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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걷다 - 르퓌 순례길에서 만난 생의 인문학
이재형 지음 / 문예출판사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프랑스에 간 적이 있다. 10년도 넘은 일이다. 파리에 들러 니스, 칸, 모나코 등 지중해안 유명 관광지다. 패키지 여행이라 일정이 빠듯하고 프랑스는 초행이라 다른 곳을 더 들러볼 수도 없는 여행이었다. 다시 꼭 오겠다고 아쉬움을 달래며 귀국 길에 홀로 약속했다. 파리가 무척 인상적이었고, 박물관이나 유명 관광지 위주여서 잠시 걸어본 곳도 몽마르트에 갔을 때뿐이었다. 다음 여행을 홀로 다짐하며 많이 걸어서 차근차근 될수록 많은 곳을 갈 심산이었다.
최근에 '외국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처럼 돼 파리를 다시 떠올리기도 했지만 파리에 국한된 혼자만의 계획이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프랑스에도 순례길이 있구나 할 정도로 저자가 이 책에 소개한 곳은 지명이나 유래도 낯설다. 그러나 무척 흥미롭고 많은 사전 지식을 챙기기에 충분했다.
저자의 자세한 설명은 경험과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니 신뢰감은 물론 저자와 같은 길을 한 번 가볼까? 하는 욕심도 난다. 문체도 좋아 표현해놓은 문장에서 향기가 난다. 파리 여행을 앞두고 계획을 바꿔볼 생각도 든다. 무척 의미 있는 길을 소개하며 그곳의 역사, 문화, 사람들의 삶까지 모두 담아냈으니 읽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 책 『프랑스를 걷다』는 순례길을 따라 걸은 저자 이재형의 기행문이다. 순례길이니 '순례기'가 맞을 것도 같다.
책에 따르면 예수 부활 이후 이베리아반도까지 기독교를 전도한 것으로 알려진 야고보 성인의 무덤을 810년경에 스페인의 한 은둔자가 ‘캄푸스 스텔라’(현재의 산티아고)에서 발견했다. 그곳으로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순례하러 가면서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겨났다.
수 세기가 지난 오늘날 순례는 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기 위한 체험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순례길’ 하면 제일 먼저 스페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스페인의 접경인 프랑스에도 유명한 순례길이 있다. 이곳 '르퓌 순례길'이다.
이 길은 프랑스 남부 산간지방의 르퓌(Le Puy En Velay)에서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로 이어지는 750킬로미터의 여정으로, 이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 순례길이 이어진다. 스페인에 비해 프랑스의 순례길은 산맥을 따라 언덕과 계곡이 반복되고, 고요한 숲속으로 길이 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연 풍경이 펼쳐지고 지역마다 살펴볼 문화유산이 많아 전 세계 순례자들을 조용히 불러 모으고 있다.
저자를 따라 르퓌 순례길에 올라본다. ‘프랑스’ 하면 바게트, 포도주, 프랑스혁명 등으로 상징되는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이 먼저 떠오르지만, 르퓌 순례길에서 우리가 곱씹게 되는 풍경들은 이들과는 조금 다르다.
종교전쟁, 가난, 고립, 박해의 역사가 이 순례길 위에 새겨져 있다. 고요한 숲길이 안내하는 르퓌 순례길을 걷다 보면 『보물섬』을 쓴 루이스 스티븐슨이 당나귀와 함께 걸었던 고독한 순례길, 세벤 지역의 종교적 박해, 보호받지 못한 순례자를 돌보는 오브락 자선병원, 토켈 정신병원이 지키고자 애쓴 자유의 가치, 제보당에 괴물상으로 남아 있는 집단 공포, 훌륭한 보존 상태를 자랑하는 콩크 대수도원 성당의 〈최후의 심판〉 팀파눔과 이 부조가 전하는 종교적 교훈, 또 오방 광산에서 떠올리는 한국의 사북항쟁, 프랑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알제리 전쟁의 흔적 등이 역사의 단편들을 불러온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는 예술과 문화의 도시라는 점도 이 순례 여행에서 느낄 수 있다. 이재형은 르퓌 길 위에서 얀 페르메이르, 오귀스트 로댕, 장 바티스트 피갈, 에두아르 마네, 폴 엘뤼아르, 에밀 졸라, 프랑수아즈 사강, 프랑시스 잠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러 예술가의 자취를 발견하고, 그들이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프랑스의 일상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또, 순례자의 마음을 채우는 렌틸콩 수프, 추위를 달래주는 오베르뉴 대표 음식 알리고, 척박한 환경에서 밀가루를 대신해 주식이 되어준 밤가루 요리, 한국의 찌개를 연상시키는 카술레와 푸짐한 인심을 담은 쿠스쿠스, 프랑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치즈 등 고된 여행에 지친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주는 소박한 프랑스 음식을 소개한다.
우리는 왜 순례 여행을 떠나는 걸까? 이재형은 순례길을 걷는 데는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길이 꼭 순례길일 필요는 없다고도 한다. 익숙한 집을 나서, 길 위에 올라,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요나’의 비유를 들어 말하길 “나, 나 순례자는 고래 배 속에 갇혀 있다가 또 다른 나, 새로운 나가 되어 그곳에서 나와 더 넓은 곳으로, 더 높은 세계로 걸어 나간다.” 그렇게 ‘또 다른 나’가 되는 과정은 순례자의 태도와 유사하다.
국적과 출신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차별과 배제가 없는 순례자들, 공존과 연대의 가치를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경영을 실험하는 소바주 영지, 자동차가 없는 길, 이름 모를 순례자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마련한 먹거리 등. 르퓌 순례길 위에서 만나는 평등, 연대, 나눔, 공존, 소통, 배려의 순간을 통해 소유와 집착의 삶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에 마음을 여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꼭 멀리 이국땅을 밟지 않아도 좋다. 저자의 무한한 호기심이 프랑스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한 것처럼, 우리도 어느 길 위에서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이재형의 르퓌 순례길 여행은 그러한 생의 진리를 발견하는 인문학적 여정이다.
지금까지 르퓌에서 출발해 생장피에드포르에서 끝나는 750킬로미터를 걸었다.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네 개의 순례길 중 하나인 르퓌 순례길은 그 역사성과 정취로 전 세계 순례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저자 이재형은 25년간 프랑스에 거주하며 번역가로서 프랑스의 문화를 한국에 소개해왔다. 2010년 처음 순례 여행을 한 이후 여러 차례 순례길에 오른 그는 순례를 ‘새롭게 태어남’이라고 정의한다. 길에서 몸을 움직이고, 걷고, 생각하고,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있게 한 야고보 성인의 일화에서부터 프랑스-영국 간 백년전쟁의 자취, 프란츠 리스트와 카롤린의 사랑, 현재까지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알제리 전쟁의 흔적까지, 이재형이 들려주는 프랑스 역사ㆍ정치ㆍ문화 이야기와 함께 낯선 그 길을 걸어왔다.
그는 2010년에 불현듯 '떠나라고 등을 떠미는 알 수 없는 힘'으로 니콜라 부비에의 책 한 권과 함께 길을 나섰다. 준비되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그 길에서 정신적인 변화를 느낀다. 그것을 종교적인 체험으로 받아들인 그는, 종교인으로서 한 번, 그 후에는 여러 이유로 르퓌 순례길을 걸었다.
이재형은 프랑스 전문 번역가답게 프랑스 역사, 정치, 문화 전반에 걸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의 구석구석을 소개하고자 했고, 또한 그가 느낀 프랑스의 아름다운 정취를 사진으로 포착하려고 했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와 이미지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 : 이재형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원대학교, 상명여자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우리에게 생소했던 프랑스 소설의 세계를 소개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많은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지금은 프랑스에 머물면서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세상의 용도』 『부엔 까미노』 『어느 하녀의 일기』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꾸뻬 씨의 시간 여행』 『꾸뻬 씨의 사랑 여행』 『마르셀의 여름 1, 2』 『사막의 정원사 무싸』 『카트린 드 메디치』 『장미와 에델바이스』 『이중설계』 『시티 오브 조이』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 『레이스 뜨는 여자』 『정원으로 가는 길』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 『사회계약론』 『법의 정신』 『군중심리』 『사회계약론』 『패자의 기억』 『최후의 성 말빌』 『세월의 거품』 『밤의 노예』 『지구는 우리의 조국』 『마법의 백과사전』 『말빌』 『신혼여행』 『어느 나무의 일기』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