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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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기호의 첫 번째 연애소설이라고 한다. 소설가가 굳이 연애소설을 처음 쓴다고 말하는 건 좀 쑥스러운 이야기일 텐데 스스럼없이 밝힌다. 그것이 이기호 작가의 매력이기도 하다. 자신의 속내를 글을 통해 진솔하게 쓰는 것 말이다. 아마 작정하고 쓴 건가 보다. 꽤 오래 소설을 쓰고 문단에서도 인정 받은 만큼 많은 소설을 썼을 텐데 왜 굳이 일상의, 별로 감동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연애소설'이라고 썼을까. 중견작가의 첫 연애소설이라고 해서 예전에 슬프도록 아름다운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기대했던 '꼰대 독자'에게는 탐탁치 않은 생활 현실의 에피소드를 발표했을까. 다 읽고 나서야 이유를 알 것 같다. 꼰대 독자들은 현실적 이야기에 감동 받고, 지금 청춘 세대는 자신의 일 같은 소설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작가는 '계산된 연애소설'을 쓴 것이다. 코로나19로 일상을 잃어버린 지금 모두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 일상으로의 회귀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격려성 소설로 보이는 것이 많아서다.



이 소설들은 연애라면 한 세대 앞서 해본 독자가 봐도 20대의 감성이 충만한 평범한 독자나 이웃 같은 연애 이야기이다.

30편의 짧은 소설이 실렸는데 하나하나 모두 스토리가 재밌고 작가의 애정과 글터치가 그대로 느껴지는 글솜씨에 연신 감탄하면서 단숨에 읽을 정도다.

일상의 에피소드를 삶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재미 있게 살려냈다. 우리 일상과 하나도 다름이 없어 친근하고 진솔한 느낌도 만족할 만하게 받는다. 그게 작가의 독특한 글솜씨이고 쉽게 많이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 모든 소설은 다 연애소설이라고 하던데, 나에게 그건 ‘연애’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힌 말이라기보단 ‘소설’을 쓰는 마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들린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아끼는 마음이 절반이니까.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쓴다는 사람을 본 적 없거니와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야기를 짓는다는 사람도 만나본 적 없다. 그런 마음으로 소설을 쓰다 보면 다 망해버리고 마니까. 그건 그냥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니까. 장소든 시간이든 단어든, 아끼는 사람이 글을 쓴다. 매일 글로 쓰다 보면 아끼는 마음이 들게 된다.

어쩌다 보니 짧은 소설만 벌써 세 권째다. 5년째 한 달에 두세 편씩 꼬박꼬박 짧은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매번 무슨 백일장을 치르는 느낌이다.

백일장은 쓴 사람 이름을 가린 채 오직 글로만 평가를 받는 법. 그 마음으로 계속 근육을 단련하고 있다. 이름은 지워지고 이야기만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이기호 작가 글은 재미 있다. 짧아서 호흡이 잘 맞는다. "소설 문장은 짧게 써야 한다"는 고(故) 황순원 작가의 말대로 써서 '황순원문학상'도 수상했나보다.

이번 책에도 읽다 혼자 슬며시 웃고, 화내다 다시 박장대소하게 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글솜씨가 좋다는 얘기다. 적어도 독자가 볼 때는.

요즘 독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매우 직설적이고 은유나 상징을 덕지덕지 감고서 독자에게 상상하라는 식의 글이 아니라 작가의 속내를 확 터놓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독자의 속마음을 파고드는 글솜씨가 이기호 작가에게서는 수없이 발견된다. 그래서 솔직한 작가라고 하는 건가.

이 소설들도 모두 우리 가족이기도 하고, 가끔은 친구이고, 동료이기도 해서 공감이 간다. 특히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모두 '착하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토록 유쾌하게 풀어내다니! 궁상맞고 지질한, 어딘가 좀 모자라고 어리숙해 보이는 소외된 사람들, 그 어수룩함이 만들어낸 우여곡절들이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가슴 짠하게 펼쳐진다. 이기호 작가는 누가 봐도 별 볼 일 없는 비루한 존재들의 삶에서 기어코 사랑을 건져 올리고 만다.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그냥 이용당하는 거라고, 사기라고, 멍청하게 속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연애무식자’들은 당당하게 외친다. “사기라도 좋고 속아도 좋다고”,

“아, 씨발, 내가 사랑한다구! 내가 사랑해서 이러는 거라구! 씨발, 내가 사랑해서 식혜를 팔든 수정과를 팔든, 뭐가 문제냐구!”

특유의 재기 넘치는 문체, 매력적인 캐릭터, 능청스러운 유머, 애잔한 페이소스까지, 『누가 봐도 연애소설』은 이기호밖에 쓸 수 없는, 작가 이기호만이 쓸 수 있는 누가 봐도 ‘진짜’ 연애소설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카라멜콘땅콩’의 땅콩 개수가 줄었다고 분개하거나 편의점에서 1+1 물품에 집착하는, 그냥 우리 옆집에 살 것 같은 사람들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다. 암에 걸렸거나 치매에 걸렸거나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거나 시험에 떨어졌거나 이혼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보다 더 아픈 사람을 바라보며 “자꾸만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어쩔 수 없어” 한다.

“거기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친구도 한 명 없는”, “형제도 없고, 말을 거는 사람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아픈 사람의 “상처를 보고 나서” 사랑에 빠져든다.

매일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먹는 편의점 알바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따뜻한 김밥을 가져다주는 김밥집 청년,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은 후 좋아하던 대학 동기를 만나 큰맘 먹고 돼지갈비를 사주고는 안절부절못하는 남자, 이혼하고 고향에 도망치듯 내려온 첫사랑을 도와주는 시골 노총각, 독감에 걸린 여자친구와 같이 아프고 싶어서 마스크를 빌려 간 초등학생……. 도무지 사랑할 구석도, 사랑할 여유도 없어 보이는, 모두가 어쩐지 짠해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각자의 최선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이 책에는 귀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듯한 아름다운 로맨스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사랑 표현도 없다. 얼핏 보면 이게 무슨 사랑이냐고 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기호는 말한다.

그것이 삶이라고. 누가 뭐래도 사랑이라고.



그는 오늘 죽기로 결심했다.

그냥 여기서 툭 뛰어내리면 끝인 거지. 그는 난간 밖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어보았다. 고시원은 5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잘못 떨어지면 에어컨 실외기에 먼저 부닥뜨리겠는걸. 그는 난간을 잡고 조심조심 옆으로 몇 걸음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여긴 차가 있네. 그는 그 차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고시원 같은 층 302호에 사는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새벽 배송 일을 하고 있어서 늘 새벽 1시 반에 출근하는 남자, 그 남자는 새벽 배송을 마치면 다시 편의점 알바를 뛴다고 했다. 몇 번 고시원 공용 식당에서 그 남자가 건네는 오징어 젓갈 반찬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남한테 폐를 끼치면 안 되지. 이런 건 보험 처리도 안 될 텐데……. 그는 다시 몇 걸음 옆으로 이동했다.

고시원 정문도 좀 그렇고, 여긴 옆 건물과 너무 가깝고……. 그는 옥상을 한 바퀴 삥 돌아 다시 맨 처음 자리로 돌아왔다. 신경 쓰지 말자,

죽는 마당에 그깟 실외기가 뭔 대수라고. 그는 난간 위로 조심조심 올라갔다. 한차례 세찬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춰 난간 쇠기둥을 움켜잡았다. 그는 다시 느릿느릿 아래로 내려왔다.

미연이는 전화 한 통 없구나…….

<pp.37~39 「뭘 잘 모르는 남자」 중에서>



진만 성희 씨…… 오늘도 연락이 잘 안 되네요……. 연락이 안 돼도 그냥 여기에 계속 말할 게요. 사실 성희 씨…… 지금 제 마음이 많이 흔들려요.

같이 사는 친구는 그거 다 사기다, 멍청하게 속지 말라고 말하는데…… 저는 계속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기라도 좋고 속아도 좋다구요. 그래도 꼭 한번 다시 성희 씨 만나서 카페에서 얼굴 보고 커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요……. 저는 내일 미자 씨 만나서 제례를 드리러 가요. 원래는 70만 원인데, 특별히 성희 씨 생각해서 50만 원에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그거 드리면 그분 말처럼 마가 사라진다고 하니까, 그땐 성희 씨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마가 사라지든 사라지지 않든, 제 마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거든요. 성희 씨가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게 전부예요. 기다릴게요. 오전 2:47

<pp.206~207 「사랑과 상담 사이」 중에서>


저자 : 이기호


1972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공모에 단편 「버니」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짧은소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차남들의 세계사』, 『목양면 방화사건 전말기』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승옥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학생들과 함께 소설을 공부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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