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타자기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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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첫사랑이 떠오르는 책이다. 누구나 첫사랑의 기억은 언제나 되새겨보기에 좋은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감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당시엔 애써 잊었고, 이젠 흐려져가는 기억을 안간힘을 다해 잡으려는 첫사랑은 독자에게도 왔다 갔다.

이 소설은 아련한 그 기억을 되살려주는 느낌 좋은 내용으로 생각했다. 그때 당시 '연애소설'이라 일컬어지던...

그러나 아날로그 기억은 책이 시작되자마자 사라진다. 독자의 시선을 적잖이 당황시킨다. 순간이동 등 초능력이 등장하고, 판타지적 요소가 책의 전편을 흐른다. 장르로 치면 SF판타지 소설쯤 될 것으로 보인다. 아날로그식 첫사랑과 아련한 아름다운 감정만 되살려주기를 바라던 독자의 바람은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아 산산조각났지만 스토리는 무척 신선하고 흥미롭다.

스토리공모전 중장편 부문 우수상 수상작이라서 그런가? 더욱이 작가는 영화진흥공사 재외동포 대상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우수작 수상 작가라니 굉장히 흥미로운 스토리 구상에 천재적 소질이 있는 것으로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기린의 타자기』란 제목에서 풍기는 아날로그 감성이 아닌, 내용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가 감돈다. 기린의 타자기를 받은 서영과 그녀의 딸 지하의 이야기는 순간 이동을 펼치며 사람들을 구해내는 지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순간이동?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초능력자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누구나 한 번은 꿈꾸는 초능력이지만 결코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초능력. 그런 초능력을 가진 지하는 놀랍게도 청각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다.

지하라는 주인공의 이름도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는데 막상 그녀의 엄마인 서영이 지하에 갇힌다는 설정을 읽으면서 굳이 지하라는 이름을 지은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해본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암흑의 공간을 의미할까?

어느 날, 지하의 어머니 서영에게 『조용한 세상』이라는 소설책 한 권이 도착한다. 소설의 작가는 열여덟 살에 가출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살았던 딸 지하다.

서영은 지하가 일종의 메시지처럼 보내온 그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현재와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마침내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어 소설 『조용한 세상』속 서영과 다른 길을 선택한다. 과연 두 모녀는 암울한 현실에서 로그아웃하고 보다 나은 현실로 로그인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펼쳐진다. 순간이동을 펼치는 능력자로 살아가면서 ‘조용한 세상’이라는 소설을 쓴 지하와 그녀의 엄마인 서영의 현실을 그린 이야기와 ‘조용한 세상’이라는 소설 속 소설에서 펼쳐지는 서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영의 상황은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자라면. 결혼에 도달한 과정도, 그 후에 벌어진 친정 식구들의 모습도, 그녀를 끝없이 괴롭히는 시댁 식구들의 모습도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독자가 아날로그 감성의 세대여서 그렇다고 생각진 않는다.소설 속 캐릭터 설정은 작가의 자유지만 그 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가늠하기 어려운 건 서영의 마음이다. 모든 걸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선뜻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소설의 소재로는 충분하다. 소설 내용이기에 얼마든지 이해된다.

엄마 서영을 떠나 순간이동자로 살아가는 지하는 어떨까? 순간이동 능력을 가졌지만 순간이동을 한 후 기억을 잃어버리고 육체적으로 점점 쇠약해져가는 상황들이 점점 통제 불능이 되어가면서 그 능력이 어느 순간 그녀에게는 족쇄가 되어간다. 기린의 타자기. 엄마의 타자기로 쓴 ‘조용한 세상’에서 지하는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소설과 현실이 다르지 않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을 옭아매는 무언가를 뜯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소설의 색깔이 조금씩 변해가는 듯하다.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맘껏 펼쳐내라는 의미일까.





소설은 현실과 소설 속 이야기를 교차 구성하며 진행돼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충분히 준다. 상상력의 공간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리라. 작가의 이력으로 미루어 스토리에 대해선 문단에서 어느 정도 공인된 셈이다.

이 소설 '기린의 타자기'의 분량은 제법 두툼하다. 페이지 수가 대략 400페이지에 육박한다. 두께의 압박은 있지만 가독성이 좋아 쉽게 잘 읽힌다. 요즘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순간이동이라는 초능력, 환타지적인 구성도 독자에게도 매우 신선하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분위기나 인물, 배경 묘사도 치밀하다. 단지 가끔씩 등장하는 자극적 묘사가 당혹스럽긴 했지만 작가의 계산된 수위조절이란 판단이다.

이야기의 구성은 세 가지 갈래로 이루어진다. 주인공 지하의 백일몽 속 이야기, 지하가 쓴 소설 속 이야기, 그리고 진짜 현실속 지하와 엄마 서영의 이야기가 서로 비교되고 교차되며 이루어진다.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 스토리가 진짜 현실일까 궁금하지만 귀결을 보면 세 가지 스토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 초반의 순간이동이나 지하가 쓴 소설 속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2부에 나오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지하의 이야기는 인과 관계가 충분해 좋다.





헌옷 리폼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규칙적인 생활 가운데 꾸준히 글을 쓰는 지하의 모습은 감동적이고, 교훈적이기도 하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핍박받는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소설가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고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여운을 남기며 귀결되는 장면은 짜릿하지만 독자의 심리적 갈등을 해소시켜주기엔 조금은 미흡했다.

결론을 위한 초반의 장치들도 스릴 넘친다. 잘 짜여지고 잘 구성된 소설이란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특히 주인공 지하를 선천적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해서 장애인의 삶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작가의 의도는 매우 시사적이어서 현실을 망각한 소설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한다. 여운이 남는 데 큰 몫을 하는 장치로 승화된다.

녹록치 않은 환경을 딛고 소설가로 성장해 가는 지하의 모습은 독자 보기에도 관심이 간다.

소설 '기린의 타자기'는 손에 한 번 잡으면 쉽게 놓지 못하는 장르적 묘미도 한껏 갖고 있다. 흥미롭고 잘 읽히는, 잘 빚어진 항아리를 감상하는 기분에 독자의 독서욕을 한층 자극한다. 첫사랑 같은 아련한 느낌을 기대한 독자의 요구를 저버리고(?) '홀로서기'를 하는 인물을 통해 작가는 대신 예술성 짙은 장인의 솜씨를 감상하게 해준다.





이 소설에 대한 각지의 감상평도 칭찬이 잇따른다. 소설가 서미애는 “기발한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한 작품. 이질적인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되면서 전체 스토리를 파악할 즈음 비로소 주인공의 능력이 얼마나 기발한, 혹은 절실한 설정인지 알 수 있다.”라고 평했다.

진산 소설가는 “학대받는 어머니, 장애를 가진 딸이라는 음울한 서사를 몇 겹의 액자틀 안에 담아낸 이야기. 다중액자 구성이라는 복잡한 구조를 취했으면서도 계속 읽게 만드는 치열한 힘이 장점이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소설가 해이수는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를 기저로 평행우주론을 끌어들여 긴장미를 추구한 점, 고통스런 현실의 모델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역동성의 기재로 픽션을 활용한 점, 그리고 에피소드를 교차ㆍ중첩ㆍ병치하는 세련미를 시도한 점이 탁월하다.”고 호평했다.





저자 : 황희


2004년 미스터리 휴먼 스릴러 『썸머레인』이 영화진흥공사 재외동포 대상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 제1회 대한민국전자출판대상 공모전에서 『월요일이 없는 소년』으로 대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제1회 네이버북스 미스터리 공모전에서 『부유하는 혼』으로 우수상을 수상해 네이버 웹소설에 작품을 연재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공모전에 당선되며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단편 수상집 『얼음 폭풍』과 장편소설 『빨간 스웨터』『월요일이 없는 소년』 『부유하는 혼』 『내일이 없는 소녀』 등이 있다. 2004년 「썸머레인」 영화진흥공사 재외동포 대상 시나리오 공모전 우수작 당선, 2008년 시나리오 「이웃 주민 방숙자」 영화 원작 계약(시네우드 엔터테인먼트), 2011년 황금가지 좀비 문학 우수작 「잿빛 도시를 걷다」(MBC 2부작 드라마 〈나는 살아 있다〉에 모티브 제공), 2012년 장편소설 『빨간 스웨터』 출간, 2013년 미스터리 단편 수상집 『얼음 폭풍』 출간, 2014년 제1회 대한민국 전자출판대상 공모전 작가 부문 『월요일이 없는 소년』 대상 수상, 2016년 제1회 네이버 미스터리 소설 공모전 우수작 당선 『부유하는 혼』, 2019년 미스터리 판타지 『내일이 없는 소녀』 출간, 2019년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중장편 부문 우수상 『기린의 타자기』 그 외 다수의 작품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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