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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귀환 -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7월
평점 :
『마르크스의 귀환』에 나오는 마르크스는 그간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던 위대한 사상가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강박성 성격장애가 있는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주변 사람이 엉뚱하고 미심쩍게 여기는 것에 몰두하며 세상을 부유한다. 그는 한 가지 생각에 빠져서 다른 것을 희생해버리는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쓰면서 자신의 삶과 모든 관계를 위험에 빠뜨린다.
소설에 나온 마르크스와 그의 가족은 영화 〈기생충〉의 김씨 가족과도 비슷하다. 나날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투쟁, 고통스러운 사생활, 끊이지 않는 돈 걱정, 그리고 ‘품위’를 향한 욕망이 그렇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방세가 밀리고, 가진 것을 저당 잡히고, 자식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상황에도 고개를 똑바로 들고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직장을 구하고 정착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가 몰두한 단 한 가지는 바로 노동자와 자신의 가족을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줄 『자본』의 집필이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마크르스를 영화 <기생충>의 김씨 가족과 닮았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처럼 힘들고 어려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가장이지만 품위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마르크스의 피나는 노력과 자신의 신념을 전파하려는
끝없는 도전은 어찌 보면 가진 자의 영역(신분 상승)에 들어가고자 했던 김씨 가족과 닮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내 예니의 말에서는 기생충의 김씨가 아닌 허생전에 나온 허생의 부인이 떠오른다. 둘 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말을 하지만 아내의 말에 두 남자는 다른 반응을 보인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그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궁금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중 한 명인 마르크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삶은 행복했을까? 그의 가족은 어땠을까?
이 소설을 읽고 조금은 그런 궁금증이 풀릴 수 있다.
마르크스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가 쓴 『자본론』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는 70~80년대 군부독재시대에는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은 금서다'로 출판은 물론 읽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운동권에서 몰래 돌려 읽으며 독서토론서로 삼았을 뿐이다. 또 『자본론』을 제대로 읽은 사람들이라도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독자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은 적은 있지만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다. 영미소설 『마르크스의 귀환』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가족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자본론』을 쓰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앵겔스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그가 살았던 시대는 어떠했는지를 소설적 즐거움에 실어놓았다.
처음에는 제목을 보고 오해를 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다시 되짚어보는 책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선택했는데 제이슨 바커 저자의 소설이라는 걸 알고 조금은 당황했다. 그러나 철학자로서 현대 철학을 소개하는 일이고, 마르크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감독한 이력을 보고 소설에 대한 궁금증이 오히려 더 커졌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무엇을 그리고 싶었을까?
널리 알려진 인물이자 위대한 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 하지만 우리는 괴벽스러운 천재였던 그의 진짜 삶을 모른다.
『마르크스의 귀환』은 위대한 사상가의 삶을 조망하는 흔한 엄숙주의를 완전히 걷어낸 마르크스 일대기이다.
저자인 제이슨 바커는 철학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저술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기념비적 통찰을 끌어낸 저작 『자본』을 완성해가는 한 인간의 집념과 그 여정을 허구를 곁들여 개성 강한 필치로 그려냈다. 슬라보예 지젝은 『마르크스의 귀환』을 ‘마르크스의 혁명 사상 핵심에 가닿은 걸출한 소설’로 평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마르크스가 이론적 성취에 이르는 과정을 예측 불가능한 방식의 서사로 구현해낸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소설이며, 심리 미스터리, 철학, 미적분학,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의 발췌와 결합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귀환』에 나오는 마르크스는 그간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던 위대한 사상가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강박성 성격장애가 있는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주변 사람이 엉뚱하고 미심쩍게 여기는 것에 몰두하며 세상을 부유한다. 그는 한 가지 생각에 빠져서 다른 것을 희생해버리는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쓰면서 자신의 삶과 모든 관계를 위험에 빠뜨린다.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소설에 나온 마르크스와 그의 가족은 영화 〈기생충〉의 김씨 가족과도 비슷하다. 나날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투쟁, 고통스러운 사생활, 끊이지 않는 돈 걱정, 그리고 ‘품위’를 향한 욕망이 그렇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방세가 밀리고, 가진 것을 저당 잡히고, 자식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상황에도 고개를 똑바로 들고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직장을 구하고 정착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가 몰두한 단 한 가지는 바로 노동자와 자신의 가족을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줄 『자본』의 집필이었다.
19세기, 억압과 악취로 찌든 런던에서 부르주아사회와 자본은 빠른 속도로 자신의 영향력을 증식하고 있었다. 자본은 모든 데 스며들고, 모든 곳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이를 침울하게 바라보던 마르크스의 고뇌는 21세기에 되살아난다. 『자본』을 쓰도록 추동한 19세기 영국 노동자의 참혹한 삶은 오늘날 재현되고 있다. 한국의 청년들은 피자 배달을 ‘업’으로 삼고, 노인들은 폐지를 줍도록 거리로 내몰린다.
그 어느 시대보다 양극화 현상이 세계적 차원에서 극심해지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거대 공장이 뿜어내는 유황 구름과 숨조차 쉴 수 없는 탁한 공기, 부유물로 뒤덮인 항구로 대변되는 환경 문제 역시 현재에 오롯이 되살아난다. 지구 가열로 인한 기후 위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이를 입증한다.
마르크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은 늘 있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광적인 몽상가 무리가 언제나 그와 함께했다. 현실, 또는 일상이라는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끝없이 ‘혁명’을 추구한 마르크스. 저자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딜레마를 소설이라는 장르로 그려내며, 독자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꿈꿀 수 있는가?’ 『마르크스의 귀환』을 읽는 동안 독자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강렬한 열망, 다시 소환되는 혁명정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
만일 독자들이 소설로서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불평이 생긴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세계적 석학 캘리니코스의 저서들을 참조하면 된다. 캘리니코스(마르크스의 귀환에 대한 서평이라 다른 학자의 저서명은 생략함을 양해해주시길 바란다)의 책 서평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는 공장, 주택, 귀금속 등 갖가지 부를 모두 자본으로 본다. 그러나 세계적 마르크스주의 석학 캘리니코스는 마르크스가 자본을 전혀 다르게 규정했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은 특정 사물이 아니다” 고 강조했다.
즉, 토지나 설비 등은 생산에 사용될 수 있는 요소들일 뿐이고 특정한 사회관계를 맺어야만 비로소 자본이 된다는 것이다. 자본은 두 가지 관계로 규정된다.
첫째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다. 이 관계에서는 노동자에게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착취가 일어난다. 이 적대적 관계 속에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 의존하는 동시에 투쟁한다. 둘째는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다. 이 관계는 특히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라는 형태를 띤다. 즉, 자본가계급은 조화롭게 통합돼 있는 단일 집단이 아니다.
이렇듯 자본을 관계로 보면 오늘날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과 경제 위기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고, 자본주의를 극복할 혁명적 주체가 누구인지도 밝혀낼 수 있다. 심지어 토니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데이비드 하비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의 본질이 착취와 경쟁이라는 두 가지 관계임을 이해하지 못해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실천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캘리니코스는 지적한다.
『마르크스의 귀환』의 저자 제이슨 바커는 한국어판 출간 이후 이택광 문화비평가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Q1.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마르크스의 삶에 공명한 부분이 있기 때문인가?
A. 12년 전 이 책을 쓰기 시작했기에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마르크스의 글은 영국 대학에 재학 중이던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의 삶을 소설로 쓰려고 한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나는 영국 서리에 있는 예술 디자인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동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엔 마르크스의 삶이 시각적이고 영화적인 언어로 그려져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었다. 배우가 나오지 않아 전기 영화가 되는 걸 피할 수 있고, 사진 대신 그림으로 인물과 풍경을 만들어서 창조적 자유가 커졌다. 어쨌든 2010년 이 작업을 포기했다. 서랍 속에 각본을 넣어둔 채 6년간 쳐다보지 않았다. 다시 서랍을 열었을 때 이 이야기를 할 유일한 방법은 소설이었다. 마르크스에게 공감이 가는 이유는 뭘까? 그의 성격에서 나 자신을 많이 발견했다. 가장 매력적으로 느낀 자질은 고집스러운 광신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은 마르크스처럼 사상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내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독자들은) 마르크스의 상황이 나빠질 낌새를 알아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완고한 고집스러움 때문에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비극에는 이상한 호소력이 있는데 이게 그 일부다. 재난이 막상 닥치면 외면하기 어렵다. 기차 사고를 지켜보게 되는 것과 같달까.
Q2. 『마르크스의 귀환』에는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참고한 작가가 있는가?
A. 작업을 대비해 여러 다양한 소설을 읽었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마르크스의 캐릭터에 적용하려고 했던 황당하고 미덥지 못한 소설 속 화자도 있다. 조지 엘리엇의 『사일러스 마너(Silas Marner))』다. 영화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존 슐레진저의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Far From The Madding Crowd)〉는 물론이고 하디 소설도 있었다. 멋진 이야기다. 19세기 신문 자료 〈1849년 런던의 콜레라 유행(London’s cholera epidemic of 1849)〉도 2장 ‘무한에서 0까지’ 부분을 쓰는 데 도움이 됐다. 제임스 조이스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지인이 내 소설 속 예니(마르크스의 아내)가 『율리시스』의 몰리 블룸을 연상케 한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의도한 건 아니다.
Q3. 21세기에 마르크스의 삶을 다룬 소설과 『자본』을 읽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A. 『자본』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미친 책이고, 엄청나게 흥분되는 책이다. 그러나 미완성이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30년이 지나도록 노력 중이다), 중독성이 있다. 좋은 소설처럼 때로는 그 안에서 길을 잃게 된다. 정글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표지판도 없고, 시야도 트이지 않고 움직이기도 어렵다. 피곤할 수도 있다. 『자본』을 읽은 내 경험이고 큰 도전이다. 21세기의 삶은 큰 도전을 수반할 것이다.
Q4. 패배자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존적인 조건이 마르크스에게 오히려 비범한 삶을 추구하게 한다. 그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A. 소설 속의 마르크스는 ‘루저’라 할 수 있다. 좋은 지적이다. 마르크스가 1849년 런던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떠나온 가난한 독일인 망명자였다는 걸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독일 망명 공동체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 마르크스는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아주 소규모의 친구들에 둘러싸여 살았고, 경쟁자들이 있었지만 보통 신통치 않았다. 마르크스의 정치에는 그다지 ‘위대한’ 것이 없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후에 이야기한 위대한 정치 같은 것 말이다. 마르크스는 실패자였을까? 소설에서도 부분적으로 이 질문을 다룬다.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의 실패를 말하는 건 아직 이르다. 그의 성공 여부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세계는 지금 생태 위기의 대재앙에 직면해 있다. 기후 변화는 인류에게 실존적 위협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력하며 전적으로 경제의 지배 아래에 있어 이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우리는 환경을 구할 수 없다. 터무니없지만 생태 위기를 불러오는 형태의 일들로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중략)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다. 또 집단행동의 모든 힘을 앗아간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러한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요구한다.
우리 삶이 돈과 무관하고, 기업이 아닌 사람들이 세계의 주인이며, 공동의 부를 모든 이의 상호 이익을 위해 관리하는 세상 말이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성공 여부에 대한 테스트다. 노동자들이 그 꿈을 현실이 되게 하자.
저자 : 제이슨 바커
197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03년 웨일스의 카디프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을 영미권에 활발하게 소개했다. 2002년 발표한 『알랭 바디우 : 비판적 입문』으로 바디우에게 ‘내 작업의 정치적 궤적을 가장 잘 설명한 책’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영미권의 바디우 연구에 물꼬를 텄다. 이후 런던대학교, 미들섹스대학교, 런던커뮤니케이션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다큐멘터리 〈마르크스 재장전〉을 집필, 감독, 공동 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슬라보예 지젝, 페터 슬로터다이크, 니나 파워, 알베르토 토스카노, 자크 랑시에르, 존 그레이,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등이 출연하여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의 부활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다룬다. 2011년 9월에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2018년 『마르크스의 귀환』을 출간했고, 지젝은 이 책에 대해 ‘마르크스의 혁명 사상 핵심에 가닿은 걸출한 소설’로 평했다. 최근에는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 북리뷰》
《다이어크리틱스》 등의 신문과 잡지, 학술지에 글과 서평, 비평 등을 기고하며, 현재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에서 영화, 철학, 드라마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