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술은 잘못이 없다 - 어느 술고래 작가의 술(酒)기로운 금주 생활
마치다 고 지음, 이은정 옮김 / 팩토리나인 / 2020년 9월
평점 :
독자는 엄청나게 술을 좋아했다. 술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할 정도로 마셨다. 우리 속담에 "사람이 술을 먹다가 나중엔 술이 사람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30여년 술을 지독하게 마셔본 독자는 절제하는 술, 끊는 술, 마지막 술, 못 마실 때까지 마시는 술 등 각종 술을 다 섭렵(?)했다. 그렇게 마시다보니 결국 몸에 무리가 왔다. 술을 끊었다. 엄밀히 말하면 '끊겼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그동안 의사로부터 경고도 수차례 들을 정도로 응급실 신세도 여러 번 졌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코피가 계속 나서 민간요법으로 처치가 안 되자 응급실로 달려갔던 일, 술 기운에 휘청거리다 무언가에 부딪쳐 의식을 잠시 잃고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주위의 도움으로 응급실로 간 일 등 부끄러운 일도 셀 수 없이 많다. 주위의 강요나 의사의 경고 등으로 며칠 혹은 몇 달씩 금주한 적도 많다. 그러다 아주 시시한 이유로 다시 마시면 어김없이 예전의 술꾼 상태로 돌아간다.
의사는 알코올 의존증(알코올 중독)을 의심하고 입원을 권유하기도 했다. 직장은 나가야 한다며 애써 외면한 적도 여러 번. 그래도 마셨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술을 끊은 지 2년이 넘었다. 그래도 식구들은 예전의 술버릇이 다시 재현될까 전전긍긍한다. 술병은 물론 냉장고 술도 말끔히 치우고 다시는 사 들여오지 않는다. 이 정도 마셨으니 집안에서의 의심에 화만 날 뿐 반발하거나 예전처럼 홧김에 술을 마시는 일은 없다. 예전에는 술 얘기 나오면 독자를 비난했다. 비난 받으면 화가 났으니 풀 길 없어 술을 마시는 악순환 속에 갇혔다고 해야 맞다. 그 정신으로 세상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다니던 회사에서도 주의, 경고까지 받은 적이 있다. 다행히 일은 잘한다고 평가됐는지 술을 마신다고 해고하지는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독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술 마시러, 술 마실 돈 벌기 위해 회사에 다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술 끊은 이후에 생각이지만.
술을 많이 마셔봐서 이 책 소제목만 봐도 어떤 상태였는지 눈에 선하고 어떤 심리상태인지 알 것 같다. 책을 선택한 것도 술에 대한 향수보다는 술을 끊었다고 선언한 저명한 저자가 술 마시게 하는 글을 쓰지는 않았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예상은 맞았지만 너무 재밌게 썼다. 공감 가는 부분도 많다. 여기서도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아준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술에 관한 책을 읽고 서평 졸고를 쓰려하니 독자 얘기만 하는 것 같다. 그만큼 술은 끊기 어려운 것이고, 술을 끊으면 세상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니 자칫 독자들이 오해가 있을까 미리 밝힌다.
숙취 때문에 타는 듯한 갈증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는 날, 우리는 침대 위를 기어 나와 간신히 물을 한 모금 머금고는 ‘아, 이게 다 망할 놈의 술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비난은 잘못됐다. 술은 자신을 마시라고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직접 잔을 들어 식도로 흘려보낸 것은 스스로의 의지다. 그러니 술로 인한 모든 고통은 다 나의 책임이다. 비극은 술로 인한 고통이 신체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분명 기분이 좋아지려고, 혹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먹은 술인데 기분이나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되려 나쁜 쪽으로 흐를 때가 있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가 마치다 고는 바로 이 부분에 집중한다. 인생은 언제나 밸런스 게임처럼, 행복이 있는 곳의 반대편에는 반드시 불행이 있다는 것을 금주를 통해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좋~다고 생각하며 마시고 또 마시고, 권하면 반드시 마시고 권하지 않더라도 자작해서 마시고 말술은 더욱 거부하지 않는 생활을 30년에 걸쳐서 계속해 왔다. 물론 실수도 했다. 스승뻘 되는 사람한테 대들다가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친구와 별거 아닌 일로 말싸움을 하는 바람에 오랜 세월 쌓아온 우정에 종지부를 찍기도 했다. 초밥집에서 떡이 될 정도로 거나하게 취해서 “너 이 새끼. 뭐 이따위로 초밥 만들어!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말이지 파리의 일본 요리 전문점에서 3일간 배운 사람이라고. 비켜! 내가 한 솜씨 보여주지!”라고 말하며 카운터를 훌쩍 뛰어넘어 주방으로 들어가 초밥을 만들었다. 정말 목숨이 몇 십 개 있어도 부족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닥치는 대로 했다.(p. 14)
그니까 정리하자면 술의 즐거움은 인생의 자산이 아니며 즐거움이라고 부르던 것이 실은 부채라는 사실을 한 수 가르쳐 줬다, 이 말이지. 이 생각을 발전시키면 반드시 인생 자체의 균형이라는 지점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즐거움의 반대쪽에는 반드시 고통이 있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듯이. 삶이라는 자산의 반대쪽에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부채가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에 즐거움이 고통을 조금이나마 웃돌게 하지 않으면 오로지 고통스러워지기 위해 살고 있다고 느끼게 되지. 그런데 말이야, 적어도 음주에만 한해서 계산기를 두들겨 보면 지금까지 봐 왔듯 마이너스가 너무 커서 고통이라는 부채가 늘어날 뿐이라는 건 명확하다 이거야.(p. 56)
인생에는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고통이 반드시 수반된다. 이 고통이 바로 부채다. 술꾼들은 술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으며 즐거움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생명은 유한하고 생과 사는 세트라서 삶이 언젠가 죽음으로 청산되니,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반대쪽에는 고통이 있다.
그 고통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비교적 알기 쉬운 것으로는 술독에 좀먹은 건강, 시간 낭비로 인해 발생하는 생산성 저하, 금전 소비, 술 취함으로 인한 착오, 판단 실수, 착오로 발생하는 주위 사람들과의 알력 등이 있다. (중략) 술이 주는 즐거움의 본질은 술에 취하는 것이고 그것은 몇 시간 만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기억과 경험, 즉 인생의 자산으로 남지 않는다. 단지 위에서 말한 부채만이 남는다. 즉 즐거움과 고통이 조화되어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만이 남는다.(p. 59)
이 책은 ‘술을 끊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금주’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리듬감 있는 문장과 위트 있는 언어로 쓰여진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인생에서 술이 빠지더라도 무채색에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료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금주를 하게 되면 순간순간 느낄 수 있는 어떤 작은 행복,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최대 행복이라고 느꼈던 술을 포기해야지만 찾을 수 있는 소소하지만 정확한 행복이라니. 그렇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 여유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인생에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매일 즐겁게 생활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오늘 하루, 별로 즐겁지 않았다. 먹고 살 돈을 버느라 정신없이 지내는 바람에 나를 위한 시간이 단 1초도 없었다. 인간은 24시간을 하루로 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하루 중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나를 위한 시간에서 가장 손쉽고 간편하고 효율적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음주다. 그러나 우리들은 부당하게 권리를 빼앗긴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런 권리는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법으로 행복 추구 권리를 인정받고 있지만 행복의 권리를 저절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 178)
『술은 잘못이 없다』의 저자 마치다 고는 시인, 가수, 배우까지 한 다재다능한 일본의 유명 작가다. 신인 때부터 각종 권위 있는 문학상을 휩쓸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상, 아쿠타가와상 등 각종 문학상을 모두 받으며 문학상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고 한다. 그의 글을 '술을 잘 마시는 작가'로서 아닌 '술 끊은 작가'로서는 처음 읽는 셈이다. 그것은 독자도 마찬가지다. 그가 문학상을 받은 예전 작품들은 독자도 술을 많이 마실 때 읽었고, 그가 술을 끊은 이후 읽은 이 에세이는 독자도 술을 끊었을 때니까. 억지로 맟추려니 조금 쑥스럽다.
저자의 글 중에 "인생이 즐겁지 않다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하라"고 주문한다. 괴로워서 술을 마신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인 듯하다. 즐겁지 않은 삶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하려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술을 마시려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이 말은 책의 제목 『술은 잘못이 없다』와 맥을 같이 한다. 자칫 술은 잘못이 없다란 표현이 '술은 마셔도 좋으니 많이 마시고 싶으면 마셔라'는 뜻으로 오해할까 저자가 제목의 원래 뜻을 오해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이유를 술에게서 찾으려는 술꾼들에게.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개 핑계를 잘 댄다. 기분 좋아서, 고민이 있어서, 비가 와서 등등... 1년 365일 술을 마신다면 365개의 핑계를 댈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우리 문인들 중 한 분(정확히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은 '니까 술'이라 했다. 비가 오니까, 기분이 좋으니까, 괴로우니까 등의 이유를 잘 댄다고 해서다.
저자의 글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금주, 단주라는 것은 늘 자신의 제정신과 미친 광기의 싸움이다. 금주를 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강압보다 자신의 힘으로 끊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인식 개조가 필요한데 자기애(自己愛)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첫 번째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술을 마시는 건 바르지 못한 생각이다."
이처럼 금주로 시작된 고민과 술에 대한 생각이 인간사에 대한 고민으로 확대된 것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술은 잘못이 없다란 표현이 어떤 뜻인지 정확하게 이젠 감이 잡힌다. 독자도 저자의 말에 100% 공감한다. 술꾼은 핑계를 잘 댄다는 말은 이미 기술했던 대로다. 회사에서 상사의 압력을 받을 땐 일 때문에, 집에서 아내의 바가지를 대할 땐 너 때문에, 날씨가 나빠 하늘을 욕할 때는 추워서... 이성적인 판단을 갖고 있을 땐 전혀 터무니없는 핑계들이다.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밑천 떨어지면 술 때문에 술 마신다는 이유를 대기도 한다. 술이 무슨 잘못이
있기에. 아무리 미사여구를 사용해 핑계를 둘러대도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은 핑계는 술 마시지 않은 상태의 상대에게는 통할 리 없다. 결국 자기가 자신을 속일 뿐이다.
작가는 금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인생은 쓸쓸하다’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더는 즐거움을 좇기 위해 술을 마시고, 그 술이 고스란히 부채로 남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화나는 일 투성이었던 고된 하루에 대한 보상으로 맥주를 먹겠다고 다짐하다가도, 그의 충고를 떠올리면 맥주 없이도 이 밤을 지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정신적 여유다. 다른 말로 하면 여백 정도라고나 할까. 놀이, 라고 해도 좋겠다. 지금까지는 그런 여유, 여백이 없었기 때문에 강한 자극을 목적으로 빠른 속도로, 그리고 최단거리로 가고 있었지만 여유, 여백이 생기면서 천천히, 가끔 멈추기도 하면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곳에 의외의 기쁨과 놀라움이 있었다. 꽃과 풀이 나 있고, 비 냄새가 나고, 사람의 사소한 표정 속에서 사랑과 슬픔이 보였다. 서둘러서 가면 못 보고 지나칠 것 같은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야말로 행복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되었다.(p. 277)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을 펴낸 스님이 생각난다. 술을 멈추면 술꾼에게는 뭐가 보일까. 그렇다. 삶이 보인다. 세상이 보인다. 가족이 보이고 주위가 보이고, 결국 자기 자신이 보인다. 술 얘기에 느닷없이 스님의 책 제목을 끌어들이는 것은 불경스럽고 우습지만 독자가 술을 끊고 보니 주위의 삶이 보이고, 주위의 사람이 보이고, 결국 자신의 삶과 자신이 보이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술을 계속 안 마시는 원동력이 된다. 온전한 생활을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저자 : 마치다 고(町田 康)
소설가, 시인, 가수, 배우. 1962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마치다 마치조 町田 町?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으며 1981년에 펑크밴드 ‘INU’로 데뷔했고, 그 이후 배우로도 활약했다. 1992년 시집 《헌화供花》를 출간, 작가로 데뷔했다. 1996년 첫 소설 《굿슨다이코쿠くっすん大?》로 노마문예신인상을 수상했고, 2000년 두 번째 소설 《산산조각きれぎれ》으로 아쿠타가와상을, 2002년 《권현의 무희?現の踊り子》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상을, 2005년 대표작 《살인의 고백》으로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2008년 《여관 순례宿屋めぐり》로 노마문예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일본 최고의 문학상들을 휩쓸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초기 작품부터 독자적인 문체와 어법을 확립했으며 리듬감이 느껴지는 문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