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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 사람과 동물의 윤리적 공존을 위하여
셸리 케이건 지음, 김후 옮김 / 안타레스 / 2020년 6월
평점 :
바야흐로 우리나라도 '반려동물 1천만 시대'라고 한다. 반려동물이란 개, 고양이 등 동물을 가족처럼 여기고 대우하는 것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하더라도 우리는 동물은 가축이든 야생이든 인간과 엄격히 구분했다. 필요에 의해서 기르다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물건'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면 인간과 동물의 공생은 언제부터였을까? 공생이라면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것을 뜻하는 것 아닌가. 동물에게도 윤리가 있을까? 있다면 그 윤리는 인간의 윤리와 같은 것일까?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의 저자 셸리 케이건은 동물을 다루는 윤리학적 관점은 생명체의 형태에 따라 도덕적으로 적당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예를들면 모기를 죽이는 행위는 침팬지를 죽이는 것과 같은 종류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사람의 삶은 쥐보다 낫다. 인간과 쥐의 이런 비교론이 옳은 것일까? 쥐의 삶은 과연 인간의 삶보다 못할까?
인간의 삶만 가치가 있는 것일까? 사람만이 어떤 종류의 삶이 다른 종류의 삶보다 가치 있는지 없는지 질문하고 고민하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의 내면은커녕 사회적 삶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사람이 동물보다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고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와 같은 차이는 그들의 삶이 지금 어떻고 앞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지와 같은 삶의 내용에 좌우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를 통해 ‘죽음의 본질’과 ‘인생의 의미’를 탐구했던 그가, 이번에는 동물윤리 한복판에 뛰어들어 ‘동물의 삶’과 ‘인간의 자격’을 역설한다. 이 책은 케이건 교수가 옥스퍼드대학교 우에히로 실천윤리 센터(UEHIRO CENTRE FOR PRACTICAL ETHICS)의 초청을 받아 진행한 특별 강좌를 재구성한 것으로, 인간과 동물의 도덕적 ‘지위’와 의무론적 ‘권리’ 그리고 윤리적 ‘공존’에 관해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써 그의 윤리적 관심은 ‘인간의 죽음’을 넘어 ‘동물의 삶’을 아우르는 데까지 이르렀다. 케이건 교수 특유의 유머 감각과 재치 있는 입담은 여전하다. 논증은 훨씬 정교하고 집요해졌다. 이 책에서도 그는 독자의 지적 호기심과 윤리적 양심을 일깨우는 다양한 질문을 던지지만, 대표적인 현대 철학자답게 신념과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이성과 논리로만 동물의 권리와 인간의 가치를 파헤친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읽힌다. 하나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잘사는 ‘윤리적 공존’을 모색하는 작업이며, 다른 하나는 지구상에 가장 월등한 존재로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다.
오늘날 동물윤리 분야의 지배적 견해에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는 동시에, 사람과 동물의 도덕적 차이를 철학적으로 살핌으로써 ‘무엇이 인간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는지’ 성찰하게 한다.
사람과 동물은 동등하지 않다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동물을 어떤 식으로 대우할 것인가?”와 관련한 철학적 주제는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50년이 흐르는 동안 추(錘)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동물윤리는 도덕철학에서 가장 견고하게 자리 잡은 분야가 됐다. 이 주제를 다룬 저작과 논문과 기사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며, 정기 간행물 발행이나 학술회의 개최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서 동물윤리 분야에 거대한 ‘철학적 관점’이 형성됐다.
이 책에서 셸리 케이건 교수는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관점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다음 논증을 시작한다.
‘도덕적 입장(moral standing)’을 가진 존재는 마땅히 도덕적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모든 개체가 동일한 ‘도덕적 지위(moral status)’를 갖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도덕적 지위는 동물보다 월등히 높으며 동물들 사이에서도 각각 다르다. 이른바 ‘계층적(hierarchical)’ 관점이다.
그러나 누구든 직관적으로 당연하게 여길 것 같은 이 관점은 동물윤리 분야의 주류가 아니다. 오늘날 동물윤리를 지배하는 견해, 즉 ‘철학적 관점’은 “사람과 동물은 동등하다”는 입장이며, 케이건 교수는 이 관점을 ‘단 하나’의 도덕적 지위만을 인정한다고 해서 ‘단일주의(unitarianism)’라고 부른다. 그는 인간 사회의 도덕 이론을 동물에 적용한 단일주의자들의 노고를 인정하면서도, 동물윤리 분야가 교착 상태에 빠진 이유 또한 이들의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사람과 동물이 동등하다는 견해가 “동물을 사람과 같이 헤아려야 한다”는 일반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괴상한 논리로 발전해 공론을 이끌어내기는커녕 분열만 야기하고 있다.
개나 고양이는 ‘가족’과 같은 헤아림을 받는 반면 소나 돼지는 ‘고기’로 식탁에 오르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일주의 관점에서는 그저 ‘옳지 못한’ 행위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더 이상 논의의 여지는 없다.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존재들
“도덕적 입장을 가진 존재는 도덕적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해당 존재가 ‘도덕적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저자는 “고통은 고통(Pain is Pain)”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지각 능력(sentience)’, 즉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는 도덕적 입장을 갖는다”는 단일주의의 기존 견해를 소개한 뒤, 이 능력은 도덕적 입장 설정의 근거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고통이나 쾌락은 해당 개체만이 느낄 수 있는 주관적 경험이므로, 지각 능력은 이를테면 학대당하는 고양이를 보고도 그저 몸부림칠 뿐이지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개념이 못된다. 그래서 해당 개체가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지의 여부는 케이건 교수가 ‘행동 능력(agency)’이라고 명명한 개념을 통해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행동 능력은 스스로의 의지와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말하며, 우리가 해당 개체의 행동 양상만 관찰하면 도덕적 입장의 확보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는 나아가 사람과 동물의 도덕적 지위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인간의 삶과 동물의 삶을 비교하면서, 사람인 우리가 동물보다 더 가질 수 있는 ‘좋은 것들’에 관해 고찰한다.
무엇이 도덕적 지위를 결정하는가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존재들에게 높고 낮은 도덕적 지위를 갖게 하는 특성은 무엇일까? 무엇이 도덕적 지위와 격차를 만들까?
케이건 교수는 다름 아닌 ‘정신적 능력’에서의 차이가 도덕적 지위를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정신 능력은 ‘행동 능력’과 이어진다.
사람이 동물보다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 것도, 개와 고양이가 물고기나 곤충보다 도덕적 지위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같은 종(種)의 동물들끼리도 그 능력에 따라 도덕적 지위는 달라진다. 모든 돼지가 아닌, ‘이’ 돼지와 ‘저’ 돼지가 저마다 확보한 능력이 도덕적 지위의 차이를 초래한다는 ‘개체주의(individualism)’ 시각이다. 케이건 교수는 심지어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지위가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심각한 뇌 손상을 입어 정신적 능력이 결여된 인간은 통상적인 사람들보다 도덕적 지위가 낮다. 이는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지만, 케이건 교수는 ‘잠재적(potential)’ 지위와 ‘양식적(modal)’ 지위라는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계층적 관점을 유지한다.
계층주의에 대한 몇 가지 우려들
계층적 관점은 용어의 뉘앙스부터 오해를 살 만한 견해다. 차등, 차별, 차이, 격차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케이건 교수는 계층적 관점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몇 가지 우려(공격 포인트)를 설정하고 하나씩 반박한다. 우려는 네 가지다.
계층주의가 ‘엘리트주의(elitism)’라는 비판, 사람보다 도덕적 지위가 높은 ‘우월한(superior) 존재’가 실재한다면 윤리적으로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의 문제, 심각한 정신 장애를 가진 이른바 ‘가장자리 상황(marginal cases)’에 처한 존재의 도덕적 지위를 설명하는 방식,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능력 차이로 인한 도덕적 지위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정상적 편차(normal variation)’ 문제의 설득력 있는 논증 여부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는 ‘엘리트주의’, ‘우월한 존재’, ‘가장자리 상황’은 간단히 우려를 불식시키면서도, ‘정상적 편차’ 문제만큼은 일종의 ‘약속 어음’을 발행하고는 뒤에서 반드시 회수하겠다고만 약속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 책은 현대 철학 논리 전개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후 펼쳐지는 장에서 케이건 교수는 단일주의가 의무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동물에게 의무론적 권리를 부여하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등을 집요할 정도로 꼼꼼히 논증한다. 그리하여 계층적 관점 말고는 의무론과 결합 가능한 견해가 없음을 증명한 뒤 최종적으로 ‘제한적 계층주의’를 동물윤리 분야의 새로운 이론적 토대로 정립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케이건 교수는 독자에게 발행한 약속 어음을 회수하며 ‘정상적 편차’ 문제도 해결된다. 그가 펼치는 논리의 향연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함께 따라가보자.
톰(Tom)이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서 표류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섬에는 몇 가지 식물이 자라고 있지만 삶을 지탱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톰은 음식을 먹어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곧 굶어 죽을 것이다. 이때 그가 지속적으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면 계속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톰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만약 여러분이 물고기가 도덕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물고기 대신 야생 토끼나 다람쥐와 같은 동물들을 떠올려도 된다.
단일주의를 수용한 절대적 의무론자라면 이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가 될 것이다. 톰은 무고한 동물을 죽일 수 없으며, 그것밖에는 살아남을 도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물고기(또는 토끼나 다람쥐)를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 물고기를 죽이는 것은 결국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인데, 이 권리는 여러분이나 내가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력하고 중요하다. 절대적 의무론의 관점에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행동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단일주의를 받아들인 절대적 의무론자로서는 무고한 물고기를 죽이는 행위 또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스스로를 굶어 죽게 하는 것뿐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결론은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일주의적 절대적 의무론자들은 이 결론을 피해가지 못한다.
- 「제7장: 단일주의는 의무론이 될 수 있는가」 중에서
철학에서는 때때로 추상적 주장이 일견 설득력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함의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주장과 그것이 담고 있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설득력 있어 보였던 전제를 포기함으로써 그 주장에 저항(또는 회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더욱이 이성적으로는 이해되는데 감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거나, 반대로 감성적으로는 납득이 되는데 이성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계층주의에 대한 논의에서는 이 같은 딜레마에 봉착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우리가 꽤 오랫동안 살펴본 것처럼 이런 개념들은 그 자체로서도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계층적 접근방식을 통하면 행여 우리가 짊어졌을지도 모를 흥미롭지 않고 불합리한 수많은 잘못된 결론을 모두 피할 수 있다. 계층적 관점은 다분히 현실적이고 직관적인 접근방식이므로 우리의 이성에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다.
-「제11장: 제한적 계층주의라는 대안」 중에서
동물은 비록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지금껏 가져온 생각보다는 훨씬 더 많은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 여러분이 나와 함께 꽤 긴 논의를 진행해오는 동안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들을 점검해볼 수 있었다면 나는 만족한다.
내가 제안한 여러 견해에 여러분이 동의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온전한 ‘사람’인 여러분이 사람의 삶을 살면서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동물의 삶에 투영하는 것이 유의미한 작업임을 깨닫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다. 이제 동물의 몫을 생각할 때다.
무엇을 줄 수 있느냐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동물을 학대해온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그 같은 행위가 불명예스럽고 치욕스럽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인식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날은 오지 않았다. 우리가 오게 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날이다.
-「나오며: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중에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