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아물지 않는다 -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
이산하 지음 / 마음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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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는 '한라산 시인'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한라산'은 그가 쓴 시의 제목이다. 시인에겐 매우 영광스러운 애칭일 것이다. 시인에게 자신의 시 제목을 이름 앞에 붙여준다는 것은 '한라산'이 워낙 유명한 시이기도 하고 시인 자신의 역작이었기 때문이리라. '한라산'은 '4.3 제주'를 시로 표현한 대서사시다. '한라산'은 그렇게 시인 이산하(필명이고 본명은 이상백)의 정체성을 확정시켜주는 시가 됐다. 지금에야 4.3 제주사태로 생각하지만 사건 당시부터 군사정권 때까지만 해도 피해자인 제주도민들은 입에 담지도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는 사건이다. 제주 4.3을 말하는 것조차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시국에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는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1987년)했으니 시인이 겪었을 고초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역설적으로 이 시는 시인의 대표작이 되고, 시인의 정체성을 우리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그의 시인으로서의 글쓰기와 시대 비판 정신이 드러나는 '작가의 말'을 통해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다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모든 꽃은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


라고 적는다.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꽃을 '민초' '소외된 사람'에 비유해 읽어도 감동적이다.





시인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1987년 당시 발표한 '한라산'의 일부를 발췌해본다.(행과 띄어쓰기는 독자 임의로 했음) 당시 제주는 '5.18 광주'와 오버랩되기도 한다. 상당히 유사하게...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항간에서는 그것을 제주 4.3사건 또는 제주 4.3인민항쟁이라 부른다.

이 피의 대학살은 당시 일체의 공식적인 보도가 금지되었고

외부의 특파원이 현장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되었기 때문에

전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채


도망갈 곳조차 없는 외떨어진 섬

썩은 볏짚 사이로 푸른 잡초가 듬성듬성 돋아난 초가지붕

비스듬히 기운 농가들처럼 무너져 무너져 가는 사람들

무고한 주민들은 게릴라와 내통했다는 죄로

끊임없이 살해되고 있었다.


시인은 국가보안법 제7조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석방 이후 10년 동안 절필했고, 절필 기간에 인권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한라산'은 2018년 4·3 사건 70주년을 맞아 한 권의 시집으로 발간됐다. 그는 최근 판결 33년 만에 ‘한라산 필화사건’의 재심 청구에 들어갔다.




이 책 『생은 아물지 않는다』는 이산하 시인의 아포리즘(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을 말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명한 아포리즘은 히포크라테스의 《아포리즘》 첫머리에 나오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다, 독자 주)이다. 산사기행집 '피었으므로, 진다' 이후 4년 만에 낸 신작이다. 기행문이 아닌 이산하의 일반 산문집으로서는 첫 책이다. 평범한 일상 속의 비범한 일화, 영혼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드는 세상 속 이야기들을 노래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 현실에 관한 촌철살인과 개개인의 상처를 보듬는 것을 뛰어넘어 역사적 아픔과 시대의 상흔까지 어루만진다. 시인의 날카로운 시대 비판 정신은 전 책을 통해 곳곳에서 드러난다.

책장을 덮는 순간 휘발되는 감성이 아니라 책장을 덮고 난 후 더더욱 선명해지는 글이다. 그것이 이산하의 문장이라고 단정지어도 된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뒤돌아보게 만드는 힘, 이 책에는 그런 힘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찬란한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저자는 벼꽃, 샛노란 산수유, 히아신스, 금강송과 같은 꽃과 나무를 통해서 얻은 노련한 지혜를 들려준다.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줄도 모른 채 탐욕을 부리는 늑대, 높은 지능과 뛰어난 모성을 지닌 문어, 척박한 히말라야의 설산까지 사냥을 하러 올라오는 인간을 피해 살아가는 눈표범 등 동물의 생태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이켜본다. 인간이 아닌 자연 속 존재들의 모습에서 공동체 정신을 배우고 인생의 올바른 방향성을 진중하게 모색한다.


지나는 사람들 아무나 붙잡고 “이 텃밭 아름답지 않아요?” 하고 묻는 친구의 마음과 눈이 너무 아름답다. 벼꽃이 피는 것을 개화라 하지 않고 ‘출수’라 부르는 것처럼 그가 아무리 세련된 현대미술을 논해도 난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친구 가슴속의 텃밭이 먼저 보인다. 벼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라듯 농부도 벼꽃 피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 것이다.(p.18~19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에서)




두 번째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현실을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여전히 날카로운 비판정신을 드러낸다. 행복지수가 세계 순위에서 늘 5위 전후인 나라 부탄을 이야기하며 부탄의 거룩한 국민행복지수는 인도와 네팔 노동자들의 등을 밟고 센 허수임을 꼬집기도 한다. 늘 약자 편에 서는 인도의 고등학교 마요칼리지와 꼴찌 없이 모두가 1등인 아프리카의 반투족을 통해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 된 한국의 현실을 비판한다.


촛불로 밝혀진 서울시청 광장에 거대한 고래가 지나갈 때 지하 갤러리에서는 세월호 엄마들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고래 속에 상처받은 304명의 아이들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세월호 엄마들의 바늘이 아이들의 찢어진 영혼과 자신들의 부서진 마음을 한 땀씩 꿰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타래는 아이들의 심장이다. 그 실타래에서 한없이 풀려나오는 실은 엄마들의 하염없는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의 실을 타고 엄마들은 오늘도 아이들 곁으로 간다.

(p.162 「아이는 한 번 죽지만 엄마는 수백 번 죽는다」 중에서)




또한 이 책은 평범한 일상 안의 비범한 일화들을 이야기한다. 영혼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드는 세상 속 이야기들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흔할 것 같으면서도 결코 흔하지 않은 사연들을 들려주고 있다. 이를 통해,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며 뚝배기 같은 진한 감동을 우려낸다.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내미는 단 한 번의 손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서늘한 깨달음이다. 비록 그 손길이 모든 일을 결정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희망은 옆의 숨결을 느낄 때 오고 절망은 옆의 숨결을 느끼지 못할 때 온다. 숨결과 숨결이 모이면 물결로 변한다.

(p.198 「잔인한 실험」 중에서)




『생은 아물지 않는다』는 문단의 지성이 쓴 에세이이다. 인스턴트 감성에서 비롯된 가벼운 공감과 다 똑같아 보이는 위로의 글들과는 차별화된 뜨거운 울림을 갖고 있다. 패기 있고 꿋꿋한 이산하 작가의 외침은 예술과 정치를 분리하고 되도록 엮지 않으려고 하는 문단의 풍토와 대한민국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책장을 덮는 순간 휘발되는 감성이 아니라 책장을 덮고 난 후 더더욱 선명해지는 글, 그것이 이산하의 글이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뒤돌아보게 만드는 힘, 그리고 우리가 그 힘을 어떻게 펼치며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알려주는 찬란한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세상이 이산하의 글을 품을 수 있는 한, 우리 생은 결코 아물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제주 4.3 70주년 추념식에서 사회자 이효리 가수가 낭송한 시(다음)로, TV를 무심히 보던 내 귀에는 마치 환청처럼 아득하게 들렸다."고 술회한다. 독자도 같은 시각 대한민국 서울에서 TV로 보고 있었지만 이효리 가수가 추념시를 낭송한 것을 들었지만 시인처럼 절실히 귀에 들리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시인과 독자의 눈이 다른 것인가.


평지의 꽃

느긋하게 피고

벼랑의 꽃

쫒기듯

늘 먼저 핀다.

어느 생이든

내 마음은

늘 먼저 베인다.

베인 자리 아물면

내가 다시 벤다.






저자 : 이산하


1960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나 부산 혜광고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필명 ‘이 륭’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해, 그해부터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1987년 ‘제주 4·3항쟁’의 학살과 그 진실을 폭로하는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석방 이후 10년의 절필 기간에 전민련과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 실행위원, 국제민주연대 인권잡지 《사람이 사람에게》 초대 편집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인권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저서로는 시집 《악의 평범성》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성장소설 《양철북》, 산사기행집 《피었으므로, 진다》 《적멸보궁 가는 길》, 번역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프리모 레비 지음) 《체 게바라 시집》(체 게바라 지음)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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