판단된다. 어린이에게 정확한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고 흥미를 갖게 한 후 암살 사건 전후를 추측해보게 하는 교육적 차원의 배려로 읽힌다. 에필로그에 남긴 저자의 말도 자세히 읽어보면 저자의 집필 취지와 무관치 않다.


저자 : 박은숙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월간지 〈좋은 엄마〉와 〈어린이 좋은 생각〉 편집장으로 일했어요. 좋은 어린이 책을 만드는 데 관심을 갖고 집필 집단 ‘돋움자리’에서 활동했으며, 지금은 프리랜서로 어린이를 위한 책을 기획하여 쓰고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동안 《세상에 이런 동물, 식물이?》 《세계의 놀라운 건축물들》 《9,999개의 방을 가진 궁전이 있다고?》 등의 책을 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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