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과 편지 - 성폭력 생존자이자 《버자이너 모놀로그》 작가 이브 엔슬러의 마지막 고발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령 옮김 / 심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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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대부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당한다." 최근 한 범죄 수사관이 TV에 직접 나와 한 말이다. 구체적 기록을 얘기했지만 수치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꽤 충격을 받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동료, 동네 지인 등이라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부터의 성폭력은 실제 많지 않다는 말에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아는 관계'가 가족이나 친족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우리 사회 근간을 뒤흔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성폭력은

가해자 개인의 일탈 행위로도 볼 수 있지만 가정이나 친척이라면 이건 문제가 다르지 않은가.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성폭력은 외국에 비해 많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가정 성폭력 사건은 크게 다뤄진다. 법정 형도 더 무거운 것으로 안다. 얼마 전 이혼한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에게 딸이 '사형'을 시켜달라는 청원서를 내 우리 사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젠 우리 사회도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도 위험 수위에 이르렀구나 하는 심정에 우려와 섬뜩함까지 느꼈다.






미투 운동이 시작됨으로써 성폭력범에게 법정 최고형을 선고하는 추세다. 그리고 성폭력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중심의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수사관이나 법조계의 말에 공감한다. 우리 대법원은 이미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남성들의 성폭력 행위에 단호한 법적 처벌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행해지는 성폭력에 대해 강한 수위의 처벌이 가능해 일시적인 대응 방안으로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대책이나 피해자 중심에서는 아직은 미흡하다는 독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책은 가정 내 그것도 아버지가 딸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한 점이 더 충격을 준다. 그것도 5세 때부터. 이쯤 되면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문제다. 인간성이 전혀 없는 '짐승보다 못한 행위'이다.

성폭력 피해자이자 세계적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 이브 엔슬러는 아버지에게 다섯 살 때부터 성폭력을 당했고 10대 이후에는 학대, 폭행, 가스라이팅 등 잔혹한 폭력에 시달렸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그가 심판대에 세워야 하는 가해자는 이미 31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이브 엔슬러는 책임을 회피한 채 세상을 떠난 가해자, 더 이상 어떤 법적 처벌도 할 수 없고, 사과조차 기대할 수 없는 아버지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피해자인 자신 앞에 세운다. 복수가 아니라 얼마나 엄청나고 잔인한 피해인지를 알리자는 취지다. 다시는 자신 같은 피해자가 없도록 성폭력 문제를 사회문제 최고점으로 끌어올린다. 독자도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범죄에 큰 관심이 간다. 피해자로서의 심리 상태 변화를 좇아감으로써 경각심을 한층 더 고조시킨다.



저자 엔슬러는 가해자인 아버지가 딸인 자신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는 일을 ‘상상’함으로써 수십 년 동안 묻어둔 진실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폭력의 시간을 견디고 진정한 사과를 기다리며 온몸을 다해 세상과 싸워온 엔슬러의 글은 잔혹한 폭력의 실상을 담아낸 고통의 기록이자, 남성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폭력을 고발하는 증언이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무엇을 사과해야 하고, 어떻게 사죄의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안내하는 지도다.

하지만 세상은 다른 범죄보다 유독 성폭력 범죄에서 피해자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사건을 밝힌 의도’를 의심한다. 이러한 억압은 오랜 시간 여러 사회 문화 조건 속에서 용인되어 왔다. 하지만 2017년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미투 운동 이후 자신이 당한 피해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침묵을 거부하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싸운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맞선다.




엔슬러는 왜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의 삶 전체를 되짚어보고, 피해를 겪을 당시 자신의 감정이 어땠는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현실과는 다른 결과' 즉, 가해자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명백히 밝히고 인정하며 진심으로 꺼내는 사과를 받는 일은 이브 엔슬러가 선택한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피해자가 가해 사실을 고발하고 고통을 드러내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먼저 읽고 해제를 쓴 은유 작가는 말한다.

“나는 글쓰기 수업에서 말하곤 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나 커다란 고통일수록 버전을 달리해서 써보라고. 다른 시점, 다른 입장, 다른 시제, 다른 장르로 같은 경험을 다뤄보면 그 사건의 본질은 선명해지고 고통은 옅어질 수 있다. 이 책은 씻을 수 없는 상처의 기록이라서가 아니라 ‘기록할 수 없는 상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p. 206)

은유 작가의 말처럼 엔슬러는 가감 없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며 사건의 본질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이후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세상에 내놓은 이브 엔슬러는 자신의 이름을 ‘브이V’로 바꾸며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을 선언했다. 역자 후기에서 김은령 [럭셔리] 편집장은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버지의 잔혹한 기억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나게 되었고 원망도 회한도 분노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물려준 성과 이름으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p. 197)

사과 편지 속 아버지는 딸에게 성적인 학대를 일삼고 심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른 이유를 자신이 복종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데서 찾는다. 그로 인해 권위와 남자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가족이라는 왕국 속에서 아내와 아이는 엄격하게 다뤄야 할 자신의 소유물이었다고 고백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살던 자신에게 커다란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 딸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다고, 그래서 자기 안에 꽁꽁 숨겨둔 탐욕스러운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다섯 살 아이를 성적으로 착취했다고 아버지는 말한다.(p. 70)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드러날까 봐 딸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가족 모두가 딸을 가족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으며, 딸을 끊임없이 궁지로 몰아넣어 스스로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도록 조종했다고 이야기한다.(pp. 104~107)



아버지가 꺼내놓은 이 기막힌 이야기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본질을 드러낸다. 더불어 이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부장제’라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내 정신은 온전했어. 나는 특권을 누리는 고압적인 남성이었다. 너는 나의 아이였다. 나의 소유물이었지,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했어. 그러지 않을 때 규율과 처벌을 실행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었다. 바로 내가 키워진 방식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겪은 대로 너를 다루고 있었어. 내가 배운 대로 하는 것뿐이었지.”(p. 113) 
그는 끊임없이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악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사회적?정신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은 그런 상황을 묵인하고 아버지가 저지르는 폭력과 학대에 동조하며 엔슬러를 고립시킨다. 편지는 가감 없이 이브 엔슬러가 겪은 아픔을 묘사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다. 따라서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한다. 그들 모두 존중의 대상이고 공존의 상대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한 가해자인 아버지의 변명을 읽는 데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상식적이지 않고, 인간적이지 않아서다. 배우자와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 소유의 대상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존중의 대상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남녀가 왜 사회의 경쟁 대상이고 지배와 피지배의 대상으로 인식되는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변화를 꾀해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는지 진정으로 노력한다면 인간은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낼 것으로 믿는다.



난 내 부모와 형으로부터 경험한 폭력과 잔인성을 부정하면서 네게 점점 더 심하고 파괴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거야. 여기에 더해 부가적인 임무도 자리하고 있었지. 너를 더 순종적이고 조용하게 만들어 우리의 비밀을 폭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나는 의로운 고문자가 되었다.(p. 104)

이브, 나는 네가 죽기를 바랐다. 너를 살해하기 위해 몇 번이나 시도했어. 내가 이미 망가뜨린 것을 죽이려 한 셈이지. 내가 저지른 일의 증거를 지워야 했으니까.(pp. 122~123)

나는 어린 여자아이를, 내 몸집의 반만 한 아이를 때렸다. 손과 주먹을 휘둘렀고, 벨트를 채찍처럼 내려쳤어. 자비 없이 너를 몰아붙이며 온갖 심한 욕을 해댔지. 네 존재와 육체의 모든 것을 모욕했다. 너에게 수치를 주고 너를 소멸시켜 버리고 싶었어. 난 한계를 모르는 듯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네가 감히 고함을 치거나 빌거나 울면, 너를 협박하며 망신을 주고 네 존재를 부정했어.(p. 124)

나는 다섯 살 때 너의 몸을 가졌다. 네가 주지 않았는데도.(p. 179)




저자 : 이브 엔슬러


토니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극작가이자 작가, 사회운동가다.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여성 200명을 인터뷰해 금기의 대상이었던 여성 성기를 둘러싼 고민과 남성 폭력의 기억을 담아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1997년 오비상OBIE AWARD을 받았으며 세계 140개 국가에서 48개 언어로 공연되었다. 그 후 〈레모네이드LEMONADE〉, 〈특별 조치EXTRAORDINARY MEASURES〉, 〈필요한 목표들NECESSARY TARGETS〉, 〈굿바디THE GOODBODY〉, 〈감정적 동물EMOTIONAL CREATURE〉, 〈프룻 트릴로지FRUIT TRILOGY〉 등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으며, 《버자이너 모놀로그》,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나는 감정이 있는 존재입니다》 등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사회운동가로서 ‘브이데이V-DAY’와 ‘원 빌리언 라이징 레볼루션ONE BILLION RISING REVOLUTION’을 조직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폭력을 막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인권운동가 크리스틴 슐러 데쉬베CHRISTINE SCHULER DESCHYRVER, 2018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드니 무퀘게DENIS MUKWEGE와 함께 콩고민주공화국에 여성 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치유 및 지원 센터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를 세웠다. 〈뉴스위크〉 선정 ‘세상을 바꾼 150명의 여성’, 〈가디언〉 선정 ‘100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 이름을 올렸다.

역자 : 김은령


월간 〈럭셔리〉 편집장. 작가이자 번역가. 《밥보다 책》, 《럭셔리 이즈》, 《바보들은 항상 여자 탓만 한다》, 《비즈니스 라이팅》 등을 썼고 《침묵의 봄》, 《패스트푸드의 제국》, 《나이 드는 것의 미덕》, 《존 로빈스의 인생 혁명》 등 20여 권을 번역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행복이 가득한 집〉 편집장을 지냈으며 《설득의 심리학 워크북》(김호 공역)을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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