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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 ㅣ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정명섭 지음, 산호 그림 / 들녘 / 2020년 7월
평점 :
좀비(Zombie) 장르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형 좀비 영화의 가능성을 알린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에 이어, 칸 영화제 초청작 〈반도〉가 코로나로 침체된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 시리즈 역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K-팝' 열풍을 넘어서는 'K-좀비' 시대라고 하면 독자의 편견일까.
좀비는 '살아있는 시체'를 말한다. 서인도 제도 원주민의 미신과 부두교의 제사장들이 마약을 투여해 되살려낸 시체에서 유래한 단어라 한다.
영화에서는 1932년 벨라루고시의 <화이트좀비>가 좀비를 다룬 첫 작품이며 조지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을 기점으로 해서 <좀비오><바탈리언>과 같은 수많은 아류작들이 탄생했다. 좀비영화는 대개 사회 풍자적이거나 블랙 코미디 성향이 강하다. 이 사회 풍자가 좀 막 나가면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좀비영화 같지가 않은 괴작들도 종종 나온다. 일반적으로 좀비영화라 하면 시체, 피, 고어. 괴작 중에는 심지어 전쟁에서 죽은 것이 한이 되어 투표권을 행사하려고 군인 좀비들이 국립묘지에서 부활하는 미쿡 좀비영화도 있다(《마스터즈 오브 호러》 1시즌 6편 '귀향<Homecoming>').
이 책은 좀비 장르가 소수 마니아층의 전유물이던 시절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오늘날까지 무한한 상상력으로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왔던 자타공인 ‘좀비 전문가’ 정명섭의 장편 소설이다. 미스터리, 서스펜스, 호러, 로맨스 장르를 아우르는 들녘 〈미스티 아일랜드〉 시리즈의 신간으로 선보인다. 책의 제목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에서 '그들'이 바로 좀비다.
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원인불명의 바이러스가 발생하고, 살아 있는 시체, 즉 좀비들이 지구를 잠식한다. 인류는 좀비들을 피해 우주로 도피하였다가 102년 만에 귀환하는데, 폐허가 된 지구에 다시 돌아온 이들이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2012년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절찬리 연재되었던 바 있으며, 오늘날의 감각에 맞게 다듬어 정식 출간한다. 여기에 따뜻하고 몽환적이면서 개성적인 작품 세계로 국내외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산호가 표지 및 삽화를 그렸다. 작품 속 세계를 선명한 시각 이미지로 경험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좀비물이라는 장르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긴 하지만, 그 시초는 오래전 일인 까닭에 많은 이들에게 비교적 친숙하고 일종의 클리셰까지 형성되어 있는 장르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좀비물의 핵심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이언스 픽션 장르까지 접목하여 새롭고 독창적인 서사를 펼쳐 보인다. 단연코 올여름 기대할 만한 신작이다.
좀비 상상도 시사상식사전
소설은 액자식 구성을 하고 있다. 구인류라 불리는, 좀비 바이러스 발생 당시를 살았던 인간들의 이야기와 우주에서 태어나 한 번도 지구를 직접 경험해본 적 없는 신인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며 소설의 서사를 이룬다.
좀비 바이러스 확산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인류는 우주로 이주하고, A.D.의 종식과 함께 좀비 아포칼립스, 즉 Z.A.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한다. 하지만 필요한 자원은 물론 산소조차 얻기 힘든 우주에서의 생활은 고달픈 것이었다. 그리하여 102년 만에 인간은 지구로 돌아가기를 선택하고, 곳곳에 선발대를 보낸다. 그중 한반도 원정대장으로 파견된 K-기준은 현지를 정찰하던 중 우연히 구인류의 일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일기를 통해 좀비 출현 사태 당시의 상황을 파악해간다. 맨 처음 아칸소 독감이라는 이름으로 유행병처럼 퍼져나간 좀비 바이러스는 차츰 일상의 균열을 내고 모든 사회 질서를 전복하며 남은 자들의 인간성까지 파괴해갔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한반도 원정대는 예측 밖의 돌발 상황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고, K-기준은 곧 사령부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으며 지구를 되찾기 위한 또 다른 사투가 벌어질 것을 암시한다. 세상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사라져간 자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정말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상상의 나래와 함께 한 번쯤 고민해볼 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호러 장르의 수많은 분과 중에서도 유독 좀비 장르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좀비 장르는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만들어내는 불가해한 공포와 재앙 및 재난 서사가 만들어내는 지극히 현실적인 두려움 사이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
일상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라는 현실적인 공포와 좀비라는 대상이 주는 비현실적인 공포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다는 것이다.
좀비 장르는 일상의 위기에 반응하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적나라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한 점에서 좀비물은 상당 부분 현실의 반증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은 어느 날 등장한 좀비 바이러스로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을 목도하면서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들의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하였다. 그러면서도 우주 세대 신인류의 시각을 통해 서사를 전개해간다는 점에서 문학적인 상상력을 배가하는 장치도 잊지 않았다고 평할 수 있다.
이 책은 세상의 끝에서 자신의 모든 소유와 인간애까지 가진 것을 다 잃고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살아남겠노라고 다짐하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생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이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을 확인해줌과 더불어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때는 Z.A. 102년. Z.A.란 좀비바이러스가 팬데믹 사태에 이르러 전 지구가 좀비에 의해 잡아먹힌 사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우주로 떠난 인류가 102년이 지나 다시 지구에 도착한다. 지구 곳곳에 착륙해 생존지를 확보하려는 원정대. 그 가운데 한반도에 도착한 팀을 중심으로 사건은 진행된다. 과연 이들은 지구 정착에 성공할 수 있을까?
미국 아칸소에서 시작된 독감은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고 한반도는 서울을 시작으로 수도권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심정지 후에도 움직이는 시체의 출현에 미국 당국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보가 밖으로 유출되지 못하게 하는 데만 급급해하는 사이 사건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그런 아비규환 같은 상황에서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지구를 탈출한지 어언 백여 년, 시뮬레이션대로라면 좀비가 멸종했을 거란 예측을 토대로 지구파는 11개 탐사선을 꾸려 세계 곳곳에 탐사팀을 보내 지구의 근황을 살펴보기로 하지만 대부분의 탐사선은 지구 착륙 도중 불안한 기체 결함으로 인해 사라져 실제로 지구에 발을 내린 탐사선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중 한반도에 발을 내린 K-기준이 선두로 이끄는 탐사선은 지구에 닿자마자 좀비와의 격렬한 싸움을 한 뒤 곧 뒤따라 올 지원팀을 맞이하기 위해 정착지를 만든다.
그리고 다음날 주변 정찰에 나갔던 K-기준은 맨홀 밑으로 빠져 고립되고 어두운 곳에 혼자 갇혀있다는 사실보다 좀비가 있을지도 모를 두려움 속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던 그때 오래전 좀비 출현 당시의 상황을 지구인이 기록해 놓은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의 주인은 이대 앞 치즈베라는 카페에서 일하는 청년으로 미국에서 발생한 아칸소 독감이 전 세계로 퍼지는 상황을 뉴스를 통해 전해 듣는다. 그럼에도 아직 한반도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않아 긴박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윽고 정부의 조치로 항공이 폐쇄되고 사람들의 사재기가 시작되면서 점점 혼란스러움이 야기되는 상황에서 프리덤 워치라는 단체가 미국이 숨기는 영상을 보여준다 .
그렇게 조금씩 밝혀지는 아칸소 독감의 실체가 죽지 않고 썩은 채로 거리를 활보하는 인간이었으니 점차 수가 증가하면서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고 일기장의 주인공을 비롯해 프리덤 워치 멤버 몇 명이 모여 카페를 아지트화하기 시작한다.
버려진 건물처럼 보이도록 꾸미고 장기전 돌입을 위해 비상식량과 무기 등을 구비해놓던 젊은이들은 좀비 소탕에 나선 군인들의 등장에 불안했던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좀비와의 전투는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가 아닌 군인의 개입으로 아군 간의 피 터지는 전쟁이 군인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면서 상황은 점점 불투명해지기만 하다.
좀비 이야기라고 하면 다소 뻔한 스토리대로 이리저리 끌고 가다 결국엔 비스무리한 결말로 마무리가 되곤 하는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도 그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인다. 오히려 그런 뻔해 보이는 스토리보다 좀비의 출현으로 당장 내가 살기 위해 약자를 내쳐야 하는 인간 상실에 비중을 두고 있어 눈앞에서 뇌수가 터지고 팔다리가 잘리는 장면보다 더 섬뜩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사람이 죽어 널브러져 있는 것에 무덤덤해지고 당장 내가 살기 위해 돌이 갓 지난 아이만이라도 살려달라는 애 엄마의 눈물 어린 호소를 외면해야만 하는 현실은 내가 살아남고자함인 본능이지만 당연히 느낄 인간애까지 버려야 할 때의 그 고통은 죽음과 견주었을 때 무엇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점들이 소설 속에 녹아 있어 좀비 소설임에도 지금껏 보았던 좀비 소설과는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던 것 같다.
달에서 채취한 석영을 정제해 만든 관측창으로 본 지구는 온통 잿빛이었다. 왠지 숨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K-기준은 공용어인 영어로 중얼거렸다.
“지구는 밝고 찬란한 녹색이라고 하지 않았나?”
“웬걸. 데이모스보다 더 어두운데.”
그들에게 Z.A. 이전의 지구는 물과 대기가 무한하고, 필요한 광물질이 모두 존재하는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그런 꿈같은 기억 때문에 인간들은 지구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비에게 희생당하고, 핵폭발로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말이다. 여하튼 드디어 인간이 이 땅에 다시 돌아왔다. 백 년만에.
“좀비들은 주로 남동쪽에서 나타났네. 하지만 나흘 전까지는 그쪽에 위협이 될 만한 좀비 집단이 없었어. 그런데 이걸 봐. 사흘 전 저녁에 찍은 거야.”
홀로그램 이미지가 변하면서 좀비를 뜻하는 녹색 점이 지도 위에 표시되었다.
“좀비 무리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났어. 그리고는 곧장 우리 쪽을 향해 진군해왔네. 마치 군대처럼 말이야.”
“그래도 출몰한 곳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의심 가는 곳이 있긴 하지.”
사령관이 손으로 홀로그램 지도의 끝을 찍자 지도가 그쪽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인공적인 구조물들의 홀로그램이 솟아났다.
“이건 뭡니까?”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구조를 보면 군사용임이 틀림없어. 지명도 확인했다네. 평택이야.”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그래, 꼬맹아. 인간이 지구를 되찾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해. 하지만 적어도 그 피는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지 않고 대지에 뿌려지겠지. 지구에서 인간으로 죽는 거야.”
우리는 동시에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스쿠터가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자빠질 때까지. 와당탕 넘어지면서 그녀와 부딪치는 바람에 이마가 얼얼했지만 나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입술에 키스했다.
짧은 입맞춤 후 그녀는 두렵지만 이겨내보겠다고 말했다. 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켜주겠다고 대답했다.
저자 : 정명섭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기업 샐러리맨과 바리스타를 거쳐 현재 전업 작가로 활동하면서 대중 강연을 병행하고 있다. 글은 남들이 볼 수 없는 은밀하거나 사라진 공간을 얘기할 때 빛이 난다고 믿는다. 그동안 쓴 작품으로 역사추리소설 『적패』를 비롯하여 『개봉동 명탐정』 『무너진 아파트의 아이들』 『유품정리사』 『한성 프리메이슨』 『어린 만세꾼』 『상해임시정부』 『살아서 가야 한다』 『달이 부서진 밤』 『미스 손탁』 『멸화군』 『불 꺼진 아파트의 아이들』 『어쩌다 고양이 탐정』외 다수가 있다. 그 밖에 『조기의 한국사』 『38년 왜란과 호란 사이』『오래된 서울을 그리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조선 사건 실록』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아라』 『역사 탐험대, 일제의 흔적을 찾아라』 등의 역사서와 함께 쓴 작품집 『일상감시구역』 『모두가 사라질 때』 『좀비 썰록』 『어위크』 등이 있다. 2013년 제1회 직지소설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NEW 크리에이터상을 받았다. 한국 미스터리작가모임과 무경계 작가단에서 활동 중이다.
그림 : 산호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만화가. 상상을 눈앞에 옮기고 싶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픽노블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을 출간했으며,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그림 속에 이야기를 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