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바다로
나카가미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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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문학의 이단아 나카가미 겐지(1946~1992)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열여덟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일본 문단의 대단한 주목을 받으며 일본의 문학상을 휩쓸 정도로 역량 있는 작가로 떠올랐다. 그가 문단에 데뷔하기 전부터 쓴 단편소설의 면모를 살펴보면 '고뇌하는 젊음'이 담겨 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사회 분위기에 대한 젊은이의 반항적 고뇌나 행동들은 숨 죽인 일본 사회에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적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가 자신의 눈으로 본 친구, 가족의 죽음, 어른의 외도, 첫사랑, 첫 경험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펼쳐져 있다. 이 시기 한 남자의 머릿속엔 온통 '집착에 가까운 성욕'이 지배한다. 그러나 글은 외설스럽지 않다. 이단아 취급을 했지만 문장은 좋았다는 평가였나 보다. 문체가 뒤죽박죽이라고 혹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마치 춤을 추듯 생생함이 느껴진다고 호평도 많았다고 한다. 젊은 작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생생하게 되살려 내는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 시기에 작가가 쓴 단편소설 모음집인 이 책 『18세, 바다로』를 지금 읽어도 신예 작가의 신선함과 패기가 돋보인다.



술과 재즈, 주체할 수 없는 성욕,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분노, 편협해지고 무감각해지는 사회 속으로의 동화가 두려워 자꾸만 뒤돌아 도망쳐버리고 싶어지는 젊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 단편집을 독자도 처음 읽는다. 글만 처음 보는 게 아니라 이 반항적인 작가를 사후(1992년 졸)에도 몰랐으니 일본 문학에 문외한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구태여 변명하자면 일본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추리소설 때문이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걸출한 작가는 다른 작가를 굳이 찾지 않아도 될 만큼 독자를 매혹시켰다.

이 책에 실린 7편의 단편들을 읽으며 독자의 20대 때를 떠올려보고 작품에 몰입되면서 '반항아'라는 문단의 평을 이해할 수 있다. 정치 사회적으로(일본도 그랬겠지만) 우리나라는 만만찮게 혼란스럽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 활동에 뛰어들어야 했고 사회나 국가를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뒷전이었다. 그렇다고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감과 새 시대를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마저 외면하진 않았다. 아무튼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작가와 작품 주인공들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가 된다. 또 주인공들의 자유와 방황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 속에서 순수함을 벗어버리는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혼란과 정제될 수 없었던 내적 고통이란 감정이 비슷하게 전해져 왔다.



전후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젊음이 비틀린 것인지, 그 나이의 젊음이 원래 그런 것인데 사회적 분위기가 부추긴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반항이 광기처럼 휘몰아치는 젊음의 정신적 배출구가 없을 땐 극한 상황에 이른 인간은 대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함께 멱을 감던 친구의 죽음, 배다른 이복형이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자살해버린 이야기, 아픈 엄마 몰래 내연녀를 두고 있었던 아버지, 학교에서 벌어지는 데모 때문에 학교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며 섹스에 몰입하는 주인공, 담배와 수면제, 진통제에 취해사는 젊은 친구와 여자친구의 동반자살, 합의되지 않은 첫 경험 등 되돌아보면 무척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약간은 기괴하고 심하게 우울한 이야기가 소재들이다. 재즈와 약, 술, 성욕에 집착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지금은 나이가 훨씬 들어 사회와 나의 관계나 인생관, 가치관이 확고한 상태에서 받는 느낌은 약간 다르지만 당시의 젊음의 입장에서는 본능적인 것만 몰두하게 되는 주인공들의 행동에 공감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주인공들을 통해 전후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그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포자기한 심리를 꾸짖었는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공범 의식'으로 크게 공감했을 거란 추측도 어렵지 않다.



출판사측에 따르면 나카가미 겐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 그 작품 세계를 완전히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압도적이고 강력한 작품 활동을 했다. 1974년, 사생아로 태어난 주인공의 복잡하게 얽힌 가족 관계와 고향의 강렬한 토속성을 소재로 쓴 「곶」을 발표, 이듬해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그는 문단의 이단아이자 아이돌 같은 존재로 부상한다. 한국을 사랑해서 서울 이야기 글을 쓰기도 했다고. 나카가미 겐지가 쓴 초기 작품들 때문에 '일본 현대 문학의 이단아'라고 불리우기까지 했다. 그의 작품 세계를 다 펼치기도 전에 아쉽게도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초기 작품'만이 가질 수 있는 거칠고도 강렬한 색채에 대한 기대감이 컸는데 그보다 18살의 높게 밀어붙이는 파도처럼 솔직한 욕구분출을 글자 그대로 토해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휩쓸리고 쓸려가고 밀려가는 감정의 기복 또한 날것처럼 녹아 있다.

이 책 『18세, 바다로』는 그 이전, 그가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고향을 떠나 도쿄에 올라왔음에도 입시는 치르지 않고 문학과 재즈와 술에 탐닉하는 한편,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는 시대적 고뇌를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동인지와 문학지에 시와 에세이를 발표하던 시절에 쓴 단편들을 묶은 소설집이다. 그야말로 작가의 문학 세계의 태동을 알리는 초기 작품들이기에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들인 것이다.



「18세」 1965년에 발표된 비틀스의 ‘미쉘’ 가사로 시작되는 이 단편은, ‘미쉘’의 가사와는 달리 조금도 조화롭지 못하다. 현재의 나른함과 과거 어린 시절의 위태로움과 죽음에의 공포가 교차하는가 하면, 모순과 거짓말로 치장된 어른들의 세계를 향한 저항의 외침과 ‘무슨 짓을 해봐야, 착하게 굴어봐야 소용없다’는 젊음의 무력감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다.

「JAZZ」 끝없이 빠져드는 늪 같은 재즈에 몸을 맡기고 건강한 몽상에 젖는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린, 산문시에 가까운 작품이다. 재즈의 선율을 따라 미친 듯이 춤추는 언어는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감응해야 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다카오와 미쓰코」 유일하게 스토리가 있는 작품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수면제에 절어 사는 다카오는 돈이 떨어지자 미쓰코와 ‘동반자살미수업’이란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 그러나 그 끝은 말 그대로 ‘동반자살’이었다. 작품 안에서 제시되는 ‘블랙 유머’ 같은 아이러니한 죽음이 화자인 젊은 보스를 짓누른다.

「사랑 같은」 스물한 살 대학생의 일상에 파고든 강박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황금 손가락’으로 구현된다. 학교가 데모에 휩싸여 학생으로서의 일상은 무너졌는데, 굳이 문 닫힌 학교에 오가면서 일상의 굳건함을 믿으려는 주인공의 사유가 장황하게 연출되다, 그토록 강박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황금 손가락’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한낱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전의 해학성에 화자는 눈물까지 흘리며 킬킬 웃는다.



「불만족」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배경으로 정처 없이 걸어가는 나의 독백과 다른 나인 ‘나’와의 대화로 구성된다. 나는 ‘나’를 주인공으로 해학적이고, 비 내리는 아침 같은 하얀 색채를 지닌, 저항으로 가득한 소설을 쓰려는가? 하고 자문하지만, 빗소리에 섞여 ‘언어는 무의미하다’는 중얼거림이 낮게 깔린다.

「잠의 나날」 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불 축제는 어엿한 사내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남자들의 축제다. ‘충분히 분별력 있는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년도 아닌 스물세 살’의 나는 고향을 떠나기 전에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은 형의 죽음을 재연하면서, 형을 증오하고 그의 죽음에 안도했던 열두 살 당시의 거짓 없는 감정과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열여덟 살 때의 자신을 반추한다.

「바다로」 바다 앞에 무릎 꿇은 나는, 원점이며 피이며 광기이며 유일한 타자인 바다, 나 자신인 바다와의 거대한 합일을 이루고 정화된다. 작가의 내발적인 힘과 시대 사조와의 다툼이, 이 「바다로」라는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툼의 소리가 순수하게 울리는 점이 「바다로」의 매력일 것이다.



저자 : 나카가미 겐지


1946∼1992. 일본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나 복잡한 가정에서 자랐다. 《문예수도》 동인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6년 「곶」으로 제74회 아쿠타가와상을, 1977년 『고목탄』으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과 예술선장 신인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장편 『땅의 끝, 지상의 시간』 『봉선화』 『기적』 『찬가』, 소설집 『열아홉 살의 지도』 『화장』 『중력의 도시』 『천년의 유락』 등이 있다.

나카가미 겐지는 「서울 이야기」라는 중편소설을 쓸 만큼 한국에 각별히 관심이 있어 6개월가량 한국에 머물며 글을 쓰기도 했고, 윤흥길의 작품에 반해 그의 소설을 일본과 해외에 소개하기도 했다. 『18세, 바다로』는 나카가미 겐지가 열여덟 살에서 스물세 살 때까지 쓴 ‘너무도 잔혹한 젊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다카오와 미쓰코〉는 1979년 〈18세, 바다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역자 : 김난주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7년 쇼와여자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오오츠마여자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했다. 옮긴 책으로 『다시, 만나다』 『당신의 진짜 인생은』 『아주 긴 변명』 『인어가 잠든 집』 『태엽 감는 새 연대기1,2,3』 『서커스 나이트』 『저물 듯 저물지 않는』 『무코다 이발소』 『목숨을 팝니다』 『바다의 뚜껑』 『겐지 이야기』 『박사가 사랑한 수식』 『반짝반짝 빛나는』 『키친』 『냉정과 열정 사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여름의 재단』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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