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이란 무엇인가 - 양심 과잉과 양심 부재의 시대
마틴 반 크레벨드 지음, 김희상 옮김 / 니케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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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많다. 우선 지능에서의 큰 차이, 그리고 직립하면서 크게 쓰이지 않는 손이 가장 대표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선악을 구별하는 판단, 그리고 악을 행하지 않으려는 양심도 크게 다르다. 동물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장애물은 모두 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아무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남의 이익을 빼앗아서는 안 되는 기본적인 양심부터 상대를 위해 선행을 하는 고급의 양심도 지녔다.

지금까지 인류가 밝혀온 인간과 동물이 가장 다른 점은 앞서 말한 세 가지가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 양심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다고 학문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동양의 공자, 서양의 소크라테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모두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예수도 마찬가지다. 양심은 인간의 삶의 바탕이고 원동력이기도 하다. 물론 비양심적 인간도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상대를 해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극단적인 예다. 우리는 그들을 '양심 없다'고 일축한다. '짐승 같다'로 말하기도 한다. 법(法)도 양심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탈취한 자는 거기에 합당한 처벌을 한다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죄를 저질러도 자수하거나 자백하는 등 죄를 인정하는 행위는 양심에 근거했다고 하여 경감 사유로 둔다. 법관도 '법과 양심에 따라' 범죄자를 처벌한다.





수천 년간 양심의 존재를 믿고 양심을 기준으로 살아온 인간에게 요즘은 많은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양심의 문제를 생각하는 우리의 머리와 사회의 사정들이 복잡다단해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양심선언’을 하고, 누군가는 신념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 심지어 ‘양심의 가책’으로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깃털만큼의 양심마저 없는 이들이 있고, 어제의 말과 행동이 오늘 다르고 내일 변하는 양심을 소위 ‘소신’으로 치장하는 이들도 있다. 저마다의 양심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양심 과잉과 양심 부재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로봇산업의 발전으로 '인조 인간'도 머잖아 탄생할 태세다. '양심 없는 인조 인간'의 탄생은 인류 전제의 재앙일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양심은 인간 본성일까를 화두로 내세운 저자의 책은 시의적절한 판단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양심은 사회적 발명인가, 종교, 철학, 국가권력, 심리학, 경제와 산업 등 인간 문화의 다른 요소는 양심과 어떤 관계를 가질까, 스토아철학과 종교개혁, 근대 국가의 성립과 홀로코스트 등 역사적 사건에서 양심은 어떤 기능을 했을까, 오늘날 병역거부와 보건산업, 환경보호운동에서 공통적인 양심의 역할은 무엇일까, 뇌 활동을 규명하는 신경과학과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드는 로봇공학의 발달은 양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까 등등 이 책은 양심의 다양한 정의와 가치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을 이끌며 과연 양심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자극한다.





이 책 『양심이란 무엇인가』는 한 역사학자가 인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개념의 하나인 양심을 탐구 주제로 삼아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자신의 사유를 펼쳐온 기록이다. 전쟁사가 전공인 유발 하라리의 사상에 영향을 준 히브리대학 역사학 교수이자 국제정치사 분야 석학인 저자 마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는 집단학살을 자행한 히틀러와 나치스에게 양심이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서 출발해,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양심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서술되어왔는지를 살펴본다.

1장은 통념과 달리 구약성경과 유대교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양심 개념, 그리고 이를 고안해 발전시킨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로마의 스토아 사상을 다룬다. 2장은 사도 바울의 시대부터 기독교와 양심이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 살피며, 루터의 종교개혁을 거쳐 기묘한 균형을 이루게 된 종교와 세속 권력의 양심에 대해 알아본다.

3장은 르네상스 시기 정치와 종교로부터 떨어져 나온 양심이 ‘국가’와 ‘의무’에 집중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루소와 헤겔과 칸트를 비롯해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사상을 살핀다. 4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양심과 신경증의 관련성에 대한 탐구였음을 환기하며 점차 거대한 보건산업과 맞물려 변질된 정신건강 체계를 돌아본다. 또한 서구 사회와 달리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일본과 중국의 윤리사상에서 양심의 대안을 살펴본다.

5장은 원래의 출발점으로 돌아와 제3제국의 유대인 집단학살에서 양심의 역할을 살피며 명령한 자와 실행한 자, 비교적 적은 수의 저항한 자를 구분했다. 6장은 양심을 세 가지 새로운 우상, 즉 인권, 건강, 환경에 묶어두려는 최근의 시도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7장은 인간은 단순히 화학, 전기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일 뿐이라고 보는 첨단과학의 입장을 살피며 양심의 미래를 전망한다.





저자는 전제한다. 양심은 도덕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도덕이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라면,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도덕을 바탕으로 우리를 행동하게 만들거나 행동을 돌아보게 만드는 내면의 목소리에 가깝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양심이라는 개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유대교는 신의 명령에 집중해 신의 보상을 기대하고 처벌을 두려워하며 율법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기에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양심의 기초는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도 문화’에서 찾아진다. 호메로스의 비극은 선과 악 사이의 충돌보다는 명예와 이득 사이의 충돌을, 자기 비난보다는 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하는 굴욕을 더 중시했으나, 기원전 5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데모크리토스의 작품에서 양심이라 불러야 마땅할 충돌이 묘사되기 시작한다. 이후 등장한 스토아학파는 ‘자기 자신을 아는’ ‘이성’을 강조하며 자기 통제를 추구하는 형태의 양심과 비슷한 개념을 선보인다.





책에 따르면 곧이어 기독교가 서구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이른바 ‘신앙 시대’가 도래한다. 면죄부로 대표되는 교회의 타락에 반기를 든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끌었고,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종교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양심의 가책을 강조함으로써 권위에 순종하게 만드는 방식은 효과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방법이 되었고, 마키아벨리는 심지어 정치에서 양심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어진 전쟁과 과학혁명 속에서 종교와 양심은 힘을 잃는다. 이신론과 무신론은 기독교 세기를 거치는 내내 신의 보상과 처벌이라는 형태로 양심을 매어두었던 닻을 잃게 만들었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루소는 교육을, 칸트는 이성을, 헤겔은 ‘세계정신’과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방한다. 한편 서구에 비해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한 동양 사회에서는 양심의 대안으로 ‘부끄러움’이나 ‘존중’ ‘공경’이라는 가치들이 발달해왔다.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저자는 실제로 히틀러가 행한 연설이나 대화를 통해 그의 내면을 추적하고,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와 게슈타포를 창설한 헤르만 괴링 등 ‘명령한 자’들의 일화에서 이들이 옳고 그름이나 양심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으며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는지 살핀다.

이어서 폴란드에서 최종해결을 자행한 101 예비경찰대대 등 직접 ‘살해한 자’들과 한편에서 유대인을 돕거나 정권 전복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저항한 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아이러니도 짚어본다. 우연히 사형집행인으로 발탁된 평범한 남자들은 국가가 부여한 명령과 잔혹한 임무에 익숙해졌으며,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의 가스실을 운영한 정신과 전문의들은 당시 수용자 처리에 새롭고도 인간적인 기법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가 하면 저항한 자들의 행동도 복잡한 상황과 이해관계가 얽혀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유대인을 도운 행동에는 이타주의나 공감능력 외에 나치스에 대한 순수한 증오, 자신의 고결함과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라든지 후에 얻게 될 보상에 대한 고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는 이 세 유형에 대한 고찰을 통해 때때로 양심이 우리의 모든 상식을 비틀어버리고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환기한다.





한편에서는 양심의 근거를 국가보다 더 높은 도덕성에서 찾으며 국가에 저항한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있었다. 점차 국가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문제와 관련해 양심을 지배하는 절대적 권리를 개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여러 국제법이 인권의 중요성을 점점 강조하면서 양심이 적용될 여지를 좁혀놓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 곧 양심에 자극을 주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이 책은 그중에서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건강 관련 양심과 환경 관련 양심에 대해 살핀다. 오늘날 지대한 가치로 여겨지는 건강과 환경은 양심과는 별개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여기에도 다양한 생각거리가 숨어 있다.

게다가 21세기에 양심은 기술의 발달로 인한 전환점을 맞아 새로운 차원의 의문을 야기하고 있다.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 반응을 관찰하게 되었으니 양심의 생물학적 근원을 확인하고, 양심을 조작하고 통제하는 것도 가능해질까? 인간을 모방한 로봇의 등장은 인공 양심에 대한 논의를 야기하는데, 전통적인 보상과 처벌과는 다른 방법으로 양심을 흉내 내거나 양심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새로운 기술이 군대와 경찰에 제공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다만 저자는 수많은 요인과 상호작용해온 수천 년 양심의 역사를 추적하며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했다고 한다. “양심은 거듭 처음에는 작고 자발적이며 해방을 추구하는 것으로 시작해 크고 강제적이며 기괴한, 심지어 전체주의적으로 변해가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 책이 우리에게 양심의 최종적인 대안을 마련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양심의 다양한 가치와 무게가 혼재하는 오늘날 나와 우리,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양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크다고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그 목적을 훌륭히 수행해낸 결과물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결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 기대어 기독교 신학자들이 1500년 동안 주장한 대로 불멸의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 곧 이성이다.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결과와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인간 심리의 자기보존 능력이다.(독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인간이 서로 주고받는 호혜의 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한다. 호혜성은 필요하다면 보상의 약속과 처벌의 위협으로 인간이 되도록 서로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각자 자기보존을 하는 도덕성의 유일한 기초이다. 이런 도덕성으로 비로소 질서 있는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 이런 관점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홉스의 양심 이해로 직접 이끈다. 양심은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내면의 진실’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그저 이름일 뿐이다.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새로운 의견에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 그것이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완고하게 옳다고 고집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이 새로운 의견을 부르는 이름이다.

「7장 기술 시대 양심의 자리」 중에서


지금껏 살펴본 양심으로 미루어볼 때 인간, 어쨌거나 서구인은 아주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인생을 살 수 없는 모양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를 들어 일본과 중국과 비교해볼 때, 서구는 항상 사회보다 개인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리라. 서구 사회는 개인을 그 사회가 정한 적당한 자리에 머무르게 하기에는 결속력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 그러나 특히 중국에서 선과 악은 사회의 산물이기에 상대적인 가치로 여겨진다.

서구는 다르다. 서구인은 항상 죄책감을 걸어둘 아르키메데스 점을 찾는다. 새로운 우상을 찾아야만 했으며, 새로운 우상은 찾아졌다. 가장 중요한 우상 세 가지는 ‘인권’과 ‘건강’과 ‘환경’이다. 갈수록 쇠퇴하는 종교와 견주어 세 가지 우상은 단호할 정도로 세속적이다. 셋 모두 출발은 미미했다. 특정 개인들이 어떤 특별한 악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행동에 나서며 관심을 모으려 시도한 것이 그 출발이다. 이 개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대중을 발견했고, 이 대중의 규모가 커지면서 운동이 조직되었고, 셋 모두 실로 거대해졌다. 이 조직화 과정에서 운동은 힘을 키웠고, 심지어 몇몇 경우에는 대포를 장착하기에 이르렀다.

「맺는말」 중에서


저자 : 마틴 반 크레벨드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에서 역사학 석사학위를, 런던정경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1년부터 히브리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는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국제정치사 및 군사사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노르웨이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국방 자문을 맡았고, 세계 유수 언론의 칼럼니스트로서 수백 편의 글을 기고해왔다. 저서로 《다시 쓰는 전쟁론MORE ON WAR》, 《전략의 역사A HISTORY OF STRATEGY》, 《보급전의 역사SUPPLYING WAR》, 《평등: 불가능의 탐색EQUALITY: THE IMPOSSIBLE QUEST》, 《국가의 부상과 쇠퇴THE RISE AND DECLINE OF THE STATE》, 《특권을 가진 성THE PRIVILEGED SEX》 외 다수가 있다.


역자 : 김희상


성균관대학교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독일 뮌헨의 루트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와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헤겔 이후의 계몽주의 철학을 연구했다. 《늙어감에 대하여》, 《사랑은 왜 아픈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등 10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2008년에는 어린이 철학책 《생각의 힘을 키우는 주니어 철학》을 집필, 출간했다. ‘인문학 올바로 읽기’라는 주제로 강연과 독서 모임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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