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에 대하여 외 - 수상록 선집 고전의세계 리커버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지음, 고봉만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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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로빈슨 크루소』을 읽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독자도 초등학교 때 점심도 거른 채 읽다가 어머니께 혼난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이 흑인노예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연히 독자도 최근에 어떤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큰 충격이었지만...

이 소설은 어렸을 때 읽기에는 꽤 긴 책이었다. '세계명작전집' 중 1권이었다는 사실만 기억난다. 줄거리는 소설 속 주인공인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로빈슨 크루소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누리는 행복에 관해 설득시키려는 아버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가출하여 선원이 된다. 아프리카 연안에서 무어 인에게 붙들려 노예가 되지만, 거기서 도망하여 친절한 선장의 도움으로 브라질 농장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곳에서 농장주의 의뢰를 받아 흑인 노예를 구하러 아프리카로 가던 도중에 배가 파선하는 바람에 무려 28년간에 걸친 무인 고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난파당한 배로부터 식량, 무기, 의류, 연장 등을 운반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섬에는 맹수가 없었고, 기후 또한 따사로웠고 맑은 물도 있었다.

15년째 되는 해 어느 날, 바닷가 모래밭에서 하나의 커다란 발자취를 보게 된 크루소는 깜짝 놀랐다. 계속 경계를 강화하는 가운데 2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사람의 뼈와 손발을 보고 그 섬이 식인종들이 사는 곳임을 알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세계문학사 작은사전>


24년째가 되는 어느 날, 식인종에게 붙들린 토인을 아슬아슬한 가운데 구출해 내어 자기 하인으로 삼는다. 그날이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지어 준다. 그 뒤로 프라이데이의 아버지와 스페인 사람 하나를 구하여 그는 고독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27년째 되는 해에 영국 배가 기항한다. 크루소는 선장 편에 서서 선원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반역자들을 섬에 남겨둔 채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대니얼 디포(D. Defoe)가 쓴 이 소설(1719년)은 실제 인물이 주인공의 모델이라 한다. 그는 영국인으로 흑인 노예를 사려고 브라질에 가던 중 선박이 파손되어 무인도에 들어가 28년 동안이나 고독 속에서 홀로 원시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는 당시의 한 수부(水夫)이던 셀커크(Selkirk)가 남태평양의 고도(孤島)에서 겪었던(4년 4개월 동안) 실화를 토대로 지은 것이다. 사회와 단절되어 고적(孤寂)하게 사는 사람의 전형을 창출했다. 당시 노예무역이 한창이고 흑인들은 포로로 잡혀 노예무역을 통해 신대륙 미국 및 주위 국가들의 노동력을 충당했다.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면화농장과 중남미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이 노예의 일터였다. 노예가 된 흑인들은 가축이나 다름없었다. 개인의 사유재산이었고 모든 권리는 주인에게 달려 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서유럽 각국이 앞다퉈 식민지 확장과 노예무역으로 국력을 크게 배양시키던 시대이었다.



이 책 『식인종에 대하여』는 1580년 초판을 간행한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의 저술이다. 원제목 『에세』는 당시 시험 ·시도·경험 등을 의미하며, 수필이라는 장르의 명칭으로는 되어 있지 않았다.

본래 저자가 철학자가 아니고 프랑스 정계의 중요한 인물로서 이 책은 그 틈틈이 써 모은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수상록』으로 통하고 있다. 고금 서적의 단편을 인용하고, 윤리적 주제, 역사상의 판단·의견을 소개하며, 자기 자신의 비판·고찰을 가한 감상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후년에는 자기를 대상으로 한 기술·분석 ·성찰을 주로 하여 스토아 철학, 회의주의적 사상, 에피쿠로스(Epikuros)주의적인 사고를 거쳐, 그가 도달한 자연에 적합한 인간의 조건과 삶의 탐구를 기도하였다. 인간성 연구의 문학 전통의 선구로도 간주되고, 사상사적으로도 합리적 사고의 존중, 근대적 자아의 주장, 비판정신 등은 훗날의 R.데카르트와 B.파스칼의 업적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험악한 시대에 쓰인 문집으로, 단순한 은둔생활자의 한가로운 글이 아니며, 온갖 거짓말과 교만과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시대에도 자기만은 진실하게 살아 보겠다는 자기 수련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자기를 소중히 해야 한다면서,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토론과 회의 진행방법, 신앙과 과학, 어린이의 교육, 남녀평등과 성(性)문제, 문명과 자연, 재판과 형벌, 전쟁의 참화, 식민 정책의 비리 등,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들을 격언과 일화, 시(詩)와 유머와 역설을 섞어가면서 항상 자유로운 인도주의자답게 겸손한 시론(試論) 형식을 빌어 담담히 이야기한다. 유명한 “크 세 주?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명제도 회의주의자의 발언이 아니라, 그 인간성에 대한 깊고 날카로운 관찰에서 우러난 상대주의와 패러독스, 또는 인간에의 자비와 관용의 표현이며, 후세의 과학주의·민주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인간성과 타인에 대한 생생한 사유를 담아낸 6개 장을 선별해 엮었다고 이 책의 역저자 고봉만은 밝힌다. 해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따르면 표제 장인 『식인종에 대하여』는 16세기 유럽인들이 식민지 침략을 통해 처음 마주한 중남미 원주민들에 대한 사유가 담긴 에세이다. 몽테뉴 수상록에서 가장 중요한 장 가운데 하나로 인용되지만, 지금까지 국내에 제대로 소개될 기회가 없었다. 정복지의 주민을 ‘식인종’, ‘야만인’으로 본 당시 유럽인들의 인식과 다르게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깊게 들여다보려 한 ‘교양인’ 몽테뉴의 사유를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몽테뉴 수상록은 ‘최초의 에세이’로 잘 알려진 고전이지만, 3권 107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또 몽테뉴가 수많은 인물과 텍스트를 인용했기 때문에 수상록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이해 또한 필수적이다.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시리즈로 기획된 이 책은 현대 몽테뉴 연구에서 비평 판본의 결정본으로 여겨지는 플레야드 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몽테뉴, 루소, 레비스트로스 등을 연구하며 여러 원전을 국내에 소개해온 고봉만 교수가 번역을 맡았다. 또한 200개에 달하는 주석을 통해 원문에 등장하는 인물과 텍스트에 대해 설명하고, 해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을 통해 몽테뉴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풀어냈다.

니체는 “몽테뉴 같은 사람이 글을 썼다는 사실이 삶의 즐거움을 배가시켰다”라고 썼다. 현대 한국인에게도 역병과 환란의 시대를 산 ‘모럴리스트’ 몽테뉴의 글이 고전 본래의 의미로 새롭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도 역병의 환란을 겪었다. 흑사병이 창궐하여 영지 인구의 절반과 평생의 친우였던 에티엔 드 라보에시를 잃었다. 환란은 역병뿐이 아니었다.

같은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종교전쟁이 몽테뉴의 일생 내내 계속되었다. 몽테뉴는 고립된 이들이 죽은 이의 시체를 먹으며 삶을 잇는 것을 보았다.

그때는 또한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정복 전쟁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유럽인은 각자 자신이 신대륙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목소리 높여 떠들었다. 그러나 당시 그곳은 미지의 세계였다. “나는 세계지도를 보았다네. 그러곤 깨달았지. 기독교를 충심으로 받드는 지역이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일세”(에라스무스). 신대륙 원주민들은 ‘잔인하고 야만적인 식인종들’이었기에 정복과 교화의 대상이었고, 유럽인은 이들을 멸시하고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 이렇게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학살과 착취가 있었다.

동정심이란 사치이자 비아냥거리인 시대였다. 그러나 몽테뉴는 이렇게 썼다. “우리야말로 모든 야만스러움에서 그들을 능가한다.”

지식인이 시대의 양심으로 살아 있을 때 내는 목소리는 울림이 크다. 몽테뉴의 예에서도 그 점을 확인한다. 짧지만 양심의 목소리를 낸 시대의 지식인의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이 작고 짧은 책이 그래서 소중하다.



저자 :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6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모럴리스트. ‘에세이’라는 글쓰기 장르의 원조라 할 《수상록》을 남겼다. 1533년 프랑스 서남부 도르도뉴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가정교사에게 맡겨져 라틴어를 모국어처럼 익혔고, 6세 때 보르도 인근의 기옌 학교에 입학해 중학 과정을 마쳤다. 16세 무렵부터 툴루즈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1556년경 페리괴 조세재판소의 법관에 이어 1557년 보르도 고등법원의 법관으로 일했다. 1558년 《자발적 복종》을 쓴 철학자이자 법률가 에티엔 드 라보에시를 만나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었으나 1563년 페스트로 그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1568년 사망한 아버지 피에르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로서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듬해 스페인 신학자이자 철학자 레몽 드 스봉의 《자연신학 또는 피조물의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발간했다.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남동생 아르노가 운동 경기 중에 입은 부상으로 요절한 데다 몽테뉴 자신이 낙마 사고로 죽을 뻔했다. 1570년에는 첫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몽테뉴는 보르도 고등법원 재판관의 딸 프랑수아즈 드 라샤세뉴(1545~1602)와 결혼해서 딸 여섯을 낳았지만,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

공직 생활에 부담과 환멸을 느껴 1570년 37세로 보르도 고등법원 법관직을 사임하고 이듬해 초쯤 자신의 성으로 돌아와 독서와 글쓰기에 몰두했다.

1572년경 집필을 시작한 《수상록》의 초판은 1580년 보르도에서 출간되었다. 그해 신장결석을 치료할 겸 여행길에 올라 스위스,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에서 오래 머물다 1581년 말에 몽테뉴 성으로 돌아오는데, 이 경험을 기록한 일기는 몽테뉴 사후에 발견되어 1774~1775년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보르도 시장으로 선출되어 일했으며, 두 번째 임기에는 종교 전쟁과 페스트로 피난을 떠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동안 가필과 수정을 거듭해온 《수상록》의 3권 107장에 이르는 신판을 1588년에 간행했고, 1590년에는 관직을 맡아달라는 앙리 4세의 요청을 건강을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1592년 자택에서 중증 후두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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